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맛좋은집/자연의향기

잠깐 피는 잎, 오래 남는 맛

by 한사정덕수 2025. 3. 29.
반응형

홑잎나물과 부지런한 사람들에 대하여

 

산중의 봄은 조용히 시작됩니다. 흔히 봄이라 하면 터지는 꽃과 요란한 색부터 떠올리지만, 산사는 다릅니다. 그곳의 봄은 향기보다 기척으로 먼저 다가옵니다. 바람이 바뀌고, 짐승의 숨결이 부드러워지며, 새벽 예불 후 스님의 발자국이 땅속 깊이 스며들 때, 작은 변화 하나로 겨울을 조용히 밀어내고 봄은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그런 봄의 길목에서 저는 늘 홑잎을 기다립니다.

 

홑잎은 화살나무나 회잎나무 같은 작은 교목에서 돋아나는 새순입니다. 붉은 겨울눈의 껍질을 밀어내며 솟아나는 연한 초록빛 잎은, 생명의 첫 숨결과도 같습니다. 햇살을 머금고 나와선 며칠 안에 질겨지니, 그 짧고 정확한 때를 놓치지 않으려면 사람의 마음이 먼저 계절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오래전부터 산사에서는 이런 말이 전해집니다.

 

부지런한 처사라야 큰스님 공양에 홑잎나물 세 번 올린다.”

 

그 말 속엔 채취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정갈한 마음과 고요한 손끝으로 계절을 맞이하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공양간에서는 삶은 홑잎을 물기 없이 짜낸 후, 조선간장 몇 방울과 들기름, 고춧가루를 아주 약간만 얹습니다. 무치는 손끝에는 힘이 없어야 하고,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홑잎은 억센 양념을 싫어합니다. 그저 순한 기운으로만 제 맛을 드러내지요.

민가에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한 며느리라도 홑잎나물은 세 번밖에 못 딴다.”

 

산사의 처사와 민가의 며느리. 이름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지만, 둘 다 봄을 앞서 맞이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는 스님의 공양을 위해, 누군가는 가족의 밥상을 위해 손끝을 놀렸습니다. 공통된 것은, 홑잎을 뿌리째 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줄기 끝의 여린 잎만 조심스레 따야 합니다. 그것은 욕심이 아니라 남김입니다. 올해의 봄을 나누고, 내년의 봄을 남겨두는 마음이지요.

저 어렷을 적 어머니도 매년 이 나물을 따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11살 무렵부터 제 손으로 이 나물을 구합니다. 비닐봉지 하나에도 다 채우지 못하는 양이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데쳐낸 홑잎을 꼭 짜서 조선간장에 무치고, 밥상 한 켠에  대로 스며들었습니다. 말없이 퍼내시던 그 한 젓가락에, 계절 전체가 담겨 있었지요.

요즘은 과학도 홑잎의 가치를 하나씩 밝혀내고 있습니다. 화살나무 추출물이 인지기능 저하를 개선하고, 항산화 작용으로 간 해독과 암세포 억제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왔습니다. 퀘르시트린 성분이 풍부해 면역력을 높이고, 혈액 내 불순물을 제거하며, 신경을 안정시켜 우울감까지 완화해준다고 합니다. 과학은 이제야 자연이 오래도록 품어온 자비를 발견해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어머니의 손맛이 더 깊은 처방처럼 느껴집니다. 연구보다 앞선, 삶의 지혜와 맛.

 

홑잎은 식탁 위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피어납니다. 데쳐서 국간장, 들기름, 다진 마늘과 대파, 갈은 깨를 넣고 무치면 봄의 입맛이 되고, 된장을 푼 국물에 넣으면 은은한 홑잎나물국이 됩니다. 밥을 지을 때 함께 넣으면 그 향이 밥알 사이로 배어들고, 달래양념장에 비벼 먹으면 봄 한 그릇이 완성됩니다. 달래간장을 곁들인 비빔밥도 훌륭한 조합이지요. 데쳐서 냉동해두면 겨울에도 꺼내어 먹을 수 있지만, 봄의 지금 맛과는 다릅니다. 계절은 그때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진하게 피어나는 법입니다.

민가든 산사든, 봄을 먼저 알아채는 이는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삽시간에 질겨지는 잎을 놓치지 않으려면, 손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재촉도 없고 계산도 없는 그 움직임 안에, 우리는 삶의 깊은 이치를 하나 배웁니다.

올해도 저는 낮은 산기슭을 천천히 걷습니다. 어쩌면 홑잎을 한 번밖에 못 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봄은 늘 잠깐이지만, 그 짧은 만남을 오래도록 품게 해주는 것이 바로 홑잎의 힘이니까요. 여린 잎 하나에도, 계절의 진심과 사람의 온기가 다 담겨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