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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향기/미술관산책

신학철 화백의 작품세계를 찾아서

by 한사정덕수 2025.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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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 200×122(8P), 200×130.2(8P) 1998-2002

모두 합치면 2,017.6㎝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이 작품을 그대로 보여드릴 수 없음이 안타깝다. 그러나 지금 모니터 환경에 최적화된 크기로는 위의 도판을 클릭하면 만날 수 있다.

 

신학철 화백의 작품세계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2024민주인권평화전 신학철 시대의 몽타주》』란 이름으로 지난해 1217일 오픈되어 330일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해체와 재구성의 신체 몽타주’, ‘망각된 역사의 소환’, ‘시대를 위한 기념비등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 2024년 12월 21일 광주시립미술관 전시장에서 좌로부터 강종권, 송필용, 두시영, 신학철, 송창, 김진하, 손기환 ⓒ 박건

 

해체와 재구성의 신체 몽타주에서는 신학철 화백의 초기 작품들이 전시되며,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경향과 다양한 미술 사조의 영향을 받은 신학철 화백만이 가진 포토몽타주 기법의 생성 과정과 특징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망각된 역사의 소환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의 사건을 환기하며, 1980년대 민주화 과정과 개인의 서사로 전환되는 과정을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위한 기념비에서는 중산층과 소시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들이 살아온 역동적인 삶을 조명합니다. 또한, 서민들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고향 풍경과 같은 이상향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라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는 신학철 화백의 예술세계에 변화를 가져온 주요 작품들과 관련 아카이브를 조명하는 특별 섹션도 마련되었다 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기억하며 제작된 <한국현대사-초혼곡>, 법정 재판을 받은 <모내기> 사건, 현대인의 초상을 거대서사로 표현한 <갑순이와 갑돌이> 등 주요 작품이 전시된답니다.

 

이 기회에 몇 작품을 만나보겠습니다. 먼저 모내기란 작품부터 만나는데 이 작품엔 사연이 있습니다. ‘모내기는 민중미술 대표작 중 하나로. 신학철 화백은 1987년 <제2회 통일미술전>에 이 작품을 출품했었습니다. 2년 뒤인 1989년 서울시경 대공과가 신 화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합니다. 경찰과 검찰은 이 그림을 한반도 지형으로 보고, 그림 위쪽의 사람들은 춤추며 음식을 먹고, 아래쪽 사람은 힘들게 일하고 있는 모습으로 판단하고 한 예술가를 연행한 것입니다.

▲ 새로 작업하셨다고 한 <모내기> 작품

 

바로 이 “작품이 북한을 찬양했다고 몰아붙인 겁니다. 결국 신학철 화백은 이 작품으로 인하여 구속됩니다. 구속 3개월 뒤 보석으로 풀려났고 1·2심 재판에서도 무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작품은 신학철 화백님과 달리 압류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10년 뒤인 1999년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10월에 선고유예 2년 형이 확정됐습니다. 작품을 몰수한 검찰은 중대 사건 증거물이라 보존 결정을 내렸습니다.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김대중의 정부였는데도 이렇게 예술은 구태적인 시각으로 판단되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그 당시 국무총리에 임명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충분히 박정희와 전두환의 악령들이 여전히 서성이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당시 국무총리는 지낸 인물들은 순차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건 / 제30대 (~1998.3.2.)
김종필 / 서리 (1998.3.3.~1998.8.17.)
김종필 / 제31대 (1998.8.18.~2000.1.12.)
박태준 / 제32대 (2000.1.13.~2000.5.18.)
이헌재 / 직무대행 재정경제부장관 (2000.5.18.~2000.5.23.)
이한동 / 서리 (2000.5.23.~2000.6.28.)
이한동 / 제33대 (2000.6.29.~2002.7.10.)
장상 / 서리 (2002.7.11.~2002.7.31.)[1]
장대환 / 서리 (2002.8.9.~2002.8.28.)
김석수 / 서리 (2002.9.10.~2002.10.4.)
김석수 / 제34대 (2002.10.5.~)

 

결론적으로 서리로서 인준을 받지 못하고 물러난 장상과 장대환을 제외하면 박정희시대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보수색을 강하게 지닌 인물들로 대한민국 정부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가 채워졌다는 서글픈 사실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2000년에서야 신학철 화백은 특별사면 뒤 문화예술단체들과 함께 작품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2004년 유엔인권이사회가 반환하라고 권고했으나 법무부에서 현행법상 몰수 처리된 물건을 원소유자에게 반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거부합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작품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은 건 2017년이 시작된 설 직후로 기억됩니다. 광화문광장에서 신학철 화백님과 장경호 화백님 외 몇 분이 함께 한 작품을 앞에 놓고 대화를 하는 걸 들으며 작업을 했습니다. 신학철 화백은 모내기를 손상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똑 같은 작품을 새로 그렸다고 하셨습니다.

▲ 검찰에 의해 압류되었던 <모내기> 작품 두 번 겹쳐 접어 장기간 보관되었던 듯 훼손이 되어 있다.

 

검찰에 의해 압류되었던 작품을 다시 돌려받으신 건 그 뒤로 1년이 더 지난 20181월 말이 되었을 때입니다.

▲한국현대사 –초혼 1993 247×123 캔버스에 유채

작품설명
신학철은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주요한 주제로 제작한 <한국현대사-초혼>(1993)은 중앙에 강조한 죽은 사람의 형상과 영혼을 불러오는 일종의 의식을 상징하는 ‘초혼’이라는 제목을 통해 한국 역사에 굽이굽이 이어진 민중의 항쟁들이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신학철은 피투성이로 일그러진 시신을 중심으로, 양옆에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을 배치했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익명의 청년 희생자들이었다. 그는 거대한 국가적, 사회적 사건이나 흐름보다는 개인의 경험과 서사에 초점을 맞추었다. 잔인하게 희생된 이들의 얼굴을 복원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하거나 새나 꽃을 든 모습으로 제작한 그의 작품은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에 문득 2017225일로 돌아가 사진첩을 뒤적거리게 만든 작품 한국현대사-초혼입니다. 저는 분명 한국근대사-금강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초혼이라니 싶었습니다. 그래서 2017년 촬영한 사진들 속에서 찾아내 하단에 인쇄된 작품명을 확인했습니다.

▲ <한국근대사-금강>

 

특별히 기억에 간직하게 된 일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전원재판부 2016헌나1’의 사건으로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으로 박근혜 탄핵을 2주일여 앞 둔 토요일이었습니다. 장경호 화백께서 둥글게 말아 어깨에 멘 무언가를 제게 건네주며 당신이라야 이 작품을 제대로 걸 수 있어서 내가 특별히 일찍 나왔어라 하셨습니다. 받아든 작품은 무게가 상당했습니다. 말린 상태에서 길이가 2m는 족히 되었는데 길이는 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 생전 ‘불쌈꾼’이라 불리시던 백기완 선생님의 시 ‘오늘 우리들의 촛불은(현장 작업 류연복 화백)과 백기완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그 옆에 길게 걸린 <한국근대사-금강> 작품

 

작품을 어깨에 메고 세종대왕 동상 뒤로 이동해서야 작품을 폈는데 폭 180에 길이가 5m나 되는 세로형 작품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현장에서 걸 수 있는 최데 높이가 3m이었으니 2m를 어떻게든 더 보강을 해야 작품을 펼쳐 걸 수 있었습니다. 일단 다른 작품들을 거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설치물을 세운 다음 2m에 해당되는 부분은 바닥에 그대로 뉘어 놓고 작품을 설치할 수 있게 할 구조를 머릿속에 그리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라 미리 구입해 머물던 텐트 뒤에 보관해두었던 6m 되는 각파이프를 두 개 더 챙겼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장군 동상 뒤에 자리하고 있던 최병수 작가의 작업공간에서 적당한 크기의 얇은 철판조각 6개를 챙기며 쓸데가 있어서 그러는데 가져갑니다라 말하곤 대답도 듣기 전 출발하는데 나중에 배로 갚어요라 하더군요. 용접하는 걸 돕기도 하고, 혼자선 옮기기 힘든 작품을 옮기는 걸 도와달라는 겁니다. 잠시 돌아서서 빙긋 웃어 보이고 서둘러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장에서 머릿속에 미리 그려 둔대로 쇠톱으로 잘라 기존의 제작된 틀에 붙여서 먼저 세워둔 설치물에 붙여 세웠습니다. 그저 줄자와 각도자, 그리고 나사못으로 파이프에 표시를 해서 45° 각도로 자르고 최병수 작가에게서 얻어 온 철반을 이용해 나사못으로 조립한 다음 기존의 틀에 연결해 작품을 걸 수 있게 세웠습니다. 작업하는 모습을 장경호 화백께서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시더니 캔 음료 하나를 내미셨습니다.

 

그런 기억으로 신학철 화백님의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소식도 확인해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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