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금동대향로의 개신부의 박산을 펼쳐놓은 모습입니다.
이전 편 <한류 열풍은 백제에서도 증명되었으니>에서 밝혔듯 한류문화는 이미 1500년 전에도 왕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이게 뭔 소리야 싶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명 “그렇네”하고 깨닫게 될 겁니다. 20세기 일본이 한때 우리를 침탈할 수준으로 강대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바탕도 이당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해 그들이 문명세계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그 도래인이 다름 아닌 백제와 가야인들이란 정도는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인정하고 계시겠지요.
일본의 복식과 건축, 도자기와 활자 모두 이 땅에서 건너갔고 받아들여서 형성되었으니 의식주와 문화까지 원류는 고대의 대한민국에 살던 조상들이었다는 겁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칠지도에 얽힌 사료나 일왕가의 국장문양을 우리의 기와문양과 비교해 봐도 좋겠군요.
일본의 건축양식이나 음악도 비교분석하면 좋겠지요. 이번엔 백제금동대향로를 통해 백제의 금동제 제작기술이나 백제인들의 음악과 문화적 현상과 같은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시공테크에서 1999년 발간했던 <한국의 문화유산> 2권 15쪽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설명이 있습니다. 위의 이미지가 15쪽 전체적인 편집 형태입니다.
향로는 높이가 64cm나 되는 대작이며 용(龍)과 봉황(鳳凰)이 강조되어 있다. 향로의 몸체를 이룬 박산(博山)은 당시의 산악숭배, 무속, 불로장생의 방중술과 양생술, 무위사상, 음양사상 등을 다룬 신선사상이 조형적 배경이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박산을 봉래산(蓬萊山)이란 이름으로 친근하게 불러왔다. 그래서 이 향로를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逢來山香爐)’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편집과정의 실수로 보이는데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逢來山香爐)’를 ‘백제금동용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逢來山香爐)’로 봉황을 빼놓는 일이 발생한 상태로 출간되었습니다. 분명히 “용과 봉황이 강조되어 있다”고 밝히며 “박산은 당시 산악숭배… 봉래산이란 이름으로 친근하게”라 설명을 했으면서 말이지요. 받침 부분의 용과, 최상단 개신부 위의 손잡이로도 사용하도록 고려한 봉황에서 봉황을 빼 놓으면 중국의 한 대(漢代) 박산향로(博山香爐)와 다를 바 없는 단순히 모방품이 되었을 겁니다.
▲이 책에서는 60㎜ 남짓 되는 그림으로 박산을 펼쳐 보입니다. 위의 이미지를 클릭하면 모니터 해상도에 최적화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신부의 박산과 악공들의 배치와 그 사이의 봉우리마다 배치한 원앙들, 그리고 박산 사이마다 정교하게 배치시킨 신선들의 모습과 함께 십장생도(十長生圖)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연상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박산의 형태미가 빼어납니다. 이 박산은 41개의 능선을 형성한 33개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더불어 상상의 동물도 있지만 실제 날짐승과 호랑이를 비롯해 사슴과 멧돼지,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5인의 악사(이 5인의 악사는 따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외에 박산 사이에 16인의 인물(신선)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 실로 엄청난 세월을 땅 속에 묻힌 상태로 보존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태를 완벽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현장에서 직접 이를 발견한 이들로서는 얼마나 놀랐을지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얼마나 많이 반출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공주고보 교사였던 ‘가루베 지온(軽部慈恩)’은 1931~1933년 사이 송산리 6호분을 당국(조선총독부)의 허가없이 무단으로 발굴했습니다. 가루베는 또 1933년 8월 6호분으로 향하는 분기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29호분의 존재를 확인하고 역시 무단으로 파헤친 뒤에야 신고합니다. 실상 조선총독부라 해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발굴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기록조차 남기지 않고 가루베 지온이 29호분을 무단 발굴하고 깨끗하게 유물을 치운 다음에야 총독부에 신고했으니 얼마나 많은 공주지역의 고분군들을 무단으로 파헤쳤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는 가루다가 무단으로 발굴한 수많은 백제의 고분에서 이미 발굴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루베 지온에 대해 조금 엇갈리는 평가는 있습니다만, 가루베는 일제강점기 충남 지역에서 활동하며 백제 유적을 무단으로 조사하고 다수의 유물을 외부로 반출한 인물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는 1927년부터 1945년까지 공주고등보통학교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백제 유적을 조사합니다. 특히 위에 거론하였듯 1933년 송산리 6호분 조사는 도굴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가루베 지온의 연구 자료는 당시 백제 유적의 원형을 기록한 유일한 자료로 평가받아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는 합니다. 그가 출간한 책 ‘백제 유적 연구’는 백제 왕성의 위치와 백제의 국호 및 왕족의 성씨인 부여 씨의 어원과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유적 및 유물의 사진자료와 지도 및 도면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도굴과 유물 반출로 인해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연구는 백제 유적에 대한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그의 저서를 번역하여 발간함으로써, 향후 가루베 지온이 반출한 충남 문화유산의 규모와 내용을 규명하는 토대를 마련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가루베가 도굴과 유물 밀반출을 어느 수준으로 했었는지는 ‘연구는 백제 유적에 대한 중요한 기록으로’ 가치를 인정받는 다는 대목만으로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루베가 백제금동대향로와 동일하거나 동일 시대의 또 다른 높은 가치의 문화재를 반출하였으리라는 의심은 충분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어떻게 발굴이나, 심지어 도굴에 전념하게 되었을까를 한 번 생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그들은 고대의 무덤에 귀중한 보물들이 부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겠느냐는 겁니다. 이는 그들의 사무라이라는 계급과 장례풍습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라이의 원류는 일본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무라이는 원래 헤이안 시대(794-1185) 중기에 등장한 귀족의 경호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귀족을 보호하고 그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사무라이'라는 단어는 '시중들다'를 의미하는 옛 일본어 '사부라우'(さぶらう)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백제가 멸망하고도 130년이란 시간이 흐른 시점입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사무라이가 단순한 경호원을 넘어 일반적인 무사 계급을 의미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일본의 중앙 집권 체제가 약화되면서 지방의 세력가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사무라이로서 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겐페이 전쟁(1180-1185)을 거치면서 사무라이 계급은 더욱 발달하였고, 이후 가마쿠라 막부(1185-1333)가 성립되면서 사무라이는 일본의 지배 계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무라이의 문화와 전통은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여, 에도 시대(1603-1868)에는 사무라이가 일본 사회의 중요한 계층으로 자리 잡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무사도로 알려진 명예와 충성의 가치를 중시하며,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에 이릅니다.
또한 눈여겨 볼 부분은 사무라이의 장례 풍습으로 그들의 신념과 전통을 반영한 독특한 의식을 포함하여 진행합니다. 사무라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예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들의 장례식은 이러한 정신을 반영하게 되는데, 사무라이의 장례식은 보통 불교식으로 진행되었답니다. 사무라이의 시신은 전통적인 사무라이 복장을 입고 관에 안치되었고, 장례식에서는 사무라이의 무기와 갑옷이 함께 무덤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사무라이의 영혼이 저승에서도 무사로서의 역할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사무라이의 장례식에서는 그들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다양한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라이의 무덤에는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으며, 가족과 동료들은 정기적으로 무덤을 찾아가 사무라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처럼 사무라이의 장례 풍습은 그들의 명예와 충성심을 반영한 중요한 의식이었는데 이런 풍습 자체가 고대 이 땅에서 행해지던 장례풍습을 그대로 전승하였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백제의 왕가들의 무덤에 눈독을 들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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