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들과 산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뿌리가 숨을 쉬며 어느새 땅을 밀어 올려 연둣빛 어린 잎들을 펼칩니다.
‘잡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은 대개 너무 흔해서, 쉽게 얻을 수 있어서 종종 가치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설악산에서는 곰취와 병풍취에 밀려 덜 주목받지만, 이들 또한 산과 들이 내어주는 귀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 나물들이야말로 산과 들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가장 정직한 선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연산만 써요. 주민들이 채취해 오는 나물들을 우리가 모두 받아요.”라 하는 음식점도 제가 직접 이용한 결과는 ‘실제로 자연산을 사용하는 곳은 드물고, 수입산을 자연산이라 속이는 경우’도 많더란 슬픈 사실입니다. 수입산이라도 자연산이라면 어느 정도 용서하겠습니다.
자연산채전문이란 간판이 무색하게 중국산 재배 궁채나물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지금부터 얘기하는 나물들을 사용한다면 자연산채전문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잡나물들은 진정한 자연의 선물입니다. 값비싼 산채는 비록 아니더라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다음의 나물들이야말로 제철의 생명력을 오롯이 담고 있기에 소개합니다
미나리냉이는 바람을 품은 푸른 향기가 제법 근사합니다.
봄이 시작되면 들판의 조금 습한 둔덕을 따라 미나리냉이가 바람을 탑니다. 미나리와 닮은 듯하지만 향은 전혀 다릅니다. 약간의 알싸한 향을 품고 있습니다. 샘이나 도랑 가까이에 뿌리를 내리고 봄의 물기를 머금은 잎들은 살짝 데쳐 무쳐 먹으면 입 안 가득 청량한 봄이 퍼집니다. 한 스푼의 된장,=과 한 방울의 들기름이면 충분합니다.
씹을수록 퍼지는 봄날의 들을 품은 향, 미나리냉이는 바람을 품고 피어난 나물입니다. 들판을 따라 흐르는 바람처럼 가볍지만 잊히지 않는 깊은 맛을 남깁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데쳐 무쳐주시던 미나리냉이의 쌉싸래한 향이 떠오릅니다. 들기름 몇 방울과 함께 무쳐낸 한 접시는 봄날 그 자체였습니다.
단풍취는 산속에 감춰둔 솜털 보송한 비밀스러움입니다. 산속에 발을 들이면 단풍취가 가장 먼저 손짓합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손처럼 솜털 보송한 부드러운 잎에 살짝 비단결처럼 맑은 초록이 물들어 있으나, 잎을 편 모양이 마치 가을의 단풍을 닮은 듯하여 단풍취라 합니다.
산속의 습기를 머금고 자란 단풍취는 줄기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은은한 달콤한 향이 난답니다. 다른 고장에서는 이 단풍취를 ‘개발딱지나물’로 부르며 즐겨 먹기도 한답니다.
단풍취의 향이 뜨거운 밥 위에서 들기름이나 참기름과 만나면 더 이상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한 끼가 됩니다. 단풍취나물을 먹고 있으면 마치 깊은 산속의 이슬에 젖은 달콤한 속삭임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산이 품고 있던 냄새와 나무와 바람과 구름이 어우러진 향기가 그 안에 스며있기 때문이겠습니다.
우산나물은 숲속의 그늘을 만들기 위해 펼쳐진 우산을 닮은 잎이 이름부터 재미있는 우산나물입니다. 말 그대로 커다란 잎이 우산처럼 펼쳐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산속 깊은 곳, 비탈진 언덕에서 우산나물은 조용히 봄을 맞이합니다.
잘못 알고 날 것 그대로 먹으면 쓴맛이 강하지만, 끓는 물에 살짝 데치고 손끝으로 꼭 짜내면
그 쌉쌀한 맛이 품은 국화향을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데친 그대로 초장을 한 줄기식 직어 먹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들기름을 살짝 두르고 무치는 것만으로 향이 더 깊어지고, 향이 옅은 다래순이나 미나리냉이와 같이 넣으면 봄날 숲속에서 먹는 근사한 성찬 같은 느낌이 된답니다.
우산나물은 어쩌면 숲이 품은 그늘을 맛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힘을 품고 있는 나물이기 때문입니다. 활엽수림이나, 솔밭에서도 무리지어 잘 자랍니다.
원추리는 봄날의 첫 노래와 같은 나물입니다.
원추리는 봄이면 산기슭과 들판을 가리지 않고 가장 먼저 올라오는 나물 중 하나입니다.
길쭉한 잎이 뾰족하게 돋아나는 모양이 봄날의 꿰뚫어 빛으로 이끌려는 작은 창처럼 보이기도 한데요, 나른한 봄날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몸을 깨우는 나물이랄 수 있습니다.
살짝 데쳐 먹으면 단맛이 감돌고, 국을 끓이면 진하고 깊은 맛을 남깁니다.
원추리는 산속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립니다. 어둠을 밀어내고 기지개를 켜는 새벽처럼, 힘차게 올라오는 그 잎을 보면 봄의 시작이 실감납니다. 초고추장으로 버무려 홑잎나물과 함께 비빔밥을 하면 달콤하면서도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답니다.
산과 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흔하다고 해서 덜 소중한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작은 잡나물들은 매해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미나리냉이의 바람과 단풍취의 깊고 달콤한 속삭임. 그리고 우산나물의 쌉쌀한 여운이며 원추리의 싱그러운 첫맛을… 나물들이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피어나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흘러갑니다. 흔하고 작아 보이지만, 결국은 그것들이 우리의 계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려한 요리보다 소박한 들나물이 더 깊은 위로가 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엔 산과 들을 떠올려 봅니다. 봄이 우리에게 남긴 작은 선물, 어느새 우리의 삶도 그 나물들처럼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피어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잡나물 한 줌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지도 모릅니다. 이번 봄, 작은 나물들을 직접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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