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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좋은집/자연의향기

머위, 봄이 먼저 돋는 자리

by 한사정덕수 2025.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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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부터 잎, 줄기, 뿌리까지손끝에 머문 봄의 기억

 

머위는 봄보다 먼저, 그보다도 앞서 마음을 움직입니다.

머위꽃과 아이 손바닥만 한 머위잎을 보는 순간, 입 안의 모든 미뢰(味蕾)와 손끝이 먼저 반응합니다. 쌉싸름한 향, 고소한 여운, 껍질을 벗길 때 느껴지는 미세한 감촉까지, 맛과 감각이 먼저 달려와 서로 먼저 느끼겠다고 아우성칩니다.

머위는 3월 중순이 지나면 꽃대가 먼저 올라옵니다. 작은 잎들이 함께 피어나는 걸 보면 얼음 밑에서도 계절은 움직이고 있었구나 싶습니다. 제가 어렷을 적에 할머니는 그 꽃대를 보자마자 잘라 오셨습니다. 마루 끝에 걸어 말려 두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그 꽃대는 약이었습니다.

머위는 꽃, , 줄기, 뿌리까지 버릴 게 없는 식물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식용으로 널리 알려진 산나물로는 곰취, 곤달비, 병풍취가 있습니다. 모두 향이 진하고 식감이 부드러워 봄철 밥상에 자주 오르는 나물들입니다. 머위와 달리 이들은 주로 잎 위주로 섭취하지만, 머위는 줄기와 꽃대까지 쓰이며 쓰임이 훨씬 넓습니다.

꽃은 가래를 멎게 하고, 잎은 이뇨작용에 좋으며, 뿌리를 달이면 편두통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줄기는 데쳐 껍질을 벗기면 쌉싸름하고 고소한 맛이 나 들깨탕이나 볶음에 두루 쓰입니다. 최근에는 줄기를 껍질째 썰어 데친 후 된장으로 무쳐내기도 하고, 머위잎은 그대로 쌈으로 먹기도 합니다.

머위에 함유된 항산화 성분과 각종 비타민, 미네랄은 면역력 강화와 간 건강, 염증 완화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말린 꽃대는 감기 예방과 치료에 두루 쓰였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도 머위 꽃대가 나옵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2014년부터 일본에서 사계절을 나눠 제작된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이른 봄 산에 올라 머위 꽃대를 따와 소금에 절이고 된장을 풀어 머위된장을 끓여냅니다. 쌉싸름한 머위 향이 퍼지는 그 된장은, 이른 봄의 허기를 달래는 단출하지만 깊은 음식으로 그려집니다.

구하기 어려운 머위 꽃 대신 머윗잎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으며, 영화 속에서는 밥 위에 얹어 먹거나 뜨거운 물에 풀어 국처럼 먹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머위된장은 제법 많이 만들어두면 일 년은 간다고 하지만, 밥도둑이란 말처럼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머위는 그렇게 영화 속에서도, 현실의 부엌에서도 조용히 봄을 데워주는 존재입니다.

머위는 먼저 약이 되고, 그다음 돈이 되며, 마침내 밥상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음식이자 반찬이 되었습니다. 한 철만 허투루 넘기지 않아도 이렇게 고맙고도 부지런한 풀이 있다는 걸, 저는 그 머위를 통해 처음 배웠고,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5월이면 잎은 퍼질 대로 퍼지고 줄기는 손가락보다 굵어집니다. 사람들은 이제 너무 억셔하고 고개를 저었지만 큰집에서는 그때부터 진짜 머위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자랄 대로 자란 머위를 잘라다 잎을 떼고, 가마솥을 걸고, 삶아낸 줄기를 껍질 벗기는 일. 일곱 살 오월, 누에가 뽕잎 먹기를 멈추고 소나무 가지 사이에 고치를 틀기 시작할 즈음 큰집 마당에는 멍석이 펴졌습니다.

우물가 근처에서 잘라온 머위잎은 푸성귀처럼 넓었고, 줄기 하나만 들어도 제법 커서 어린아이 얼굴쯤은 거뜬히 가리고도 남았습니다. 먼저 잎을 떼어냈습니다.

그다음은 삶는 일입니다. 마당 한쪽에 돌을 쌓아 아궁이를 만들고 부엌에서 쓰던 중간 크기의 가마솥을 들어다 걸었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잘게 쪼갠 장작으로 불을 지폈습니다. 김이 오르자 머위대를 솥에 가득 넣었습니다. 삶는 동안 주위를 맴돌던 머위 냄새가 점점 짙어졌습니다.

그때 큰어머니는 겨우내 소여물을 끓이고 풀 때 쓰시던, 하지만 소가 들에서 풀을 뜯기 시작하면서 꼴을 베어 나르면서 여물을 끓이던 가마솥 안에 기댄 채 쉬던 작은 갈퀴와 구박을 꺼내 오셨습니다. 그걸로 뜨거운 가마솥 속에서 머위대를 조심조심 건져냅니다. 갈퀴로 휘저으며 구박에 모아 담고, 건져낸 머위대를 곧장 함지에 받은 찬물에 담갔습니다.

김이 빠지고 줄기가 식으면 손질이 시작됩니다. 껍질을 벗기면 손끝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고, 그 물은 며칠이고 손톱과 손가락 사이를 물들였습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던 그 얼룩을할머니는 덕수가 손 좀 썼구먼하시며 웃으셨습니다.

누에가 잠들고 고치가 완성되기 전, 그 머위대는 양양 장날로 나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열한 살 봄에는 외할머니께서, 제가 태어난 외가가 몇 대를 이어 살던 오목골에서도 머위를 잘라다 오색약수터 근방, 지금의 만청장 모텔 자리에 있던 이모할머니 댁에서 손질했습니다.

외할머니는 머위를 유독 좋아하셨고, 오목골 초입, 오래전 연못이 있던 자리에 머위를 길러 5월이면 베어 오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손질할 머위가 많지 않아 곤로나 작은 화덕 위에 양은솥을 올리고 삶았습니다. 삶은 머위대는 주걱과 나무 막대기를 이용해 건져냈고, 곧장 찬물에 담가 식혔습니다. 김이 빠지고 줄기가 식으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껍질을 벗긴 머위대를 4cm 길이로 잘라 들깨탕으로 끓이거나, 마늘을 듬뿍 넣고 소금이나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춰 볶아내셨습니다. 그 쌉싸름하면서도 고소한 맛은 어린 입에도 쉽게 잊히지 않았고, 맛으로만 남지 않고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머위는 그냥 땅에서 나는 풀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사람의 손을 거쳐야 비로소 제맛이 나는 봄의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손들이 사라져가는 지금, 머위는 그 시절의 삶과 계절을 조용히 품고 있는 증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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