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 안의 계절, 대접 속의 기억
-사골곰탕 한 대접이 밀어 올린 봄의 철학
경칩이 지날 때였습니다. 개구리도 입이 터진다는 그 절기 그러나 하늘은 반대로 눈을 뿌렸어요. 대단한 폭설이지만 이미 이런 눈은 제가 사는 백두대간의 동쪽 마을들은 누구나 충분히 대비하고 있습니다. 춘분의 볕은 짧은 시간 만에 눈을 녹여내며 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조용히 알려옵니다.
이맘때면 누렇게 변색되고 구부러지고 꺾인 대파도 몸을 곧추세우며 연둣빛 잎을 올리기 시작합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강해진 이 대파들은 단지 부재료가 아닌 음식의 중심이 되곤 하지요. 그리고 저는 이 시기의 대파를 기다렸습니다. 냉동실에 고이 저장한 구지뽕상계탕의 사골곰탕을 위해서요.
부산 기장 철마의 아홉산 구지뽕상계탕 김영숙 선생님의 가게는 페이스북 프로필에 걸어둔 사진 한 장처럼 오래된 아궁이와 가마솥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공간입니다. 삶이 음식을 만들고 음식이 삶을 다시 데우는 곳이지요.
김영숙 선생님이 처음 가게를 열게 된 건 남편의 갑작스러운 간암 투병과 사별 이후였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은 진단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맞벌이에 바쁜 일상 속에서 밥 한 번 빨래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후회는 깊은 상흔으로 남았습니다. 주변의 타박과 무지 속에서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병세는 더 큰 고통이 되었고 그 슬픔을 안고 3년 뒤 동래에서 처음 음식점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약식동원”이라 했습니다. 병이 있다면 반드시 그에 맞는 음식이 있다는 신념으로 선생님은 약초를 공부했고 약초 도사 최진규 선생님과 함께 약선을 연구하며 요리학원에서 약초로 만든 다양한 음식 실험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식당을 세 곳이나 운영하며 경험을 쌓아오셨지만 결국 두 곳은 정리하고 지금의 아홉산 구지뽕상계탕만 남겨두게 되셨지요.
상계탕은 가격 부담도 적고 몸보신 음식으로 좋으며 가족 모임이나 접대 자리에도 적합한 음식입니다. 처음엔 조리 경험이 없어 여러 찬모들의 도움으로 운영했지만 2022년 5억 원짜리 땅을 들이게 되면서 직접 주방에 들어가야 했고 음식의 손맛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유기농을 실천하며 식재료까지 스스로 길러내는 농부의 길로도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농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선생님은 마을 어르신을 멘토 삼아 따라다니며 배웠고 결국은 기계농 대신 무경운 무비료의 방식으로 전환하셨습니다. 마을에서는 ‘풀농사’라며 우스갯소리도 있었지만 발전위원장은 선생님이 키운 채소가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다고 평했습니다. 해풍과 해양성 기후, 산비탈 같은 지형이 고냉지 채소처럼 맛을 더해주는 듯했습니다.
김영숙 선생님은 몇 차례 제가 사는 고장을 찾아오셨고 그때 직접 아궁이를 배우셨습니다. 그 열망 끝에 손수 만든 가마솥 아궁이는 실로 정교하고 단단하지만 지붕까지만 갖추고 있어 여전히 한데부엌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바람이 잦은 기장의 기후를 고려하면 이 또한 선생님의 끈기 어린 고집과 철학이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단순히 아궁이만이 아니라 집의 구조와 인테리어 그리고 공간의 흐름을 설계하고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영숙 선생님이 보내주신 그 정성 가득한 사골곰탕을 받아 먹으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뜨거운 국물을 만들기 위해 선생님은 얼마나 많은 비바람과 싸우며 솥 앞에 서 계셨을까?’라는 물음이 가슴을 적셨지요. 그리고 결심이 생겼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선생님의 가마솥 아궁이를 온전하게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제대로 된 부엌의 형태로 바꿔드리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그것은 단지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음식을 대하는 철학과 한 사람의 수고를 존중하는 마음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김영숙 선생님의 사골곰탕은 다릅니다. 그저 오랜 시간 고았다는 표현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깊이가 있어요. 가마솥에 소뼈를 담고 장작불로 천천히 고아낸 그 국물은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순간 온몸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단순한 국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이 녹아든 ‘삶의 국물’이라는 것을요.
그 국물에 이 시기의 노지 대파를 송송 썰어 넣으면 겨우내 움츠렸던 봄의 기운이 국 안에서 퍼집니다. 연둣빛 잎이 뜨거운 곰탕 안에서 익으며 풍기는 향은 마치 찬 바람 속에서 조금씩 고개를 드는 봄 그 자체 같지요. 뚝배기에 담긴 곰탕은 대파와 함께 다시 끓고 그 위에 후춧가루 몇 번 톡톡 떨어뜨리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이 계절을 그대로 담은 한 대접이 됩니다.
음식은 언제나 제게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곰탕은 단지 김영숙 선생님 한 사람의 손맛이 아니라 그 손이 거쳐온 삶 그 손에 쥐어준 숟가락 그리고 그 음식을 먹어온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담긴 국물입니다. 누군가는 이 곰탕 한 대접에서 어릴 적 외할머니의 부엌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오래 전 헤어진 누군가의 따뜻했던 점심을 떠올릴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음식은 기억이고 철학입니다. 뜨거운 곰탕 한 대접은 몸을 데우지만 마음의 어느 구석도 조용히 어루만집니다. 저는 이 곰탕을 먹으며 늘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곰국처럼 오래도록 끓이고 우려내고 그래서야 비로소 맛을 내는 것들이 있다고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음의 상처도 글 한 줄도 모두 그렇지요.
누구에게나 곰탕 같은 시절이 있습니다. 유난히 오랫동안 끓어야 했던 그러나 끝내 따뜻해지는 시절.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삶은 우리가 끓이는 대로 끓는다.” 그렇다면 곰탕처럼 오래도록 고아야 할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오늘 같은 날 따끈한 사골곰탕에 봄기운 가득 담긴 대파를 넣고 한 숟갈 뜨면 저는 다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렇게 김영숙 선생님의 곰탕 한 대접이 저를 우리를 그리고 봄을 조금 더 앞으로 밀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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