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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계령8

《서평》감으로 읽고, 각으로 살아간다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김미옥 작가의 책을 읽고   『미오기傳』의 작가이기도 한 김미옥. 단순한 인물 기록을 넘어서 한 존재의 시간을 문학으로 각인시켰던 그녀는, 이번에는 책과 책 사이에서 피어난 사유의 편린들을 모아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2024년 8월 초판 출간 이후 같은 달에 벌써 7쇄까지 찍은 기록을 세운, 독자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은 책입니다. 독서라는 행위가 삶을 사유하는 문학적 실천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정갈한 발자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의 문학사조를 창시할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이고 성찰적인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였다는 점에서 더욱 빛납니다.한 사람의 독서가가 세상과 나눈 사유의 지도를 펼쳐 보이는 일은, 단순한 감상문의 .. 2025. 3. 22.
소설 한계령 7 ‘새로운 경험과 아침’ 7.그날 밤, 언제 잠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꿈속에서 엄마를 만났다. 분명 엄마인데, 손을 뻗어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 흐릿한 형체 속에 엄마가 서 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윤곽만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렸다.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안개처럼,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머물렀다.한 걸음 다가가려 하면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지만 메아리처럼 흩어지는 소리. 엄마가 맞는데, 온전히 볼 수 없는 얼굴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한순간이라도 선명해지기를 바라며, 안개 너머를 필사적으로 응시했다.어느 순간, 또 다른 꿈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공간이 한순간에 흔들린다. 바닥이 솟구치고 벽이 녹아내리듯, 세상이 비.. 2025. 3. 7.
소설 한계령 6 ‘100리 눈길을 걸어’ 6.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을 비비자 얼얼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서늘한 건 마음속이었다.눈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넘어지면서 깨달았다. 눈은 그저 하얗게 쌓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길을 지우고, 발을 잡아 넘어뜨릴 수도 있다는 걸.뒤를 돌아보았다. 엉성한 손바닥 자국과 무릎 자국, 그리고 희미해지는 발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조금만 더 눈이 내리면, 그 흔적들도 금세 사라질 것이다.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논을 지나고, 밭을 건너, 바람이 몰아치는 하얀 길 위를 따라갔다. 저 멀리, 대나무가 서 있던 집은 점점 작아졌다. 아직도 화롯불은 따뜻할까. 조청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까.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앞.. 2025. 3. 7.
소설 한계령 5 ‘따뜻한 밥’ 5.설이 지난 뒤, 나는 전날 아버지가 가져다준 까만 털실로 짠 모자를 기분 좋게 눌러쓰고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포근하고 따뜻했다. 새 모자를 쓰고 큰집에 가면, 달달한 고구마를 많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아침밥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밥과 된장국이 올려져 있었다. 장수와 인자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고,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생들의 볼은 차갑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입안에 밥을 넣고 씹을 때마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식사 시간, 숟가락이 그릇을 긁는 소리만이 공기 속을 채웠다.장수는 내 모자를 힐끔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장수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아무 말 .. 2025. 3. 7.
소설 한계령 4 ‘할머니도 떠나신 설’ 4.저녁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건너 마을에 일이 있다고 나가셨다. 형과 나, 그리고 장수와 인자는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할머니와 함께 둘러앉았다. 불꽃은 서서히 부옇게 재를 뒤집어쓰며 흔들렸고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부젓가락으로 화롯불을 다독이며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얼마나 지났을까. 부젓가락을 화로 한쪽에 꾹 눌러 꽂으시고 할머니는 형을 바라보며 물었다.“창연아, 니 엄마는 그 뒤로 여태 아무 연락도 없니?”그 말을 듣는 순간 가만히 할머니가 돋워놓은 화롯불이 내는 빛을 바라봤다. 가물거리며 숯은 또 다시 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장수와 인자도 아무 말 없이 불을 바라보고 있었고, 형도 대답 없이 손에 뻗어 부젓가락을 집더니 화롯불을 휘저을 뿐이었다.말하지 않았지만 속이 저릿했다. 엄마에 대한 .. 2025. 3. 7.
소설 한계령 3 ‘할머니와 따뜻한 밥’ 3.아버지는 이른 아침, 할머니가 지으신 밥과 시래기 된장국으로 아침을 드셨다. 밥 한 숟가락을 크게 떠 된장국에 말아 후후 불어 드시던 아버지는 몇 번 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겠어.” 문풍지가 부웅 소리를 내며 찬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거 같았다. 나는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아버지는 마당을 내다보며 중얼거렸지만, 그 말이 꼭 바람에게 대고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바깥일을 미리 짐작하는 시골 어른의 감각— 나는 그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무서웠다. 아버지는 마치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할머니는 아버지의 밥그릇에 반찬을 하나 더 얹어주며 말했다. “배 든든히 채우고 가야 힘쓰지.” 아버지는 말없이 밥을 마저 비우고 물 한.. 2025.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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