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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이야기

한 점 부끄럼 없는 당당함을 만나!

by 한사정덕수 2025.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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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댐 건설을 막은 꽃이 있다!”

 

이렇게만 말하면 국가에서 시행하는 사업을 뭔 꽃이 막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동강할미꽃이 바로 댐건설을 막아낸 꽃입니다.

1991년 정선과 영월을 넘어 원주에까지 동강에 댐이 건설된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공식적으로 정부에서 동강댐 건설을 밝혔습니다. 댐 건설이 공식화되자 수몰 예정지에선 이주가 시작됐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댐을 건설한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서서히 살던 터전을 버리고 도시나 다른 고장으로 떠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표가 확연히 나게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떠난 집엔 또 다른 사람이 들락거렸습니다. 육송으로 짠 방문이 떼어지고, 맷돌, 항아리, 낡은 식기와 나무주걱이나 놋주걱과 같은 들고 나를 수만 있으면 모두 어딘가로 실려 나갔습니다. 한 집에서 1톤 트럭 하나는 기본적으로 채울 정도로 버려둔 생활도구와 세월의 켜가 쌓인 물건이 나왔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엔 인적이 드문 밤에만 벌어졌으나 점차 대담하게 대낮에 드러내놓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론 장정 서너 명 대동하고 나타나 외양간에서 구유를 떼고, 방앗간에서 돌확을 파내기도 했습니다. 우편물취급소 간판부터 겨울에나 내놓던 점방의 호빵통까지 참으로 다양한 물건들을 탐냈습니다. 심지어 당시엔 보기 어려워진 간장병과 소주병도 그들은 모두 가져갔습니다.

몇 년에 거친 논란 끝에 2001년 동강댐(영월댐)이 백지화 됐습니다. 당시 찬반양론으로 분열 양상을 보이던 영월과 정선 주민들도 지금은 그 상처들을 치유해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기억도 아련하겠지요. 습관처럼 1년 만에 찾아간 이방인으로서야 그런 상처에 대한 잔상조차 느낄 틈이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동강은 시푸른 물이 굽이돌아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동강을 매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정선군 일대에는 먹을 수 있는 꽃 참꽃(진달래)과 너무도 많이 닮은 개꽃(산철쭉)이 진달래가 지고 난 뒤 강변 바위에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그때면 온통 붉은 물결이 녹색으로 살을 찌워가는 강변에 일렁거리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진달래를 닮았지만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는 꽃이라, 참꽃의 반대되는 표현인 개꽃으로 지역주민들은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 그 개꽃의 아름다움에 취한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1985년부터 매년 봄 정선 일대 강변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특이한 색상을 지닌, 그러면서도 분명히 모양은 할미꽃인 꽃을 만났습니다. 처음으로 동강할미꽃을 만나게 된 날이었던 겁니다. 이 꽃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설악산 주변에서도 발견되던 분홍할미꽃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뿐이었습니다. 물론 동강할미꽃은 분홍색도 있습니다. 흰색과 은빛, 분홍, 연한 보라색, 짙은 보라색까지 정말 다양한 색감을 지닌 꽃이 동강할미꽃입니다.

 

도감을 뒤적여도 찾을 수 없는 꽃,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꽃이었던 동강할미꽃이 훗날 동강댐이 건설되는 걸 막은 주역이 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려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동강할미꽃 외에도 동강댐건설을 막은 공로를 인정해야 할 대상이 또 있습니다. 자연지형적인 조건입니다. 이는 동강할미꽃의 생태와도 관련 있다 하겠습니다.


정선과 영월 지역의 탄광

 

정선과 영월은 석회암지대라 곳곳에 동굴이 있습니다. 지금도 발견되지 않은 천연동굴이 정선에서 영월로 이어지는 강변에 숨어 있으리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습니다. 댐을 건설했을 때, 어딘가에 있을 동굴로 인해 발생할 재앙도 염두에 둘 필요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영월과 정선은 오랫동안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필요했던 연탄을 공급한 지역입니다. 수 없이 많은 탄관들이 지 지역에 몰려있었으니, 그 탄광들이 석탄을 채굴한 굴은 또 얼마나 많을지 제대로 분석도 하지 않고 졸속으로 폭우피해 한 번에 댐건설을 주장한다는 건 자살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탄광에서 막장 노버리도 탔던 경험이 있습니다. 3교대로 전체가 일시에 쉬는 휴무일을 제외하면 탄광은 24시간 쉬지 않고 굴을 팝니다. 탄을 찾기 위해서도 굴을 뚫고 탄맥을 찾으면 다시 채굴을 해 석탄을 파내기 위해 탄맥을 따라가며 굴을 팝니다. 해발 5~600미터 이상 되는 산중에서 시작한 탄광이 동해바다보다 더 깊이 파 내려간 곳도 여러 곳이라 합니다.

 

지질조사로 탄맥이 분포되었다 확인되면 국가가 사업권을 내줍니다. 사무실을 짓고, 자재를 옮길 길을 만들며 곧장 적당한 위치에서 굴진작업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수평으로 뚫고 들어가 케이블을 운용할 공간을 확보하고 권양기를 설치하는 한 편 탄맥의 위치에 따라 수갱방식이나 사갱방식을 선택해 다시 굴을 뚫는 굴진작업을 합니다. 수갱은 승강기와 같은 방식으로 채굴된 암석과 석탄을 끌어올리기 위한 통로를 만드는 굴진작업입니다. 사갱은 산을 오르는 철길처럼 광차를 줄줄이 연결해 케이블로 레일위로 끌어올리도록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통로를 확보하는 굴진방식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탄광은 사갱방식으로 주요 통로를 확보하고 하부로 내려가면서 다시 옆으로 줄기를 찢어 나가는데 이를 편이라 합니다. 편은 직선으로 길을 내며 굴진작업이 이루어지며 탄맥의 위치를 찾으면 거기에서 다시 좌우로 수평을 유지하며 바위를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폭파하며 굴을 뚫게 되는데 이 굴은 크로스라 합니다. 크로스도 탄맥을 향해 뻗어가는 줄기일 뿐입니다. 크로스를 굴진하는 과정에서도 석탄은 나옵니다. 그러나 크로스보다 굴진하며 뚫고 들어가는 바위의 사이에 석탄은 마주 붙은 두 손바닥 사이에 눌러 쥔 흙처럼 끼어 있습니다.

 

굴진 작업을 하는 팀은 바위를 전문으로 천공작업을 하고 다이너마이트로 발파작업을 하며 길을 낸다면, 이제부터 채탄작업을 하는 팀이 현장을 맡습니다. 굴진은 동발이라는 목재를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하지만 채탄을 하는 팀은 이 동발과 나레기라 하는 소나무를 얇게 켠 송판이나 제재를 하며 나온 죽데기와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석탄을 파낸 공간은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기에 소나무를 잘라 통로도 만들고, 바위 사이를 지탱하도록 끼우며 채탄작업을 해야 됩니다.

 

이런 내용은 별도로 글을 써야 정리가 되겠군요. 이 채탄작업을 하는 광경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하기로 하고, 그렇게 형성된 굴이 동강댐을 건설하겠다고 한 정선과 영월 일대에 도처에 드러나지 않는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하며 동강댐 건설을 하면 안 된다고 했었습니다.

지금이야 많은 이들이 동강할미꽃을 알고 계시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극히 일부에서만 동강할미꽃을 알 정도였지요. 이제까지 동강할미꽃을 몰랐던 이라도 사진을 보았으니 봄철 산소에 핀 할미꽃과는 분명히 구조적 형태나 색상 등이 다르다는 걸 공감하게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엔 어떤 도감에도 이 꽃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지 중의 오지인, 더구나 탄광촌인 이곳을 식물학자들이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테니 당연한 이야기겠습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꼬불꼬불 사려놓은 것 같은 양의 창자를 이르는 말로, 정선과 영월 일대 길()이 구절양장 그대로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걷는 맛이 남 다른 곳이지만, 그만큼 속살 쉬 드러내지 않는 지리적 특성으로 외지인의 발길이 적었습니다.

 

정선아라리라는 특정 지역 이름을 오롯이 살린 우리 소리가 있습니다. 정선과 영월, 평창을 잇고, 백두대간을 경계로 태백과 울진, 삼척, 동해, 강릉 등으로 이어지는 준령과 뼝대(깎아지른 듯 높이 솟구친 절벽을 이르는 강원도의 방언) 아득한 지형에 가두어진 고장이 정선입니다. 그런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야 했던 민초들의 애환을 담은 가락이 정선아라리입니다.

 

전 그렇게 접근성도 불편했던 정선군을 사북부터 고한을 거쳐 정선읍까지, 구절리에서 여량을 지나 정선읍까지, 매년 물길이 있는 곳이면 찾아갔습니다. 색도, 피는 자리도 특이한 할미꽃을 제대로 보려고 이듬해 가수리로 가는 뼝대를개꽃이 피기도 전인 3월 하순부터 시작해 4월 초 찾았습니다. 처음엔 워낙 추운 고장이라 4월 초에 찾아갔는데 하지만 턱도 없이 늦어 이미 대부분 꽃은 진 뒤였습니다. 겨우 몇 송이 늦게 핀 할미꽃을 만나는 걸로 아쉬운 발길을 돌렸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된 동강할미꽃을 20193월에도 만날 약속을 친구와 미리 해두었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친구에게 전화를 했엇지요. “동강할미꽃이 지금 한창일 텐데 시간이 어때?”라 친구에게 말하자, “아직 잘 모르지만 솔직히 요즘 바빠서 정확하게 약속은 못해, 하지만 주중에 어떻게든 시간이 되면 연락을 다시 할께"”라 대답하더군요. 그렇게 그 주말은 지나갔습니다.

 

326일 수요일 아침 9시 반 조금 넘었는데 친구가 전화를 해 거두절미 정선에 지금 가자. 데리러 갈게 준비하고 있어라 했습니다. “지금 글 하나 올리는 중인데 30분 뒤에 출발하면 좋겠어라 대답하고 서둘러 작업을 마무리 하고 나섰습니다. 오로지 동강할미꽃(pulsatilla tongkangensis Y,N.Lee et T.C.Lee) 하나만을 만나려는 주중행보였습니다. 3월이라기에 햇살도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정말 이런 날씨라면 동강할미꽃은 한껏 자태를 드러내기 좋겠다 생각하며 둘은 기분좋게 출발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점심식사는 조금 늦더라도 정선에서 싸릿골집이나 동박골집에서 하고, 저녁은 양양에 도착해 소주 한 잔 곁들여 하자고 약속까지 하고…

 

동강할미꽃을 촬영하러 나선 길은 예전과 달리 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비포장이던 신작로는 포장이 되는가 싶었는데, 최근엔 터널이 뚫리고 새로운 교량이 놓이는 등 고속도로 못지않게 좋아졌습니다. 친구도 저와 수없이 정선과 영월 평창일대를 돌았기에 이젠 이끼가 근사한 계곡이며, 동강할미꽃이나 물매화가 어디에 피는지 빤히 뀁니다.

 

그런데 출발부터 정선까지는 제대로 갔는데,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전혀 다른 고갯길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만지산 자락에 집을 두고 서울 동자동 쪽방촌에서 몇 년째 생활하며 사진 촬영을 하시는 조문호 선생님의 이야기를 만났던 탓입니다. '귤암리'라 지명을 기억해냈고, 거기다 정영신 작가님과 통화까지 해 귤암리란 지명을 거듭 확인한 뒤인데도 그랬습니다. 친구 전화기로 강원도 사투리 유창한 안내를 받게 된 탓입니다. 그 가우언도 사투리버전의 네비양 정말 요상스럽습니다.

가수리로 가는 길인 건 뚜렷하게 기억하면서 귤암리는 왜 전혀 다른 마을로 생각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평창 미탄으로 빠지는 다릿목 솔치삼거리에서야 이정표에 귤암리가 먼저고 가수리가 다음이란 걸 확인했습니다.

 

동강댐건설을 막아낸 장한 꽃을 그해도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찾았더군요. 사다리까지 가져와 촬영하던 풍경은 이젠 사라졌고, 몰래 캐가는 걸 감시하던 무인카메라도 치웠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찾으며 오히려 감시나 통제보다 사람의 눈이 더 두렵게 됐습니다. 친구와 두 시간 뼝대를 기웃거리며 휘돌았습니다.

올해 또 어떤 인연으로 정선을 다시 찾을지 모르지만, 조만간 다시 봄을 맞아 필 동강할미꽃과 개꽃을 만나러 친구와 나서기 전까진 한동안 정선에 대해선 잊은 듯 살아갈 충분한 양식은 채워두곤 있지만, 여전히 2월 하순으로 접어들면 짧은 2월 달만큼이나 조바심을 내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하기야 개꽃으로 부르던 꽃이 수달래도 물철쭉도 아니란 걸 압니다. 개꽃이라 하던 수달래라 하던 아니면 산철쭉으로 정식 이름으로 부르던 양양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만날 수 있습니다. 백담사를 향해 뻗친 계곡에서도 만날 수 있고, 내린천변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5월 초 정선을 찾던 이유였던 어머니 산소도 오래전 형제들과 상의 끝에 파묘를 해 화장 한 뒤 아버님 모신 곳에 모신지 오래입니다. 산철쭉도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된 이젠 5월에 정선을 다시 찾을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다만 살다 불현듯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나서게 될지는 장담 못합니다. 그게 인생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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