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날 밤, 언제 잠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엄마를 만났다. 분명 엄마인데, 손을 뻗어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부르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 흐릿한 형체 속에 엄마가 서 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윤곽만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렸다.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안개처럼,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머물렀다.
한 걸음 다가가려 하면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지만 메아리처럼 흩어지는 소리. 엄마가 맞는데, 온전히 볼 수 없는 얼굴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한순간이라도 선명해지기를 바라며, 안개 너머를 필사적으로 응시했다.
어느 순간, 또 다른 꿈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공간이 한순간에 흔들린다. 바닥이 솟구치고 벽이 녹아내리듯, 세상이 비틀렸다. 물결이 뒤섞이며 꿈속 풍경을 휩쓸고 지나간다. 위아래가 사라지고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몸이 떠다녔다. 손을 내밀어도 닿을 곳이 없다. 파편처럼 부서진 빛들이 소용돌이치고, 현실의 경계는 무너져 내린다. 시야 가득 퍼지는 기이한 형상, 알아볼 수도 없는 무언가가 이리저리 뒤엉켜 흐른다.
머릿속이 울렁이고, 귓가에는 알 수 없는 소음이 가득 찬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고, 어떤 형체도 고정되지 않는다. 그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지만,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순간, 깊은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다시, 같은 꿈이 시작된다. 또다시 엄마를 부르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멀어지는 그림자, 손을 뻗어도 미끄러지는 거리감. 불안이 깊어질수록 엄마는 더욱 희미해진다.
또 다른 꿈속, 공간이 찢어지고 뒤틀린다. 온 세상이 다시금 물결처럼 출렁이며 경계가 무너진다. 위아래가 사라지고, 몸이 어디로 떠다니는지도 알 수 없다. 눈앞에서 모든 형체가 뭉개지고, 한순간 현실로 돌아온 듯하지만, 곧 또다시 꿈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끝없는 반복,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감각.
이건 꿈일까, 아니면 끝없이 되풀이되는 현실일까. 어둠은 점점 더 짙어지고, 모든 것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린다.
누군가 몸을 흔들었다. 갑자기 퍼뜩 눈을 떴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슴이 요동쳤다. 방 안의 공기가 탁하게 들이마셔졌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니? 무슨 일이야?"
할머니였다. 놀란 얼굴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차가운 땀이 등에 들러붙고, 손바닥과 이마마저 끈적였다. 꿈속에서 헤매다 나온 탓인지 몸이 아직도 떨렸다. 방 한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큰어머니도 잠에서 깨어났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두운 방 안을 더듬었다.
그런데, 형은 세상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너무 깊이 잠긴 얼굴, 미동도 없는 몸.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한 숨소리.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가슴 한쪽이 무거웠다. 저렇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자고 있는 모습이 괜히 원망스러웠다. 방 안의 공기가 묵직했다. 숨을 들이마셨지만 깊숙이 닿지 않는 느낌.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문밖은 여전히 어둡고, 단 하나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방문 전체를 덮고 있는 창호지가 기이할 정도로 하얗게 떠올라 있었다. 눈이 내려 빛을 반사하는 걸까, 아니면 눈이 그쳐 달빛이 비추는 걸까.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밝아 보이는 창호지가 꿈의 잔상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저 창호지가 언제까지 저렇게 빛날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큰어머니가 사발에 물을 가져다 주셨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 한 모금 삼켰다. 싸늘하게 식은 물줄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안에서부터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물인 줄 알았던 그것은 동치미 국물이었다. 은은한 단맛과 짭조름한 감칠맛이 혀끝에 퍼졌다. 생강 향이 희미하게 감돌았고, 시원하면서도 묘하게 속을 달래주는 기분. 입 안 가득 퍼지는 새큼한 맛에 정신이 더 맑아지는 듯했다.
기묘하게도, 동치미 국물을 마시고 나니 온몸을 휘감던 긴장이 풀렸다. 가슴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듯했다. 마치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던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바깥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속은 한결 편안해졌다.
잠시 뒤, 큰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문이 덜컥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큰엄마 어디 가?"
고요한 방 안에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아랫목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응, 소부터 여물을 먹이거든. 큰엄마는 지금 여물 쑤러 나갔어."
소를 먼저 챙긴다는 것을 몰랐다. 사람이 깨기 전부터 소에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때, 닭이 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새벽을 알리는 소리, 어둠을 깨우는 소리. 차가운 공기 속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방 안까지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할머니, 닭이 울어?"
닭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새벽을 깨우는 듯한 닭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새벽엔 닭이 먼저 울지. 그래야 귀신들이 밤새 와서 놀다가 다 도망가거든."
귀신이 밤에 와서 논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귀신도 있어?"
할머니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있지. 네가 꿈에 막 시달렸잖니. 그건 귀신이 와서 장난을 친 거야."
할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갑자기 몸이 움츠러들었다.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배 아래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밀려왔다. 오줌이 마려웠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건 너무 무서웠다. 혹시라도 어둠 속에서 귀신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애써 참고 버티려 했지만, 점점 더 참기 어려워졌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낑낑대자, 할머니가 눈치를 챘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구, 오줌 마려운 거 아니냐? 내가 망 봐줄 테니 요강에다 눠라. 웃방문만 열면 바로 밑에 있을 거야."
조심스럽게 송판으로 짠 미닫이문을 열었다. 바람이 살짝 스미듯 들어왔다. 문 너머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방이 펼쳐져 있었다. 방 한쪽, 문 바로 아래 커다란 요강이 놓여 있었다.
후다닥 요강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참았던 것을 시원하게 쏟아내고 나서야 숨이 놓였다. 서둘러 문을 닫고 다시 할머니 옆으로 기어들어가 눕자,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살짝 졸았던 것 같다. 할머니가 일어나는 기척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할머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저고리를 여미고 있었다. 이윽고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일어나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부엌은 안방문을 열면 곧장 계단이 이어지는데, 계단 옆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부뚜막이 있었다. 부뚜막의 왼쪽으로는 외양간 사이로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두꺼운 송판 문이 두 짝으로 되어 있었다.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어 바깥 공기가 쉽게 들지 못했다.
외양간에는 커다란 구유가 걸려 있었고, 소 두 마리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여물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쪽에서는 큰어머니가 또 다른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물을 끓이는 한편, 작은 가마솥에 쌀을 씻어 안쳤다. 부뚜막 위에는 큰 가마솥까지 나란히 걸려 있어 부엌에는 총 세 개의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부뚜막 반대쪽 벽에는 장작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부엌은 오색집보다 훨씬 컸다. 외양간 옆에는 또 다른 송판 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것도 굵은 빗장으로 잠겨 있었다. 큰어머니가 밥을 짓는 부뚜막 쪽에도 똑같은 문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 문 위쪽에는 어른 키 높이만큼 위로 작은 창이 달려 있었다. 창문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새벽 공기가 부엌을 가득 채운 가운데, 망가진 솥뚜껑으로 보이는 화로보다 큰 둥근 그릇에 관솔불을 피워놓았는데 그 불빛이 부뚜막과 솥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부엌에서 소여물을 쑤고 밥을 할 때 거기에 불을 피워놓고 일을 하는 거 같았다. 장작 타는 냄새가 서서히 공간을 덮어 갔다.
"큰엄마, 소는 왜 이렇게 조용해요?"
부뚜막 옆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을 힐끗 보다가, 여물을 오물오물 씹는 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 두 마리는 커다란 구유에 머리를 처박고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여물을 먹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여물 속에서 옥수수대와 콩대가 부드럽게 풀어지고 있었다.
큰엄마는 가마솥을 휘저으며 웃었다.
“소는 원래 그래. 말 없이 천천히 꼭꼭 씹어야 살지. 너도 밥 그렇게 꼭꼭 씹어 먹어야 하는 거여.”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는 참 신기했다.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꾸준히 씹기만 하는 모습이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그때,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덕수야, 이리 어여 온나.”
나는 할머니 품에 안겼다. 할머니는 내 손을 감싸며 옷을 걷어 올려주시고, 바지도 무릎까지 올려 주셨다. 그러더니 내 작은 몸을 번쩍 들어 구유의 한쪽 끝에 올려 앉히셨다.
“여기서 손발 씻으면 따뜻하니 좋지.”
살짝 긴장하며 발을 들어 따뜻한 여물물에 담가 보았다.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물이 차가운 손과 발을 감싸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마치 온천에 발을 담근 것처럼 따뜻했다.
그런데 갑자기, 소의 거친 혀가 내 발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앗!”
깜짝 놀라서 발을 움찔했다. 그런데 소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여물을 먹기 시작했다. 큰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허이고, 소가 덕수 너한테 관심이 많네. 네 발도 하도 쪼그매서 여물인 줄 아는가 보다.”
다시 조심스럽게 발을 물에 담그고 소를 바라보았다. 소는 천천히, 아주 차분하게 여물을 씹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혀를 내밀어 내 발을 슬쩍 핥았다. 따뜻한 물에 불려진 내 발을 신기한 듯 핥고는, 곧바로 다시 여물을 씹는 것이었다.
나는 킥킥 웃었다. 소는 내 발이 아니라, 정말 여물만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장난을 치듯 내 발을 한 번씩 핥고 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손도 여물물에 담가보았다. 따뜻한 물속에서 손가락이 천천히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골에서만 할 수 있는, 정말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차갑던 손발이 점점 따뜻해지는 동안, 부엌의 불빛도, 할머니와 큰엄마의 말소리도, 소가 씹는 소리도 정겹게 스며들었다.
소가 꾸준히 씹어 삼키는 동안, 구유 바닥이 서서히 드러났다.
손을 물에서 빼고 소의 입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소야, 이제 거의 다 먹었네.”
소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더니 고삐를 한 번 당기며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와 긴 혀를 쭉 내밀어 구유 바닥에 남은 물을 핥았다.
“할머니! 소 혀가 파래요!”
신기해서 소리쳤다. 방금까지 여물을 먹던 소의 혀가, 어두운 불빛 속에서도 선명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밥솥을 손보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소 혀는 원래 푸르스름하지. 송아지 때는 분홍빛도 돌지만, 크면 클수록 색이 더 짙어지는 겨.”
다시 소를 바라보았다. 혀를 길게 내밀어, 구유 바닥의 남은 물을 한 번 더 핥더니 다시 조용히 여물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할머니, 이 소 이름이 뭐예요?”
할머니는 밥솥뚜껑을 열고 김을 손으로 쫒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누렁이여.”
“누렁이요?”
“오냐, 누렁이. 그냥 다 누렁이지, 뭐.”
고개를 돌려 누렁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조용히 여물을 씹고 있었다.
물에서 손을 빼서 뿔과 뿔 사이, 털이 마치 내 머리의 가마처럼 동그랗게 회오리친 부분을 살며시 쓸어 보았다.
“누렁아, 많이 먹어.”
소는 여물을 씹으며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거칠지만 따뜻한 털의 촉감이 손끝에 남았다.
앉은 자리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리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 구멍으로 본 밖은 아직도 어둠이 짙었다. 부엌의 불빛이 은은하게 부뚜막을 비추고 있었지만, 마당과 그 너머는 까맣게 잠겨 있었다.
그때, 큰어머니가 커다란 양동이를 이고 송판 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한순간 부엌으로 밀려들었다. 새벽의 냉기가 확 감돌았다.
“큰엄마, 어디 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큰어머니는 익숙한 듯 양동이를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우물에 물 길으러 가야지.”
“어멈아, 아직 어둡다. 이따가 물을 길어오지 그러냐.”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하며, 아궁으로 들여다보며 고무래로 불을 물 끓이는 솥 쪽으로 살짝 밀었다.
구유에서 내려서 할머니한테 다가갔다. 할머니는 넓적하게 쪼개진 장작 하나를 내려 아궁이 앞에 놓으며 앉아서 손발을 말리라고 하셨다.
아궁이에서는 장작불이 다시 타오르고 있었고, 그 불빛에 부엌은 조금 더 밝아졌다. 큰어머니의 뒷모습이 어슴푸레 흔들렸다.
“이따가 길어오면 늦어요. 국도 끓여야 되고 밥을 먹으려면 설거지도 하고, 애들 씻을 물도 있어야지요.”
큰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다시 닫히자, 부엌은 다시 원래의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찼다.
바깥을 힐끗 쳐다보았다. 깜깜한 새벽, 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큰어머니의 모습이 문득 낯설고 신기했다.
할머니는 고무래를 한쪽에 내려놓고, 부지갱이로 아궁이 속을 휘저었다. 장작이 붉게 달아오르며 타닥타닥 불꽃을 내뿜었다. 부엌은 장작 타는 냄새와 함께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송판 문이 다시 열렸다. 찬바람이 훅 밀려들었다.
양동이를 이고 들어서는 큰어머니의 발밑에는 하얀 눈이 수북이 달라붙어 있었다. 치마단에도 눈이 달라붙어 희끗희끗 빛났다. 머리카락 끝에도 작은 눈송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어멈아, 미끄럽지 않더냐?”
할머니가 아궁이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부지갱이를 장작 틈새로 깊숙이 밀어 넣으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큰어머니는 양동이를 부뚜막 옆에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그리고 머리에서 또아리를 내려놓고 숨을 가다듬으며 웃었다.
“아이고 어머니, 우물가에 눈이 물하고 섞여서 얼어 좀 미끄럽긴 했어요. 그래도 조심해서 갔다 왔어요.”
치마단에 붙은 눈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큰어머니가 말했다. 머리카락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불빛에 반짝였다.
부엌은 따뜻했지만, 방금까지 머물렀던 바깥 공기가 큰어머니의 옷자락에 서려 있는 듯했다.
부엌 안의 공기가 다시 원래의 온기를 되찾아갔다.
할머니가 부지갱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덕수야, 이제 방에 들어가서 형이랑 누나들 좀 깨워라. 밥 먹으려면 씻으라고 하그라.”
손발이 충분히 녹았는지, 발끝까지 따뜻한 기운이 퍼져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송판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부엌에서 곧장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켜둔 호롱불이 깜빡이며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따뜻한 불빛 아래, 형과 누나들은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고요한 숨소리만 가득한 방 안에서 조심스럽게 다가가 창연이 형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형, 일어나.”
형이 움찔하며 몸을 뒤척였지만 금세 다시 이불 속으로 파묻혔다. 조금 더 세게 흔들며 말했다.
“형, 할머니가 깨우래. 밥 먹으려면 씻으래.”
창연이 형이 낮게 신음하듯 웅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으음… 벌써?”
“응. 할머니가 씻으래.”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형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더니, 호롱불빛 아래 어렴풋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불을 확 걷어 올리며 사촌 형과 누나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광연아! 옥연아! 너네들 빨리 일어나라! 얼른 씻고 밥 먹으래! 순연이랑 순남이도 얼른 일어나.”
웅크리고 자던 광연이 형과 옥연이 누나는 몸을 움찔하며 뒤척였다. 광연이 형은 눈을 반쯤 뜨고는 다시 이불을 끌어당겼고, 옥연이 누나는 힘없이 신음을 내며 몸을 뒤집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이제 형이 알아서 다 깨울 테니. 방 안 한쪽, 따뜻한 아랫목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랫목은 부엌보다 훨씬 훈훈했다.
몸을 웅크리고 형과 누나들이 뒤척이는 모습을 구경했다. 호롱불빛이 잔잔하게 흔들렸고, 부엌에서 풍겨오는 밥 짓는 냄새가 방 안을 부드럽게 채우고 있었다.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난 형과 누나들은 교대로 부엌으로 나갔다. 이제 아침이 밝아오자, 집 안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이나 되는 형과 누나, 그리고 사촌 동생들이 하나둘 부엌을 들락거리며 세수를 했다.
밥솥 옆에 걸린 조금 큰 가마솥에서 끓인 물을 퍼 세숫대야에 붓고, 동이에서 찬물을 떠서 세숫대야에 부어가며 손가락을 담그며 온도를 맞추고는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벽에 걸린 삼베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삼베수건은 서서히 젖더니 축 늘어졌다. 마치 할 일을 다 하고 피곤해 쉬려고 축 늘어진 듯 느껴졌다.
방에서는 이불을 걷어 개켜 옮기는 손길이 분주했다. 밤새 덮었던 크고 군인 담요도, 누가 이런 걸 입을까 싶었던 두꺼운 외투까지 차곡차곡 접혀 뒷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상을 두 개나 가져와 방 한가운데 펼쳤다. 식구가 많으니 상도 하나로는 부족했다.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서자 옥연이 누나가 개다리소반을 들고 먼저 들어왔다. 소반 위에는 수저와 국그릇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옥연이 누나는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반찬을 담아 들고 와 내려놓고, 다시 나가더니 밥그릇을 두 번이나 옮겨와 조심스레 자리에 놓았다. 그러면서 광연이 형에게 부엌으로 가서 큰어머니가 불편하니 국냄비와 화로를 들고 오라고 했다.
잠시 뒤, 큰어머니가 먼저 국냄비를 들고 들어왔고, 광연이 형은 화로를 들고 와 부엌으로 나가는 방문 내려놓았다. 따뜻한 기운이 피어오르며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큰어머니는 화로 위에 국냄비를 올려놓고 국을 퍼서 나눠주었다. 그제야 상 위가 온전히 차려졌다.
전날 밤, 그저 하얀 밥이라 여겼던 것이 아침에 보니 모양이 묘했다. 낯선 질감이 눈에 띄어 들여다보자, 큰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옥수수밥인데 왜 못 먹겠니?”
“아니요. 그냥 쌀이 이상하게 생긴 것 같아요.”
큰어머니는 웃으며 숟가락을 건넸고, 할머니도 덧붙였다.
“덕수야, 이따가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줄게. 우선 밥부터 먹어라.”
한 숟가락 떠넣으니 옥수수밥 속에 감자가 으깨지듯 퍼졌다. 은근한 단맛이 퍼지며 씹을수록 고소함이 배어 나왔다. 옥수수라고 하지 않았으면 그냥 쌀의 한 종류인가 했을 정도였다. 시래깃국에는 두부가 들어 있어 부드러웠고, 반찬으로 나온 고등어와 세치구이까지 더해지니 입안이 금세 따뜻해졌다.
창연이 형은 밥을 다 먹자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어제 종일 눈길에 걸어와 피곤한 모양이라며 윗방도 따뜻하니 가서 자라고 하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형이 들어간 곳은 요강이 있던 방이 아니었다. 우리가 잔 방에서 뒷방 쪽으로 난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도 다시 문이 없이 문지방만 있는 작은 방, 모두가 뒷방이라 부르는 곳이 도 있었다. 뒷방 한쪽에는 이불이며 옷이 쌓여 있었고, 보따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한구석을 덮고 있던 담요였다. 무엇을 덮어둔 걸까 싶어 궁금해 하는데, 옥연이 누나가 조용히 다가와 담요를 걷었다. 그 아래에는 시루가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콩나물을 기르는 시루였다. 옥연이 누나는 둥근 다라에 시루를 얹으려고 가로지른 삼발이에 얹힌 바가지를 들더니 조심스레 물을 뜨기 시작했다. 시루 속에 천천히 물을 붓자, 맑은 물이 조르륵 소리를 내며 밑으로 흘러내렸다. 다섯 바가지쯤 붓고 나서야 누나는 다시 시루 위에 담요를 덮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콩나물처럼, 이 집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생명력을 품으며 흘러가고 있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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