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밥상 위에 피어난 연대의 향기
봄날, 햇살이 부엌 창을 제법 오래 비쳐들 때쯤 달래를 손질하며 봄이 왔음을 실감하던 기억이 납니다. 설을 지나며 흙을 비집고 나온 달래는 마치 흙속에서 겨울을 꾹 참고 버틴 생의 기척 같습니다. 어릴 적 어른들은 이걸 “달래처럼 봄이 자란다”고 했고, 저는 그 말이 참 좋았습니다. 달래처럼 봄이 자란다는 건 봄이 왔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가방에 몇 장의 비닐봉지와 작은 곡괭이, 장갑이 자리합니다. 때로는 양지바른 둔덕을 찾아 맑은 풍경 속에서 책을 읽기도 하지만, 챙겨간 도구들은 앉았던 근처 땅에서 위력을 발휘합니다. 냉이와 씀바귀, 때로는 무더기로 자라는 달래를 만나면, 그 뿌리를 조심스레 캐냅니다.
해토된 땅을 뒤집어 한 줌씩 뽑아 올린 달래에서 알싸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힙니다. 그만 입이 먼저 반깁니다. 보드라운 흙을 살살 털어내면 가느다란 뿌리가 하얗게 싱그러운 봄기운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은 달래로 가장 먼저 만드는 건 쌈된장과 양념간장입니다.
쌈된장은 된장에 길이 4cm 가량으로 썬 달래를 넣고, 다진 마늘과 초피가루를 살짝 뿌립니다. 청양고추는 어슷하게 썰어 톡 쏘는 맛을 더하고, 마늘은 다져서 골고루 섞어줍니다. 주걱을 이용해 고루 버무리면 그 안에서 봄이 익습니다. 며칠 뒤 초피순이 자라면 그것도 곱게 다져 넣습니다. 초피가 진하게 배어들면 된장은 오래 두고 먹어도 향이 근사하고 쉽게 상하지 않습니다. 들기름을 아주 살짝 두르면 고소한 향이 입안을 채우지요. 밥에 얹어도 좋고, 데친 취나물에 살짝 무쳐내도 기막힙니다.
양념간장은 조금 다릅니다. 이건 간장에 4cm 가량으로 썬 달래와 고춧가루, 청양고추를 넣고, 마늘은 얇게 채썰어 넣습니다. 다진 마늘이 아니라 채 썬 마늘을 넣어야 은근히 단맛도 돌고 식감도 살아있지요. 간장은 양조간장과 조선간장, 맛술의 비율을 2:1:1로 해서 간을 조절합니다. 이때 참기름이나 들기름은 넣지 않습니다. 기름은 먹기 직전에, 덜어낸 양념에 한두 방울 떨어뜨려 살살 버무립니다. 이렇게 하면 양념간장이 기름에 쩌들지 않고, 깔끔한 맛을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김이나 채소에 곁들여도 맛이 살아나고, 나물밥을 비벼먹어도 물리지 않습니다.
이 간장과 된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계절을 저장한 작은 항아리입니다. 달래는 봄의 속살이자 흙이 건네는 첫 인사입니다. 그 향은 부엌을 지나 식탁에 이르고, 온 가족의 입맛을 깨웁니다. 누군가는 봄을 꽃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바람으로 느낄 테지만, 저에게 봄은 달래 냄새입니다. 알싸하고 따뜻하고 조금은 눈물겹도록 반가운 냄새입니다.
우리는 지난겨울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마주합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치밀했다면 필연코 살육의 난장이 벌어졌을 그런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자들의 모습을 만났습니다. 다행스럽게 국회에서는 군과 경찰의 방해를 뚫고 비상계엄해제를 선언함으로 가까스로 막았던 겁니다. 그리고 광장에서, 눈보라 치는 한남동 거리와 남태령에서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촛불의 깜빡임보다 더 간절했던 국민의 한숨과 기도, 그 절실함을 기억합니다. 그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을 견디고 맞이한 봄날, 들녘에서 돋아난 달래를 마주하며, 서로를 믿고 지탱해온 연대의 향기가 그 알싸한 향 속에 함께 깃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전하는 온기인 겁니다.
이 달래로 만든 양념된장과 양념간장은 단지 반찬이 아니라, 함께 견뎌낸 시간의 기록이자,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희망의 맛입니다. 냉장고 속 쌈장 한 통, 양념간장 한 통이 준비되면 거기서 봄이 피어납니다. 손끝으로 담아낸 계절의 향기가 밥상에 올라올 때, 봄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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