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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좋은집/자연의향기

고들빼기 쓴맛을 지키며 버틴 지난 여름…

by 한사정덕수 2025.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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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이사를 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집니다.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사람들이 출발을 미루며 5월 하순이 6월로, 6월이 유월 중순으로, 다시 7월로 넘어갑니다. 저는 기다려야 했고, 그사이 여름은 깊어집니다. 이삿짐은 미리 옮겨 두었으나, 제 몸 하나 놓을 공간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살던 집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원망하고, 옮겨갈 집에서는 자신들의 사정을 하소연합니다. 어느 쪽에서도 저를 위한 여지는 없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떠나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아직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떠나야 했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떠도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제 존재마저 불분명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이삿짐을 모두 창고에 넣어 두고 양양읍내의 여관과 오색마을의 민박을 전전합니다. 정착하지 못한 몸이 떠도는 곳마다 밤은 짧고 잠은 얕았습니다. 어디에도 제 자리는 없었고, 어디에서도 제게 뿌리를 내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친구가 관터에 사 둔 땅의 컨테이너에서 며칠을 지내기로 합니다.

그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집수리를 맡은 곳에 지급할 자재비와 계약금으로 준비해 둔 돈을 잃어버립니다. 손에서 빠져나간 그 순간부터,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저 자신인 것만 같습니다. 이어서 스마트폰까지 사라집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점점 가벼워지고, 동시에 더 무거워집니다.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현실은 저를 한 번 더 내던집니다.

결국 87일이 되어서야 이사할 집의 주인들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만, 저는 이미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고, 그들은 저 대신 다른 사람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허물어집니다. 인간관계도, 믿음도, 삶을 지탱하던 작은 약속마저도. 무엇이든 결국 무너지는 것이라면, 그동안의 애씀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러다보니 며칠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두 달로 이어집니다. 시간이 쌓이는 만큼, 저는 점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친구의 컨테이너에서 장마가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저는 뜻밖의 것을 발견합니다. 풀밭이 된 그곳에서 자라고 있던 고들빼기입니다. 친구는 땅의 잡초를 제거하겠다며 제초제를 뿌리려 했지만, 저는 황급히 손을 들어 그를 막았습니다.

 

“야, 이 풀들은 내가 다 뽑을 테니까 제초제는 뿌리지 마. 나 고들빼기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저거 다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제초제 뿌리면 먹기 좀 그렇잖아. 그냥 놔둬, 내가 다 정리해 줄게. 고들빼기 캘 때까지만 참아라, 응?”

 

그때부터였습니다. 낮 시간에는 풀을 뽑으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쑥을 뿌리째 파내고, 쇠뜨기와 바랭이, 수크렁, 강아지풀 같은 잡초들을 하나하나 캐냈습니다. 손에 익은 작은 곡괭이로 흙을 파헤치며 풀들을 뽑아낼 때마다, 마치 지난날의 불안과 흔들림까지 함께 뽑아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풀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뽑아낸 자리에 며칠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싹이 돋아났고, 저는 또다시 그 싹을 뽑아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손에 흙을 묻히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풀들은 끝없이 돋아났고, 저는 매일같이 그것을 뽑아냈습니다. 마치 삶의 불안을 뽑아내듯, 마치 흔들리는 나 자신을 다잡듯이.

뽑아낸 쑥 중에서 여린 순을 따로 모아두었습니다. 저녁이면 고들빼기를 데쳐 무치고, 따뜻한 된장국에 여린 쑥을 넣어 끓였습니다. 된장의 구수한 향과 쑥의 풋풋한 향이 어우러지며 작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고들빼기무침을 곁들여 한 숟갈 뜨면, 비록 불완전한 하루였지만 한 끼 식사는 온전히 저를 지탱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낮 시간에는 풀을 뽑고, 저녁이면 음식점을 하는 친구가 들러 함께 오색의 버스정류장에 있는 CU 편의점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친구나 펜션을 운영하는 이훈 형님과 술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풀을 뽑으며 흐트러진 생각들을 정리하고, 술 한 잔을 들이키며 무너진 마음을 붙잡습니다. 비록 삶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루를 버티며 안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고들빼기를 지키려는 나의 집착은, 결국 내가 지키려 했던 삶의 조각은 아닐까?”

몇 번 고들빼기 캐서 데쳐 무쳐 먹습니다. 쌉싸래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질 때면 쓰디쓴 현실을 삼키는 것만 같습니다. 쓴맛을 넘기고 나면 고소한 여운이 남습니다. 마치 그곳에서의 날들처럼인간은 무엇으로 지탱되는가.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것. 그 믿음과 애착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겠지요. 이번에 내렸던 눈이 어느 정도 녹으면 저는 다시 그 고들빼기를 모두 캐러 갈 것입니다.

그렇게 계절은 쌓이고, 시간은 맛으로 남습니다.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아무리 매운 맛을 삼켜도, 아무리 쓴맛을 견뎌도, 결국 우리는 다음 계절을 맞이할 것입니다.

 

고들빼기무침

고들빼기는 묵은 떡잎을 떼어내고 깨끗이 손질한 뒤, 소금을 한 줌 넣은 끓는 물에 데칩니다. 데친 고들빼기는 찬물에 헹궈 꼭 짜고, 설탕 약간과 고추장을 넣어 조물조물 무칩니다. 쓴맛이 적당히 사라지고, 입맛을 돋우는 봄철 별미가 됩니다.

 

고들빼기김치

잎이 무성하게 자란 고들빼기는 김치를 담그면 그 맛이 오래도록 깊어집니다. 깨끗이 손질한 고들빼기를 소금물에 살짝 절여 숨을 죽입니다. 그 사이,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생강, 멸치액젓과 새우젓을 넣고 양념을 만듭니다. 물기가 빠진 고들빼기에 양념을 버무리면, 톡 쏘는 쌉싸래한 향과 감칠맛이 어우러진 고들빼기김치가 완성됩니다.

이때, 소금물에 삭힌 고추지를 함께 버무리면 더 깊은 맛을 간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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