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설이 지난 뒤, 나는 전날 아버지가 가져다준 까만 털실로 짠 모자를 기분 좋게 눌러쓰고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포근하고 따뜻했다. 새 모자를 쓰고 큰집에 가면, 달달한 고구마를 많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아침밥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밥과 된장국이 올려져 있었다. 장수와 인자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고,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생들의 볼은 차갑게 상기되어 있었지만, 입안에 밥을 넣고 씹을 때마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식사 시간, 숟가락이 그릇을 긁는 소리만이 공기 속을 채웠다.
장수는 내 모자를 힐끔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장수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밥을 떠먹었다. 그 작은 시선 하나에도 나는 모자의 따뜻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큰집에서 먹을 달달한 고구마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내딛었다.
아침부터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세상이 더 움츠러든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작은 눈송이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퍼졌다. 발 아래서는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손끝이 시려 왔지만, 모자 덕분인지 머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 한 집에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안은 훈훈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방 한가운데 차려진 밥상 위에는 갓 지은 쌀밥과 소고기를 넣은 미역국이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고, 옆에는 쫀득한 수수경단까지 놓여 있었다.
“창연아, 얘가 둘째니? 마침 우리 상훈이 생일이잖니. 어서 먹어라.”
밥상을 내어주며 아주머니는 은니가 보이게 환하게 웃었다. 형은 “예 덕수예요. 상훈이보다 한 살 더 먹었어요. 한 달 정도 뒷면 얘도 생일이예요.”라고 대답하고 수저를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숟가락을 들어 미역국을 한 입 떴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순간,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음식을 마치 처음 먹어보는 것만 같았다. 분명 어머니가 계실 때도 먹었을 텐데, 왜 그 기억은 남아 있지 않은 걸까?
그때도 아마 어머니가 생일이 돌아오면 미역국을 끓여주셨을 것이다. 쌀밥을 지어 따뜻하게 내어주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기억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다. 어쩌면 먹긴 했지만, 그때는 이런 음식이 특별하다는 걸 몰랐던 걸까. 아니면, 어머니가 떠나고 나서, 이젠 다시 맛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던 걸까.
이따금 기억 속에서 어머니가 희미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냄새나 맛, 손길 같은 사소한 순간 속에서,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불쑥 찾아오곤 했다. 미역국 한 숟가락을 더 떠 입안에 넣었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잊혔던 것들이 다시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내 얼굴을 한 번 훑어보더니, 문득 물었다.
“창연아, 동생 데리고 어디 가는 길이냐?”
아주머니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형이 조용히 대답했다.
“갈천 큰집에 데려다 주려고요.”
아주머니는 놀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이구, 이 겨울에 애를 데리고 그 먼 길을 언제 가려고 그래? 봄이나 되면 데려다 줘도 되잖아. 눈도 많이 올 텐데…”
나는 아무 말 없이 밥을 계속 먹었다. 한 숟가락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며, 다시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방금까지의 따뜻한 미역국이 더는 위로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형과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잠시 방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렴.”
아주머니는 떡과 사탕을 정성스레 싼 보자기를 형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형은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 순간, 싸늘한 바람이 다시 얼굴을 스쳤다.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으며 나는 문득 아주머니가 내어준 따뜻한 밥상과 그 손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눈길 위로 내디뎠다.
얼마나 걸었을까.
밥과 미역국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지만, 그 따뜻했던 온기는 금세 식어갔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고, 차가운 바람이 옷깃 사이를 파고들었다. 냇물은 단단히 얼어붙어 있어 조심조심 건넜고, 산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미끄러웠다.
“형, 아직 멀었어?”
나는 몇 번이고 형에게 물었다. 하지만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보라가 형의 말까지 휩쓸어 가버려 나는 들을 수 없었다.
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걷기만 해야 하는 걸까. 도착하지 못하면 어쩌지. 눈보라는 점점 거세지고,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발은 얼어 감각이 사라질 듯했고, 손은 주머니 속에서도 시렸다.
그때였다.
저 멀리, 산비탈 아래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또 하나, 또 하나. 굴뚝에서 오르는 연기들이 마치 작은 신호처럼 보였다.
형이 조용히 한 집의 마당으로 발을 들였다. 나도 얼른 형의 뒤를 따라섰다. 쌓인 눈이 뽀득뽀득 울리는 소리가 새삼 크게 들렸다. 형이 문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자.”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들렸다. 발끝까지 시려 얼어붙은 몸을 끌고 형을 따라갔다. 눈송이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덜 춥게 느껴졌다.
형이 문 앞에 서자, 안에서 기척이 들렸다. 눈 위에서 뽀득뽀득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방 안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문틈 사이로 미지근한 공기가 새어 나왔다. 완전히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바깥의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는 것만으로도 훨씬 나았다. 문간에 선 아주머니가 형을 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외쳤다.
“창연아, 너 이 시간에 어떻게 왔어?”
목소리에는 놀람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형은 잠시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천천히 말했다.
“동생을 큰집에 데려다 주려고요.”
아주머니는 우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형과 내 어깨엔 녹지도 않은 눈송이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밖에서 떨지 말고, 어서 들어와. 방에 들어가서 몸부터 좀 녹이고 가.”
아주머니는 문을 활짝 열어 주었지만, 방 안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등잔불조차 켜지지 않아 희뿌연 저녁빛이 희미하게 방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녁밥을 짓기 전, 소를 기르는 집에서는 먼저 외양간의 여물을 끓여야 했고, 가마솥에 불을 붙이기 전까지는 기름이 아까워 등잔불을 켜지 않는 법이었다.
방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형 곁에 앉았다. 벽 쪽에 작은 창이 있었지만, 바깥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창호지가 바람결에 희미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손끝으로 창호지를 살짝 눌러 보았다. 바깥의 불빛이 창호지를 타고 어렴풋이 번져 보일 뿐, 세상은 온통 뿌옇게 가려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희미하게 그림자가 일렁였다.
조금 더 창에 바짝 다가갔다. 눈이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창호지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창문이 온 세상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지붕에서 후둑 떨어지는 눈 소리, 바람이 스며드는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는 가마솥 장작 타는 소리까지.
여전히 밖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모든 소리가 창호지 너머에서 들려왔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호지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들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왔을 뿐이다. 나는 형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창을 바라보았다. 창호지가 흔들릴 때마다 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퍽!”
갑작스럽게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형 옆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았다.
“형, 뭐야?”
형도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곧 아무 일 아니라는 듯했다. 아주머니가 무심하게 말하며 화로 쪽으로 향했다.
“눈이 많이 내려서 대나무에 쌓였던 게 한꺼번에 떨어진 거야.”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밖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방금 들린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호지가 살짝 떨렸다. 바깥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대나무 위에 가득 쌓인 눈이 더 무거워지면 또 한 번 저렇게 쏟아질지도 몰랐다.
“춥지? 뭘 좀 먹어야지.”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넓적한 취떡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주머니는 화로 위에 떡을 올렸다. 지글지글, 노릇하게 구워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노릇하게 익어가면서 떡에서 은근한 향이 피어올랐다. 화롯불 위에서 바삭해진 겉면이 부풀어 오르고, 은근한 단내가 감돌았다. 아주머니는 젓가락으로 떡을 뒤집으며 말했다.
“금방 구워질 테니, 조금만 기다려.”
형의 옆에서 가만히 떡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창밖을 보며 추위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는 화롯불과 떡이 주는 따뜻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손을 호호 불며 기다렸다.
조금 후, 아주머니는 떡을 접시에 올려 우리 앞에 내밀었다. 형이 내 몫을 하나 들어 손에 쥐여 주었다. 따끈한 온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겉면 속에서 쫄깃한 떡이 퍼지며 은은한 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 따뜻하고 달큰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만 같았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대나무 위에도 다시 하얀 눈이 쌓이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 덜 추웠다. 형의 옆에서, 화롯불을 바라보며 따끈한 떡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화롯불 위에서 떡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동안, 방금 아주머니가 한 말을 곱씹었다.
“눈이 많이 내려서 대나무에 쌓였던 게 한꺼번에 떨어진 거야.”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떡을 손에 쥔 채 형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형, 대나무가 뭐야?”
형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주머니도 화롯불을 뒤적이던 손을 잠시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면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정말 몰랐다.
오색에서는 대나무라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대나무라고 해도 그건 조릿대였다. 산골짜기 어디에나 깔려 있는, 내 허리에도 못 미치는 키 작은 풀 같은 나무. 비가 오거나 눈이 쌓여도 푹 꺼질 뿐, 소리 한 번 크게 내지 못하는 그런 것들.
그런데 방금 들렸던 소리는 어땠던가.
“퍽!”
눈이 가득 쌓였다가 한꺼번에 떨어진 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조릿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조릿대 위에 쌓인 눈은 그냥 소리 없이 내려앉거나, 바람에 스치듯 휘날릴 뿐이다. 만약 소나무였다면? 그랬다면 눈이 떨어지기 전에 먼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들린 소리는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눈이 쌓였다가 무언가를 타고 미끄러지듯 쏟아지는 소리. 산을 덮는 깊은 눈처럼, 단단하게 쌓였다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소리.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나무라는 게 도대체 어떤 나무이기에 눈이 저렇게 무너져 내리면서도 가지는 부러지지 않는 걸까.
형은 내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화롯불 위의 떡을 뒤집으며 말했다.
“언젠가 보면 알겠지.”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볼 수 있을까. 조릿대가 아닌, 눈이 저렇게 쏟아져 내릴 만큼 크고 단단한 대나무를. 그곳엔, 오색의 산골짜기엔 없는 나무를.
나는 구워진 떡을 한입 깨물며 생각했다. 언젠가 꼭.
다시 떡을 한입 깨물었다. 따뜻하고 쫀득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서 자꾸만 씹고 싶어졌다. 방 안에는 구수한 냄새가 퍼지고, 화롯불은 여전히 빨갛게 살아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가 작은 상 위에 놓인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청은 왜 안 먹니?”
손에 들고 있던 떡을 멈칫하고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가 가리킨 접시에는 까맣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뭔지 몰랐다. 보통 반찬이 있으면 익숙한 냄새라도 날 텐데, 이건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냥 떡만 먹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빙긋 웃더니, 떡 하나를 집어 작은 접시 속 까만 그것에 꾹 찍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예요?”
아주머니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떡을 찍어 먹었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이. 형을 쳐다보았지만 형도 아무 말 없이 떡을 집어 조청에 찍어 먹었다.
다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까맣고 반들반들한 그것. 마치 엿 같지만, 엿은 딱딱해서 이로 깨물어야 했고, 먹고 나면 이빨에 붙어서 혀로 떼어내야 하는데, 저건 너무 말랑거려 보였다.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떡을 들고 아주머니가 했던 것처럼 까만 것에 꾹 찍었다. 그리고 한입 깨물었다.
그 순간, 입 안 가득 달콤한 맛이 퍼졌다.
엿인데, 엿이 아니었다. 딱딱하지 않았다. 떡에 부드럽게 감겨서 함께 씹히는데, 이상하게 떡이 더 쫄깃해지는 것 같았다. 떡만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맛있었다. 달고, 부드럽고, 입 안에서 착 감기면서도 이상하게 계속 씹고 싶어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을 바라보았다.
“이거… 이거 진짜 엿이야?”
형은 빙그레 웃었다. 아주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엿인데 말랑하지?”
한 번 더 떡을 조청에 찍었다. 그리고 또 한입. 조청이 떡을 타고 흐를 듯 부드럽게 감겨 올라왔다.
세상에, 이런 엿이 있었다니.
방금까지 까만 그것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던 걸 까맣게 잊고, 다시 한 번 떡을 찍었다. 그리고는 더 크게 한입 깨물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이 너무 신기해서 자꾸만 씹고 싶어졌다.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엿이 딱딱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떡을 더 맛있게 만들어 주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방 안은 여전히 따뜻했고, 창호지 너머에서는 눈이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보다 이 달콤한 조청이 더 궁금해졌다. 조청에 찍은 떡을 꼭꼭 씹었다. 따뜻했고, 달콤했고, 마치 이곳에서라면 영원히 눈이 내리는 걸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형은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이제 가야 해.”
나는 멈칫했다. 방 안의 온기가 아직 발끝을 감싸고 있었고, 조청의 단맛이 입안에 남아 있었는데. 정말, 지금 다시 나가야 할까?
아주머니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큰집은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되는데, 이 눈길을 어떻게 가려고 그래?”
형은 말없이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형의 눈빛은 단단했다. 마치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더 말리려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깃을 여며 주었다.
나는 조청이 묻은 손끝을 입으로 살짝 핥았다. 아직 손끝에도 단맛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방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형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
그때서야 마지못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서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그대로 얼굴을 덮쳤다.
바깥은 여전히 눈 속이었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은 이미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까 들어올 때 남겼던 발자국도 거의 지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담장 밖을 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낮고 작은 그 집, 굴뚝에서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그리고 문간에서 우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주머니. 그리고 그때, 집 뒤쪽 낮은 지붕 너머로 이상한 나무들이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계속 내려 쌓이고 있는데도, 그 나무들은 전혀 휘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것처럼. 순간 머릿속에서 아까 형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대나무가 뭐야?”
숨을 멈추고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저게 대나무구나.
눈이 잔뜩 쌓였다가 한꺼번에 쏟아질 만큼 크고, 무겁고,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나무. 조릿대처럼 키가 작지도 않고, 소나무처럼 가지가 부러지지도 않는. 오색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 그 나무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형이 앞서 걸어가는 걸 보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논을 가로지르고, 밭을 가로질러 우리는 다시 걸었다.
그때였다.
“앗!”
무언가에 걸려 나는 앞으로 넘어졌다. 그동안 눈길을 조심조심 걸었지만, 이렇게 넘어지긴 처음이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짚었지만, 차가운 눈이 손바닥을 덮었고, 차디찬 감각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형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손을 털었다. 손바닥이 얼얼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발이 어디에 걸린 건지도 몰랐다.
눈 위에 찍힌 내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자국, 팔꿈치 자국, 그리고 푹 파인 발자국.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걸으면서도 조금 전 보았던 대나무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 나무처럼, 나도 그렇게 곧게 일어날 수 있을까.
손끝을 다시 한 번 털어내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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