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의향기/시인의향기

기억의 떡판 위에 떨어진 시간의 메

by 한사정덕수 2025. 3. 26.
반응형

개인의 기억에서 세계사의 균열까지

1905년과 19652025년을 관통한 충격의 메아리

 

1965, 저는 생의 첫걸음마를 시작하던 아기였습니다. 설날 무렵이었으니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만큼 선명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강원도 양양 서면 오색리 오목골의 한겨울 부엌에서 떡메가 내려치던 순간, 그 울림과 충격이 아직도 제 기억에 각인처럼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부엌은 명절 준비로 분주했고, 어머니는 등에 저를 업은 채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떡시루를 살피셨습니다. 외양간의 소에게 줄 여물도 가마솥에 끓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든 풍경이 흥미로웠습니다. 호기심은 아기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고, 떡판 위의 떡은 그날 제게 세상의 전부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발버둥을 치는 저를 바닥에 내려놓으셨습니다. 저는 작은 손으로 떡을 향해 다가가려다, 순간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빈 떡판에 떡메를 세게 내려치신 것입니다. 떡을 칠 때와는 전혀 다른, 마치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소리였습니다. 손을 뻗고 있던 제 앞에 공기마저 찢어지는 충격이 그대로 꽂혔습니다.

훗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버지께서는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걸 기억하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어린 아기의 기억이 이토록 생생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셨던 것이겠지요. 사실 저는 그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일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막 뜨던 무렵, 할머니가 방으로 화로를 들고 들어오시다 문지방에 걸려 부젓가락이 제 눈썹을 찌른 사건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기억은 때로 설명보다 강력합니다. 말보다 선명한 체험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삶의 결을 결정짓기도 합니다. 그날 떡판 위에 떨어진 메는 단순한 공포의 기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힘, 위력과 억압, 침묵과 제지, 그 자체였습니다. 이후 저는 그것이 세계사 속에서 반복되던 폭력의 방식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05년의 을사년, 바로 그런 방식으로 한국의 외교권도 침탈당하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같은 해 7 29,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묵인을 얻고, 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의 동의까지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뒤 일본은 대한제국 대신들을 군사력으로 위협하여, 11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은 서울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었습니다. 일제는 중명전에 군대를 배치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상태에서 조약을 강제로 밀어붙였습니다. 고종 황제는 중명전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조약 체결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재가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고종은 조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였고, 조약의 불법성을 줄곧 주장하였습니다.

 

이 조약의 문서에는 정식 제목이 붙지 않았습니다. 조약 원문에는 제목도, 형식적 조인 절차도 없었고, 조선 황제의 재가 역시 생략되었습니다. 조약 체결 후에도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고종 황제는 곧바로 조약 무효를 선언하려 했으나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훗날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고종실록에는 이를 한일협상조약이라 표기했고, 민중은 그 강제성과 불법성을 강조하기 위해 을사늑약이라 불렀습니다. ‘늑약(勒約)’이란 말은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의미합니다.

이 문서는 총 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핵심은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일본에 완전히 위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서 형식은 일방적 통보에 가까운 수준이었고, 국제법상으로도 유효성을 갖기 어려운 형식적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원본 문서는 한동안 일본 정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현재는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존 중입니다. 중명전 내부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조약 체결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과 관련 문서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같은 이들이 앞장섰고, 농민, 유생, 장사꾼, 평민 등 다양한 이들이 역사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장 진압 앞에서 저항은 무력하게 짓밟히고 맙니다. 국권은 더 이상 백성의 의지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65,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국교는 정상화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5억 달러의 경제 협력 자금이 들어왔고, 그것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의 기반이 되었지만, 많은 국민은 이 조약을 을사늑약의 반복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그해는 을사늑약 체결 60주년이었습니다. '2의 을사늑약'이라는 비판은 공공연히 제기되었고, 국민적 반대 여론 속에서도 조약은 그대로 밀어붙여졌습니다.

을사년은 한국만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사적으로도 1905년은 격변의 해였습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을 시작으로 대규모 민중 시위가 벌어졌고,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결국 입헌군주제를 선언합니다. 같은 해 9,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 아래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본격적인 외연 확장을 시작하게 되었고, 세계는 다시 균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기존의 법칙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한 해에만 네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과학사에 전환점을 마련하였고, 그중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한편 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동군연합을 해체하고 독립국으로 나아갔으며, 미국에서는 라스베이거스 시가 공식 설립되는 등 변화의 조짐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주권이 침탈되었고, 유럽에서는 제국들이 흔들리며, 과학계에서는 진리가 재편되었습니다. 1905년은 단지 하나의 해가 아니라, 수많은 질서가 동시에 붕괴하고 재구성된 해였습니다. 한 시절의 균열은 인류 전체가 의식하지 못한 채 밟고 지나간 시간의 단층선이었습니다.

그 해를 저는 60년 후, 걸음마하던 아기의 몸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날 떡판에 떨어진 메의 울림은 단지 어린 아기의 기억이 아니라, 시대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육체의 각성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이란 어떤 때는 의식보다 앞서 존재하고, 역사는 시간이 흘러서야 그 기억을 역사로 인정합니다.

저는 오늘도 그 떡판의 빈 공간을 떠올립니다. 누구나 움켜쥐고 싶어하는 것 앞에서,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메가 그것을 막아설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어디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그런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시간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이자, 역사가 우리 안에 남기는 가장 고요한 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