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합니다
― 윤지영의 책 『안녕하세요, 한국의 노동자들』을 읽고
이 책은 단지 한 사람의 노동 변호사가 남긴 기록이 아닙니다. 얼어붙은 새벽 거리를 리어카 하나로 밀고 가는 손, 아파트 경비실에 스민 무언의 절망,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체온과 눈물이 담긴, 한 시대의 증언입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의 노동자들!” 이 첫 문장은 단지 인사가 아니라, 오래도록 외면되어온 이들에게 바치는 존엄의 선언입니다.
윤지영 변호사.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며 품게 된 단어는 ‘성실함’과 ‘따뜻함’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써 내려간 이 책을 읽고 난 뒤, 그 단어에 ‘치열함’과 ‘진정성’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까지 7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기억이 사라질까 봐 펜을 들었고, 바쁜 와중에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외면했던 얼굴들을 하나하나 불러냈습니다. 택시 기사, 아파트 경비원, 골프장 캐디, 방송국 PD,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들은 단지 사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름이며, 그녀가 진심으로 안부를 묻는 사람들입니다.
책의 첫 번째 장, “작고 일상적인 계급 사회”는 우리 일상에 숨겨진 또 하나의 무대를 조명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사건 보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고요한 절망의 목소리를 담아냅니다. 압구정 신현대아파트의 경비노동자 이만수 씨가 입주민의 반복된 언어폭력과 일상적 모멸 속에서 분신을 선택한 그날, 그 비극은 단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급이라는 이름 없는 벽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일상의 폭력을 고발합니다. 윤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을 통해 법이 무력하게 느껴지는 현실과 마주했고, 그럼에도 끝내 책임을 묻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은 단순한 소송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을 되찾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같은 시선으로 '폐지 수집 노인'을 마주합니다. 작년 11월, 허리가 완전히 굽은 노인을 도운 날. 무심코 시작한 작은 도움 속에서 그녀는 온몸으로 가난을 체험합니다. 300미터를 움직이는 데 30분, 그 무게와 위험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돕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반성과 고백은 그녀의 진심을 더욱 또렷이 비춥니다. 당사자가 없는 토론회, ‘연민’이라는 이름의 자기만족, 그녀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스스로 되묻습니다.
그녀의 말과 삶은 언제나 일치합니다. 윤지영 변호사는 법률가이지만, 책에서는 그보다 더 큰 역할을 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이자, 질문하는 자이며, 함께 손을 잡고 버티는 연대자입니다. 출판사 대표가 했던 말처럼, “당신이 학자가 아닌데 왜 가르치려 하나.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내라.” 그 말에 담긴 조언을 충실히 따르며, 윤 변호사는 진솔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노동법 해설서가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는 문학이 되었고, 현장의 냄새와 눈물을 그대로 품은 증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책을 쓰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녀의 사랑하는 짝, 삶을 다 바쳐 자식을 키운 부모님, 그리고 이름을 다 담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 동지들. 이 책은 한 변호사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가족과 연인의 이야기이며, 함께 투쟁한 동료들의 연대기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인사는 더욱 울림이 깊습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것이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하나 더 보태고 싶습니다. “윤지영이 있어서, 세상은 그래도 사람다운 숨을 쉽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출간된 또 하나의 책이 있습니다. 『국민이 먼저입니다』. 저자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법조인이고, 표지는 저자의 얼굴입니다. 윤지영 변호사의 책은 반대편에서 시작합니다. 제목엔 ‘노동자’를 말하고, 표지엔 그녀가 없습니다. 국민이란 추상에서 노동이란 구체로, 이미지보다 실존으로. 이 두 권의 책은 마치 서로의 거울처럼, 한국 사회의 갈림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윤지영 변호사의 철학은 더욱 단단하고 뚜렷합니다. “노동을 빼고서 여성, 이주민, 장애인, 노인, 아동, 빈곤층의 인권을 말할 수 없다.” 그녀는 『엘리트 독식사회』를 인용하며,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인권 담론이 얼마나 쉽게 노동을 망각하거나 지워버리는지를 지적합니다. 이른바 ‘마켓월드(MarketWorld)’에 속한 이들은 고층 건물 회의실 안에서, 파워포인트로 세상을 분해하고, 계산된 연민으로 정의를 포장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연대는 부드러운 언어의 갑옷을 입었지만, 실은 가장 낮은 곳에서 버티는 삶의 언어를 담지 못합니다. 반면 윤지영은 현장의 숨결과 거리의 발자국 위에서, 계급의 언어로, 삶의 체온으로, 노동의 비명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문장은 이념이 아니라, 피 묻은 손의 기록이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처럼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념이 아니라 삶의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노동자 계급을 버린 민주당이, 노동자 계급에게 버림받은 것을 알게 되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It should come as no great surprise that a Democratic Party which has abandoned working class people would find that the working class has abandoned them.)
버니 샌더스의 이 말은 미국 정치를 향한 일갈이지만, 윤지영 변호사의 시선으로 보면 한국 사회에 고스란히 겹쳐집니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노동을 말하지 않는 정치, 인권을 외치면서도 노동자의 삶에는 침묵하는 구조. 윤지영은 이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짜 변화는, 조용하고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고요.
이 책은 총 11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화. 작고 일상적인 계급 사회 —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입주민 갑질 사건
2화. 받은 돈은 없고 갚을 돈만 늘어나는 일자리 — 핸드폰 판매노동자의 족쇄 계약 사건
3화. 같은 노동, 다른 신분, 지워진 삶 — 방송국 비정규직 PD의 부당해고 사건
4화. 그 여성들이 먼저 퇴사해야 하는 이유 — 국가정보원 정년 차별 사건
5화. 종이 뭉치에 빼곡히 적힌 숫자들 — 택시기사의 사납금 거부 사건
6화. 사무실 안 이중의 권력관계 — 파견노동자의 성희롱 사건
7화. 교육과 실습에 발목 잡힌 학생들 — 현장실습생의 노동 착취 사건
8화. 죽은 동생의 시간으로 뛰어든 언니 — 골프장 캐디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
9화. 누구나 누리는 권리를 누릴 권리 — 이주노동자 노예제도 사건
10화. 누가 죄를 짓고 누가 법을 지키라 하나 — 비정규직 노동자 형사 사건
11화. 고상하게 노동자의 숨통을 끊는 방법 — 동양시멘트 손배·가압류 사건
이 책은 단지 노동 현장의 보고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현실의 초상이며, 윤지영이라는 한 사람이 쌓아온 정의의 역사입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더디고 고되었지만, 진심 하나로 끝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찬바람과 눈 속에서 견뎌낸 매화처럼, 지금의 윤지영은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조용히 향기를 흩날리며 존재의 뜻을 새기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고요한 단단함은 마치 언 땅을 뚫고 피어난 매화의 붉은 숨결 같고, 그 숨결은 말없이 사람의 마음에 스며듭니다. 이제는 그 매화의 인내를 지나, 한 송이 장미로 활짝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햇살을 향해 고개를 들고, 고운 향기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며, 자신의 가슴에도 따뜻한 노래 한 줄을 불러주기를. 장미의 가시는 다정한 저항이 되고, 꽃잎은 그녀가 지나온 날들의 조각처럼 찬란하게 흔들리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스러운 꽃잎 하나하나가, 그녀가 지나온 발자국을 닮았기에.
그러니 우리는 다시, 이 책을 펼치며 다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다고요.
그리고 저는 덧붙입니다.
윤지영 같은 사람이 친구라는 사실이, 참 고맙고도 든든하다고요. 그런 친구에게 축하의 시 한 편 전합니다.
찬란한 햇살을 향해 선 이에게
-윤지영 변호사에게
눈보라 부는 경계의 담장을 넘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문 앞에 웅크린 손을 먼저 붙잡는 사람
계약서의 잉크보다 진한 땀방울을 읽고
조항이 아닌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
굽은 등을 끌며 밀어야 하는 리어카의 무게를
온몸으로 세상의 균형을 함께 지탱하는 사람
이마에 맺힌 땀이 판례보다 무거운 날
그 손바닥 위에서 진실은 조용히 빛났네
한 경비원의 이름 앞에서
펜이 아닌 심장을 꺼내어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또렷한 문장을 세상 앞에 새기는 사람
눈발에 갇힌 골목 끝에서조차
법의 그림자도 넘지 않으려 더 낮게 몸을 숙이고
더 높게 마음을 들어 올렸던 사람
얼음장 밑 매화처럼 버텨 온 그 시간이 지나
햇살 속 장미로 피어나기를…
그 가시마저 세상을 향한 연대라면
당신은 이미 가장 빛나는 저항이니
노란 조끼의 구호가 메아리치는 거리
새벽 버스 안 흐릿한 눈동자
국밥 한 숟갈로 하루를 다잡는 노동자의 손
그 모든 자리마다 먼저 내민 손길이니
찬란한 햇살을 향해 선 사람아
이제는 피어도 정말 좋겠다
이제는, 환하게 웃어도 참으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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