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의향기/시인의향기

수세미로 삶과 세상을 문지르며

by 한사정덕수 2025. 3. 27.
반응형

윤기 위에 남은 삶과 시간에 대하여

 

저는 유기의 빛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금속의 반짝임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물성에서만 나오는 조용한 빛입니다. 고요한 날의 오후 햇살처럼 눈부시지 않지만, 그 자체로 공간을 따뜻하게 물들입니다. 유기의 윤기는 단지 손질 잘 된 금속의 표면이 아니라, 삶이 스며든 피부와도 같습니다. 불의 기운과 손때, 말 없는 밥상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시간이 남긴 반짝임입니다.

봄이면 그 빛은 유난히 흐려집니다. 냉이, 달래, 미나리, 취나물, 두릅… 산과 들에서 채취한 산나물들을 가지고 돌아오면, 주방은 곧 계절의 노래가 흐르게 됩니다. 나물을 다듬고, 데치고, 양념하고, 다시 데치는 과정에서 푸르고 노란 물이 조리도구에 남습니다.

유기는 약산성에 반응해 푸른빛을 띠고, 무쇠에는 쓴내가 스며들며, 스테인리스마저 거뭇하게 얼룩이 집니다. 모두가 봄을 품었기에 생긴 흔적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흔적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건 봄이 지나간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손끝의 일은 많아지지만, 이 계절은 늘 그렇게 스며들고, 또 그렇게 사라집니다.

 

다시 정성을 다해 이들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시간입니다. ‘슈퍼파워 브러쉬 클리너’—저는 이 수세미를 늘 이용합니다. 엷은 분홍빛 면은 데친 그릇의 표면을 조용히 닦아내고, 짙은 고동빛 면은 푸르게 얼룩진 유기를 몇 번이고 문지르며 원래의 빛을 되살립니다. 그것은 마치 계절이 남긴 물빛을 되돌리는 일 같기도 합니다.

자연이 놓고 간 자취를 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지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계절마다 반복되는 이 수고는 지루한 노동이 아니라, 삶을 지속시키는 의식입니다. 자연이 준 것을 손으로 다듬고, 혀로 받아들이고 난 다음, 그 자리를 다시 비워놓는 과정. 그 빈 자리에 또다시 다른 느낌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그릇은 그렇게, 삶의 순환을 기억하는 매개가 됩니다.

제 주방엔 유기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정확성, 무쇠의 둔중한 신뢰, 티타늄의 침묵하는 단단함도 함께 있습니다. 각기 다른 금속들 사이를 오가며 저는 생각합니다. 스테인리스는 논리적인 듯하지만 실은 온기를 담지 못하는 체계 같고, 무쇠는 다루기 까다롭지만 깊은 맛을 내는 오래된 신념 같습니다. 티타늄은 결점 없이 단단하지만 너무 완벽한 나머지 체온조차 튕겨내는 냉소적 권위 같기도 합니다.

도구마다 물성이 다르듯 닦는 방식도 같을 수 없습니다. 그 다양함을 이해하고 손끝의 태도를 달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윤기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꼭 사람과 제도,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닮았습니다. 때로는 유기처럼 쉽게 변색되지만 인간적인 것들이 있고, 때로는 티타늄처럼 결점 없으나 비정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금속으로 구성된 주방과도 같고, 정치는 그 도구를 다루는 손길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닦습니다. 기름과 그을음으로 무뎌진 표면을 문지르며 그것이 단지 물질의 때만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손끝에 감긴 세제의 거품과 수세미의 결이 문득 시대의 감각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수세미는 단순한 청소 도구가 아닙니다. 엷은 분홍색 면은 연민과 존중을, 짙은 고동색 면은 분노와 단호함을 닮았습니다. 분홍빛은 살피고, 고동빛은 흔듭니다. 그 두 면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세계를 닦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기술이며 정의의 기술입니다.

예전에 외할머니는 기왓장을 곱게 갈고, 아궁이에서 퍼온 재와 섞은 뒤 짚단으로 유기를 닦으셨습니다. 마당 끝, 힘주어 유기를 반짝거리게 하려고 무릎을 꿇고 그릇을 문지르는 손길에는 말보다 강한 신념과 애정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은 어린 저에게 하나의 예배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청소가 아니라, 살아온 날들을 정리하고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는 행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닦아야 할 것은 그릇만이 아닙니다. TV 속 정치인의 얼굴에 눌러붙은 무례와 무지, 연설 속에서 맴도는 허위와 위선은 물론이고, 상식이라는 이름을 조롱하는 자만과 무감각. 그들을 볼 때마다, 저는 고동색 수세미 면을 그들의 말 위에 올리고 싶어집니다. 한 번, 두 번, 힘주어 빡― 빡― 세게 문지르면… 그 겉껍질 아래에서 진실의 결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어쩌면 아직도 빛나는 무언가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수세미 하나로 세상이 닦이지 않는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닦고자 하는 ‘마음’은 어쩌면 그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이 많아진다면, 세상도 언젠가는 닦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오늘도 닦습니다. 봄나물을 데쳐낸 냄비, 무쇠 팬, 티타늄 냄비, 그리고 유기 그릇. 그 안에 담긴 맛과 마음과 계절과 사람―말과 침묵을 생각하며 닦습니다. 그리고 변색되었던 윤기가 되살아날 때 저는 안도합니다. 이 세계에도 아직 빛을 되찾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닦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부끄러움 없이 다시 빛나게 해주는 손길. 그 손끝에 담긴 마음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 마음을 담아 사는 나 하나만큼은 다시 윤기를 얻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