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손∙자연 그리고 한 끼에 담긴 정성
여섯 살 되던 해 봄,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습니다. 분명한 작별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의 다툼 끝에 문 하나가 닫히는 소리로 긴 공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았고, 설명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없는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이였던 저도 빠르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저와 여동생은 큰집에 얹혀 지냈습니다. 더부살이라는 말을 몰랐지만, 남의 집 밥상 앞에서는 허기보다 조심이 먼저였습니다.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은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가족이 흩어지고 말이 사라진 자리에 침묵과 ‘밥’이라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 침묵 속에서 아이들은 조용히 자랐습니다.
아홉 살 겨울, 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새해를 맞으며 저는 처음으로 밥을 지었습니다. 쌀을 씻고 무를 썰고 국을 끓이며 동생들의 숟가락을 챙겼습니다. 그때 처음 칼을 쥐었습니다. 지금까지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손을 벤 적이 없습니다. 절실함이 조심을 낳고, 조심은 집중을 낳았습니다. 어린 손에 닿았던 날카로움은 이후 긴 시간을 통과하며 삶을 다루는 감각으로 남았습니다.
지금도 주방 서랍을 열면 가장 먼저 손이 가는 칼이 있습니다. 목금도 210mm 식칼입니다. 묵직하고 넓은 칼날, 손에 맞게 닳은 나무 손잡이. 도마 위에서 마늘을 찧을 때면 이 칼은 단지 도구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품은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칼의 무게는 날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의 두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 칼은 매일 제게 가르쳐 줍니다.
채소를 다듬을 땐 기셀 톱니직과도를 꺼냅니다. 작고 정밀한 이 칼은 토마토 껍질도 흔들림 없이 벱니다. 산나물을 채취할 때도 이 칼을 챙깁니다. 병풍취, 누리대, 명이… 뿌리를 뽑지 않습니다. 흙을 파헤치지도 않습니다.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줄기를 반듯하게 잘라냅니다. 남기고 돌아갈 줄 아는 손, 그것이 저의 윤리입니다. 칼끝이 멈추는 그 지점에서 저의 태도는 더욱 또렷해집니다.
산에서 얻은 자연산 재료를 다듬는 손끝에는 언제나 존중이 있습니다. 삶은 고사리, 데친 곰취, 묻힌 참나물… 이 모든 음식에는 조심스러운 손놀림과 그에 어울리는 칼이 필요합니다. 재료에 대한 예의가 없으면 맛도 생명도 깃들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몸으로 익혀 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깨닫습니다. 우리 한식에는 우리의 칼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요.
묵직하고 곧은 칼등, 단단하지만 억세지 않은 날, 나무 손잡이의 결. 김치 한 포기를 반으로 가를 때, 수육을 얇게 저밀 때, 나물을 다듬고 무를 썰며 마늘을 찧을 때, 그 모든 감각은 우리 칼일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어우러집니다. 외국산 칼은 예리하지만, 그 예리함은 때로 이질적입니다. 손끝의 감정을 흘려버리고, 음식의 결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한식은 손맛의 음식이고, 손맛은 손에 맞는 칼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그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체득해 왔습니다.
그래서 요즘 자꾸 마음이 가는 칼이 있습니다. 아니, 세 자루입니다. 기릿츠케 210mm, 나키리 180mm, 버선코칼 210mm.
강진섭 선생이 운영하는 김씨공방에서 접쇠를 하여 달구고 두드려 만든 수제 칼들입니다. 이 칼들은 단순히 쇠를 불에 달구어 망치로 두들기는 작업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물성이 다른 쇠를 겹겹이 접합하는 다마스쿠스 기법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붕소'라는 쇠가 접쇠의 매개로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각 층의 경계를 잇고 날의 질감을 더욱 섬세하게 만듭니다.
강진섭 선생은 오랜 세월 대장간 불 앞을 지켜온 장인이며, 그의 칼은 단지 날이 선 연장이 아니라, 시간과 온기, 침묵과 인내로 담금질된 결과물입니다. 쇠는 그의 망치질에 순응하며 단단해지고, 날은 그의 철학에 따라 방향을 잡습니다. 불과 쇠와 손이 한데 어우러져 태어난 이 칼들은 단지 공예품이 아니라, 장인의 시간과 정신이 응축된 한 조각의 세계입니다.
또한 연마의 공정 역시 단순 반복이 아닌 정교하고 고된 작업입니다. 수차례의 정밀한 갈림을 통해 칼날의 무늬와 곡선이 살아나고, 그 마지막 윤곽은 장인의 감각으로 완성됩니다. 날의 형태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선 조형이며, 손과 재료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진만 봐도 무게중심과 날의 곡선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욕심이 아닙니다. 언젠가 이 칼들이 제 주방에서 제 손끝에서 제 음식들과 함께 호흡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칼로 나물을 자르고 김치를 썰고 고기를 썰어내는 상상을 하면, 그것은 음식이 아닌 태도에 관한 상상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의식처럼 몇 사람이 음식점에 모여 자리를 함께합니다. 명목상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이지만, 속내는 봄 산나물의 향을 맛보자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저는 예닐곱 가지의 산나물을 손질해 가져갑니다. 누리대와 명이를 썰어 고추장으로 무친 무침, 두세 종류의 장아찌, 그리고 봄 들녘에서 모은 쌈 채소들. 달래와 초피를 된장에 듬뿍 넣고 버무린 쌈장까지 곁들입니다. 식당에 나물을 담아 달라 하면 그들도 맛보고 싶어 하기에 접시까지 따로 챙겨갑니다. 2017년 봄부터 생긴 저만의 습관이자 고집입니다.
그렇게 준비한 산나물은 때로는 20만 원이 넘는 값어치를 갖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향과 시간, 계절의 결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자연산 재료들에 대한 철학이 있습니다. 인공의 맛이 닿지 않은, 자연이 스스로 차려준 재료들로 만드는 한 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칼과 손, 그리고 태도가 있습니다. 저는 그 신념을 재료를 통해, 칼을 통해, 손끝의 온도를 통해 계속 실천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런 공간을 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예약을 하고 찾아와 그날 산에서 얻은 재료로 현장에서 요리를 받아보는 곳. 산야초 샐러드를 곁들이고, 한식의 결에 맞는 우리 칼로 썰어낸 고기와 나물을 함께 내는 자리. 음식과 도구, 계절과 사람, 그 모든 것이 조화롭게 놓이는 식탁을 꿈꿉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제가 가장 먼저 손에 쥐게 되는 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조용한 결로 또 한 끼의 철학을 썰어낼 준비를 마친 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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