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한계령

소설 한계령 6 ‘100리 눈길을 걸어’

by 한사정덕수 2025. 3. 7.
반응형

ㄴ9

 

6.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을 비비자 얼얼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서늘한 건 마음속이었다.

눈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넘어지면서 깨달았다. 눈은 그저 하얗게 쌓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길을 지우고, 발을 잡아 넘어뜨릴 수도 있다는 걸.

뒤를 돌아보았다. 엉성한 손바닥 자국과 무릎 자국, 그리고 희미해지는 발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조금만 더 눈이 내리면, 그 흔적들도 금세 사라질 것이다.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논을 지나고, 밭을 건너, 바람이 몰아치는 하얀 길 위를 따라갔다. 저 멀리, 대나무가 서 있던 집은 점점 작아졌다. 아직도 화롯불은 따뜻할까. 조청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을까.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앞을 바라보며 걸었다.

길이 달라졌다.

논밭을 가로질러 오던 걸음이 신작로에 접어들었다. 산길처럼 울퉁불퉁하지 않아 발이 빠지는 일은 덜했지만, 쌓인 눈이 깊어 한 걸음마다 푹푹 꺼졌다.

그런데 형은 이상했다.

내가 넘어졌을 때도, 형은 기다려주긴 했지만 왜 넘어진 건지, 다친 곳은 없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빨리 걷자고 재촉할 뿐이었다.

눈길은 미끄러웠고,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럴 때마다 형이 한 번쯤 붙잡아 줄 것 같았지만, 형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길을 걷다 힘들어하면 손을 잡아주거나 업어주었을 텐데.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손을 잡아주지도, 다독여주지도 않았다.

그저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가려는 것처럼, 내 신경 따위는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마치 나를 큰집에 데려다주려는 게 아니라, 빨리 떼어놓으려는 것 같았다. 목적한 곳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눈보라가 거세졌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눈발을 흩뿌렸다. 형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추운 날엔 나를 감싸 안아주었을 텐데. 손이라도 꼭 잡아주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묵묵히 형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눈은 계속 내려 우리가 걸어온 길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신작로 위에 쌓인 눈은 깊었고, 걸을수록 발이 빠졌다. 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가 눈발을 날려 보내면서도, 또다시 끊임없이 쏟아냈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발도 시렸다. 손끝 감각도 희미해졌다. 그런데 형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형의 뒷모습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내가 미끄러져도, 넘어져도, 뒤처져도 돌아보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울고 싶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울어버리면 형이 더 빠르게 걸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아예 이 자리에 나를 두고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눈물이 나려던 것도 멈춰버렸다. 입술을 단단히 깨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눈물을 보이면 형이 싫어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점점 더 작아질 것만 같았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 위에서 형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남기는 발자국도 곧 사라지겠지만 지금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멈추면, 형은 정말 가버릴지도 몰랐다.

형의 어깨 위로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뒷모습을 따라 묵묵히 걸었다.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한 채로.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길은 희미하게 알 수 있었다. 신작로만 따라가면 된다.

지금은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형을 놓치지 말 것.

다리가 아팠다. 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 잠깐만 쉬면 안 돼?"

입안에서 맴돌던 말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형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쉼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눈은 여전히 내렸다. 길은 점점 미끄러워졌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힘이 빠졌다. 그러다 또다시 미끄러졌다.

"!"

눈 속으로 풀썩 쓰러졌다. 차가운 감촉이 옷 속까지 파고들었다. 손바닥과 무릎이 얼얼하게 시렸다. 하지만 형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허둥지둥 일어나 다시 걸었다. 조금만 더 늦으면 형을 놓칠 것 같았다. 신작로는 곧고 길었지만, 어둠 속에서는 어디까지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산들이 검은 그림자처럼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계속 산속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이는 듯했다. 앞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산줄기가 앞을 막았다가, 또다시 어딘가 훤하게 열리는 것 같았다. 길이 어두운데도 뭔가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 어디까지 온 걸까.

숨을 몰아쉬며 형의 뒷모습을 좇았다. 더 이상 넘어지지 않으려고, 놓치지 않으려고,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어둠 속에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고, 지붕들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도착한 걸까? 숨이 가빴다. 정말 다 온 거라면,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형은 멈추지 않았다.

신작로를 따라 걷던 형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비탈길이었다.

,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눈이 쌓인 비탈을 오르는 건 평지를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형이 먼저 앞서 올라갔다. 힘겹게 발을 들어 올렸다. 미끄러졌다. 발이 자꾸만 눈 속으로 빠졌다.

앞에 한 집이 보였다. 저기가 큰집일까? 또 다시 한 집이 이번엔 왼쪽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형은 그대로 지나쳤다.

조금 더 가자 길이 아래로 쭉 내려갔다. 형은 거침없이 걸어 내려갔다. 혹시 또 넘어질까 봐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이제야 다 왔나? 길이 평탄해지는가 싶더니, 형은 다시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왜 또 올라가야 해? 집들이 나타날 때마다 여기일까 기대했지만, 형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몸은 점점 더 지쳐갔다.

하지만 형은 여전히 앞만 보고 걸었다.

그 발자국을 따라 또 걸었다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고.

눈은 계속 퍼붓고, 숨이 점점 가빠졌다. 손이 시리고 발이 아팠다. 고무신 안으로 스며든 눈이 양말을 젖은지 이미 오래다. 너무 추웠다. 눈이 쌓여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형은 앞에서 계속 걸었다.

큰집 아직 멀었어?”

목소리가 바람에 휩쓸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말했다.

좀만 쉬자. 더 못 걷겠어. 다리가 너무 아파.”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멈추지도 않았다. 앞서 걷는 형의 발밑으로 눈이 바스러지며 밀려났다.

길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걸을 땐 크게 경사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뭔가를 세워 두면 가만히 있어도 아래로 천천히 굴러가는 정도의 경사. 길 왼쪽 위에는 논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45도로 떨어지는 경사면이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논의 허리 아래쪽을 지나는 좁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발이 쑥 밀렸다. 눈이 덮인 마른 풀이 쑥 빠지면서 발이 미끄러졌다. 바닥이 사라진 듯한 느낌. 중심을 잃었다.

!”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차가운 눈 속으로 미끄러졌다. 손을 뻗었지만 허공만 잡혔다.

몸이 미끄러지며 비탈 아래로 내려갔다.

눈이 덮여 있지만, 그 아래는 마른 풀이다. 눈과 풀이 맞닿은 면이 너무 미끄러웠다. 손으로 땅을 짚어 보려 했지만, 손끝이 풀 위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을 잡을 게 없었다.

두어 번 굴러서 겨우 멈췄다.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얼굴에 닿은 눈이 녹아 서걱거렸다. 손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손끝이 다시 미끄러졌다. 그제야 바닥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길 위로 고개를 들었다. 형이 보였다. 형은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

형이 짧게 외쳤다. 나는 몸을 일으켜 손을 땅에 짚었다. 다시 미끄러질까 봐 조심스러웠다. 눈은 푹신한 듯 보이지만, 그 아래에 깔린 풀은 단단하게 눌려 있어 오히려 더 미끄러웠다.

위에 선 형이 내 키보다 더 높아 보였다. 미끄러져 내려온 곳을 올려다보니, 형의 키보다 조금 더 높았다. 대충 봐도 내 키의 두 배쯤 되는 비탈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는 더 깊고 검었다.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눈이 쌓여서 밟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뒤쪽을 슬쩍 내려다봤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검은 골짜기가 눈 아래에 드러났다.

한 걸음만 더 미끄러졌으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슴이 턱 막혔다. 손이 덜덜 떨렸다. 형이 만든 발자국이 있는 곳으로 기어 올라갔다. 무릎이 차갑게 젖었다. 손가락도 더 이상 감각이 없었다. 간신히 형이 서 있는 곳까지 기어 올라오자, 형이 발로 눈을 밀어내며 내게 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덕수야, 이제 산 하나만 넘으면 큰집이야. 여긴 밑을 조심해. 풀이 있어서 미끄러워.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큰집 가서 밥 먹자."

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단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아래를 내려다봤다.

앞이 흐릿해졌다. 눈발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

고개를 돌려 형을 쳐다봤다. 형의 얼굴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형이 너무 멀리 가서 그런 걸까? 아니다. 야맹증이었다. 아직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눈이 어두워지면, 형의 발자국도, 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다.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어쩌지? 형을 놓치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형의 그림자를 따라가야 했다.

그때였다. 눈 속에서 시커먼 것이 꿈틀거렸다. 움직였다. 순간, 숨이 멎었다. 그것은 천천히 다가왔다.

거기 누구야?”

낯선 목소리가 눈발 속에서 울려 퍼졌다.

형이 숨을 고르며 외쳤다. “큰아버지! 저 창연이에요. 덕수랑 같이 왔어요!”

큰아버지였다. 형은 큰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확신한 듯했다.

이렇게 눈이 퍼붓는데 왔냐? 난 마을에 일 좀 봐야 되니 조심해서 올라가라.”

큰아버지는 아주 잠깐 멈춰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온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갔다.

형은 말없이 큰아버지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형의 바로 뒤를 따라 걸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가면 큰집이었다. 하지만 내 눈은, 이 어둠을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길은 좁은 골짜기를 따라 이어졌다. 형과 나는 조용히 걸었다.

바람이 잦아든 듯했다. 눈발도 조금 덜해졌다. 대신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형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발끝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따라갔다. 야맹증 때문에 앞이 흐릿했지만, 형의 발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길이 다시 방향을 틀었다. 왼쪽으로 한참을 가더니, 다시 오른쪽으로 비탈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멈칫했다.

, 또 올라가?”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형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순간 움찔했지만, 나도 모르게 손을 꼭 쥐었다. 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형이 끄는 대로 따라갔다. 이전처럼 바닥이 험하지는 않았다. 발밑을 살펴보려 했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었다. 앞이 더 흐릿해졌다.

형의 손이 없었으면,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을 것이다. 경사가 점점 가팔라졌다. 숨이 거칠어졌다. 종아리가 당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깨달았다.

머리 위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였다. 거대한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나무들이 하늘을 가로막아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소나무 가지들이 가만히 쌓인 눈을 이고 있었다. 조용했다. 눈이 덮인 솔가지들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하얀 덩어리들이 나뭇가지마다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

어디선가 눈이 한 덩어리 뚝 떨어졌다.

.

내 발 앞이었다. 움찔하며 형의 손을 더 꼭 쥐었다. 형도 멈춰 섰다.

나무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눈이 쌓인 소나무 숲은 조용했다. 발끝이 폭신한 눈을 밟을 때마다 미세한 소리가 났다. 형의 손을 꼭 잡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채로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런데, 갑자기 형이 멈춰 섰다. 뒤따라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소나무 숲이 끝나 있었다.

길이 넓어졌다. 조금 전까지 겨우 두 사람이 지나갈 만큼 좁았던 길이, 어느새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우리는 산등성이의 갈림길에 올라서 있었다.

눈 덮인 길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넓게 펼쳐졌다. 바람이 휙 지나가자, 눈가루가 낮게 떠올랐다 흩어졌다.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눈앞이 확 트였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때, 멀리 저 아래 하얗게 펼쳐진 완만한 경사 한가운데 불빛 하나가 보였다. 순간 숨을 삼켰다. 흐릿했지만 분명히 보였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작은 불빛. 그곳이 큰집일까?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은 아무 말 없이 그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 덮인 산길에서, 그 불빛 하나가 우리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먼저 묻지는 못했다. 도 그냥 지나칠까 두려웠다.

그때, 형이 말했다.

덕수야, 저기 불이 보이지? 저기가 큰집이야.”

형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진짜?”

. 이제 거의 다 왔어.”

형이 손을 뻗어 가리켰다.

하얗게 보이는 건 전부 밭이야.”

나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불빛은 가만히 깜빡였다. 그 주위를 둘러싼 땅이 희미한 달빛에 비쳐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드러났다. 온통 눈으로 덮인 밭, 멀리 보이는 집, 그리고 그 집을 향해 내려가는 길,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 우리 진짜 다 온 거야?”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을 따라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 정말, 큰집이 코앞이었다.

형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발이 푹푹 빠졌다. 눈이 많이 쌓인 곳에서는 무릎까지 빠졌고, 조금 단단한 곳에서는 미끄러지듯 흘러 내려갔다. 형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길이 다시 좁아졌다. 언덕을 거의 다 내려왔나 싶었을 때 형이 걸음을 멈췄다.

여긴 우물이야.”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눈이 쌓여 있어서 대충 모양이 보였다. 땅이 살짝 움푹 들어간 곳. 그 한가운데, 둥그렇게 둘러쳐진 돌무더기. 정말 우물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발끝으로 눈을 밀어냈다. 차가운 돌이 드러났다. 우물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그 존재감은 뚜렷했다. 우물을 둘러싸고 있던 돌들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때 단단히 쌓여 있던 것들이었겠지만, 눈과 함께 군데군데 묻혀 있어 더 깊고 조용한 느낌을 주었다.

형이 우물을 한 번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내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큰집이 보였다. 우물에서 바라보니 큰집의 전체적인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앞쪽에는 커다란 무언가를 쌓아 올린 더미가 있었고, 왼쪽으로는 외양간이 보였다. 시커멓게 보이지만 부엌과 마당이 연결된 문도 느껴졌다. 내 키만큼 높게 불빛이 보이는 방문과, 그 옆으로 불빛은 없지만 방문 두 개가 더 나란히 보였다. 오른쪽 끝으로는 마당과 연결된 작은 집이 있었는데, 변소처럼 보였다. 그리고 변소와 집 사이에는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고, 부엌 뒤쪽에도 또 다른 큰 나무가 있었다. 마당이 넓었다.

발길을 더 옮길수록 마당이 더 크게 느껴졌다. 눈이 쌓여 있지만, 아래는 단단한 땅이 깔려 있는 듯했다. 바람이 멀리서 불어와 눈가루를 살짝 흩뜨렸다. 마당 끝자락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집이 보였다.

집은 내 키보다 훨씬 높았다. 아니, 훨씬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밑은 돌과 흙을 단단히 쌓아 만든 듯했다. 그 위에 집이 놓여 있었다. 눈이 덮여 있지만 돌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집도 엄청 컸다. 어두운 밤,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문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또 다른 방문이 있었다. 불빛은 없어도 분명히 방문이 두 개 더 나란히 보였다. 우물에서 본 그대로였다. 신기했다. 어두워지면 앞이 캄캄해지는데 이렇게 볼 수 있다니

저절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내가 아는 어느 집보다도 커 보였다.

형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살짝 당겼다. 형을 따라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 정말, 큰집 문 앞이었다.

큰어머니, 저 창연이에요!”

형이 문을 향해 외쳤다. 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자 방문이 활짝 열리며 몇 사람이 동시에 문가에 나타났다. 그 사이로 할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아야, 어떻게 이 눈 속을 뚫고 왔니? 어여 들어오너라. 눈이나 그치면 오지, 이렇게 추운 날에

방 안으로 들어서자 온기가 훅 밀려왔다. 방 안에는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형은 나를 앞세우고 할머니와 큰어머니께 세배를 하라고 했다.

얘가 덜덜 떨고 있구나. 그냥 앉아도 된다.”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세배를 했다. 할머니는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내 모자를 벗겨 주고 머리에 쌓인 눈부터 털어 주셨다.

안 되겠다. 눈부터 털어야지. 온몸이 꽁꽁 얼었겠다.”

형과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 방문 앞 댓돌 위에서 옷을 툭툭 털어냈다. 마당 한가운데 쌓인 눈이 발아래 하얗게 펼쳐져 보였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방바닥엔 대나무로 짠 자리가 깔려 있어 발이 닿는 순간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애야, 너희들 밥 안 먹었지?”

큰어머니가 말하자, 할머니가 곁에 앉은 큰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애미야, 애들 배고프겠다. 어여 밥부터 챙겨라.”

나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배 속이 꼬르륵 울렸다.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따뜻한 밥과 푸근한 온기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형이 옥연이리고 부르는 누나는 큰어머니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상 얼른 봐 오마. 그런데 저녁에 한 밥이 없어서 조금 다시 해야겠구나. 배고프더라도 조금만 참어라.”

큰어머니가 말하고 앞장서자 누나는 조용히 따라 부엌으로 향할 때였다. 형이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옥연아, 반찬 맛있는 걸로 많이 줘.”

누나는 아무 대답 없이 뒷모습만 보이며 사라졌고 큰어머니는 살짝 웃으며 따라 나갔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형은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창연이 형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아침 일찍 오색에서 출발했어요. 아직 동도 트지 않았을 때요. 눈이 엄청 쌓였는데,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푹푹 빠졌어요. 그래도 그냥 걸었어요. 처음에는 춥고 힘들었는데, 조금씩 몸이 적응하니까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할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형의 말을 들으셨다. 형은 손짓까지 곁들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참을 걷다 보니까 세상이 온통 하얗고, 조용했어요. 새 소리도 안 들리고, 발자국 소리만 나요. 길인지 아닌지 정말 하얘서 잘 모르겠는데 그냥 앞으로 가야 하니까 계속 걸었어요. 눈이 반짝이는 게 꼭 꿈속 같았어요.”

그때 광연이 형이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이 눈 속을 종일 걸어왔다고? 창연이 형 진짜 미쳤다.”

형이 광연이 형을 돌아보며 으쓱했다.

그래! 나 진짜 대단하지 않냐? 너 같으면 할 수 있었겠어?”

아니, 안 해. 애초에 미친 짓이니까.”

창연이 형은 더 신이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도 나는 했어! 오색에서부터 갈천까지! 100리도 넘는 길을! 아무도 못할 거라고 했지만, 나는 해냈다고! 나 혼자 눈길을 헤치고 걸었어. 얼마나 멋진 일이야, 할머니!”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창연이 형의 손을 살며시 잡으셨다.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하지만 너무 무리했다. 몸 성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 말을 듣고 창연이 형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요이렇게 오니까 더 좋아요. 할머니도 보고, 다들 보고.”

그때 부엌에서 큰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창연이 형이 그제야 배가 몹시 고팠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드디어 밥이다! 나 오늘 밥 세 그릇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큰어머니는 웃으며 밥상을 내려놓았다.

그래, 그래.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안다. 어려 밥부터 먹으면서 이야기해라.”

형은 자신만 혼자서 걸어온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길을 나도 같이 걸어왔고, 한 번도 업어주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땐 어린 동생을 책임지고 업고 달래며 걸어 온 듯 말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형은 여전히 들뜬 얼굴로 밥상 앞에 앉았다. 몇 숟가락 밥과 국을 먹자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거 같았다. 곧장 푸욱 꺼지는 거 같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