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연말 기사를 통해 처음 소식을 들었을 당시만 해도 그저 “아, 백제의 옛 도읍터에서 뭔가 새로운 발굴이 하나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된 시점에 백제금동대향로의 모조품을 직접 본 순간 숨이 멎을 듯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전편에 이어 우리나라 미술의 걸작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4cm이고 크게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름을 디고 솟구치는 용 모양의 향로 받침과, 연꽃이 새겨진 향로의 몸체가 향로의 하부를 이루고, 악공들이 곳곳에 자리한 산악도가 솟아오른 향로 뚜껑과 뚜껑 위 향로를 열고 닫기 위한 손잡이로 이용되었을 부분의 봉황 장식으로 나뉩니다. 이를 먼저 제가 2019년 초에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컴퓨터관련 서적을 많이 펴내던 드림북을 방문했을 때 김영인 대표게게 선물로 받았던 시공사 발간의 <한국의 문화유산> 2권 14쪽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 시공테크에서 1999년 발행한 <한국의 문화유산> 2권에 담긴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모조품이 아닌 진품을 그대로 복원한 상태에서 기록으로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에서 각 페이지별로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옮깁니다. 먼저 14쪽에 밝혀 놓은 내용입니다.
1. 백제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
향로가 출토된 능산리 절터는 는산리 고분군과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나성(羅城) 사이의 계곡에 있다. 이 유적은 백제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된 곳으로 향로는 1993년 10월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발견 당시 구덩이의 바닥에서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채 금동제품 등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조사결과 향로가 발견된 구덩이는 공방(工房)에서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목제 수조(水槽)가 놓였던 곳으로 향로는 칠기에 넣어져 급박한 상황에서 묻혔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어쩌면 이 책은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감수를 거쳤겠지만 오류는 있기 마련이란 가정 하에 ‘1993년 10월’이라 명시한 발굴 시점입니다. 이 <한국의 문화유산>은 지금 절판 상태이기는 하지만 발행된 1999년이라면 당시로서는 대단히 심혈을 기울여 자료를 조사하고 집필하였을 겁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다루는 작업에 감수는 필수적입니다. 그럼에도 1993년 10월이라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당시 저는 “1993년 12월 12일 추운 날씨에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란 최초의 발견시점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 있던 상태라, 확인하려 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다만 당시 주차장공사를 처음 시행한 시점을 발굴시점으로 오기한 것 아니겠느냐는 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1993년 10월 능산리 고분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공사를 하기 위해 작업이 확정되어 시행하게 됩니다. 원래 있던 논을 갈아엎고 터파기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12월 12일, 물이 고인 진흙 웅덩이 속에서 금동으로 된 향로가 눈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무려 천 년을 넘는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덕에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렇게 세상에 다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찬란한 백제의 금동가공기술을 보여주며 등장했습니다”라 했던 겁니다.
이 내용을 밝히고자 했던 이유는 제대로 알고 기록하지는 의도였을 뿐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뜻은 아닙니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뚫린 구멍들은 직경 0.6cm 정도인데 몇 개는 1cm 정도로 조금 더 넓게 확장되어 뚫려 있는 걸로 조사가 됩니다. 처음 제작한 다음 향을 피웠을 때 의도했던 것보다 향이 잘 피어오르지 않아서 구멍 몇 개를 더 크게 만든 듯 보이는 부분입니다. 구멍은 향로 꼭대기 그러니까 손잡이로 사용되었을 봉황의 가슴에 2개, 향로 뚜껑 상부 인물상이 배치된 부분에 5개가 있으며, 중부(개신부)에 해당되는 박산(봉래산) 아랫부분에 5개로 총 12개가 있습니다. 이중 중부에 있는 구멍은 향의 연기를 배출하는 용도가 아니라 바깥에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는 용도로 보입니다. 이렇게 바깥 공기가 들어옴으로써 향로 안에서 대류가 일어나 향의 연소시간이 길어지게 했으리라 판단되며, 연소된 향의 연기가 상부로 원하는 형태를 유지하며 피어오르도록 하였으리라 봅니다.
이제 향로의 받침 부분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맨 아래에는 용이 발톱으로 구름을 움켜쥐듯 디디고 입으로는 향로의 본체를 문 형상으로 향로를 떠받치고 일어서 있습니다. 용의 발톱은 5개로 보이며, 다리로는 향로가 제단에 올렸을 때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기 가장 좋은 조건으로 구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좀 더 조형적인 미를 살리기 위한 의도였을지 모르겠지만 성공적으로 반룡(蟠龍)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약간 구부린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구도를 보다 안정적이게 완성시켜줍니다.
향로의 아랫부분인 노신(爐身)에는 연꽃잎을 8개씩 3층으로 배열하여 연꽃잎과 남은 공간에 물고기와 수중생물, 물가에 살기에 적합한 사슴과 학 등 동물 26마리에 인물 2명을 섬세하게 부조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향로의 노신(爐身)에서 피워진 연기가 뚜껑을 덮은 상태에서 아름답게 피어오르도록 설계된 개신부(蓋身部)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어야 되겠군요. 노신부(爐身部)도 대단하지만 이 개신부엔 미적으로나, 표현하고자 하는 백제인들의 문화적 자신감과 역사적인 사료로서의 중요한 이야기들이 담겨있기에 한 편으로 정리하기엔 무리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와 같은 문화재를 간직한 대단한 민족이라는 자긍심과, 이미 사라진 고대국가의 향로 하나를 통해서도 세계사적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울 문화적 성취만큼은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음악, 그리고 한국의 음식은 이미 그 시대부터 대단하였다 하겠습니다.
끝맺음으로 이 말씀은 해야 되겠습니다. 자칫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런 돈 안 되는 글이나 쓰는 거 아닌가 싶어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물론 저도 먹고 살아야 되며 자식 둘을 양육하는 아버지입니다. 예전 광고도 못 붙이는 다음블로그를 사용하다 그만 둔 이유는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다 블로그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걸 모르고 지나쳤습니다. 당시엔 조금 시간이 여유로울 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습니다. 그 외엔 돈을 벌어야 했지요. 1년을 평균으로 했을 때 봄철엔 거의 글을 못 썼습니다. 그러다가 찬바람 솔솔 불기시작하면 이듬해 3월 하순까지 주로 글을 썼지요.
봄철엔 날씨가 반드시 맑지 않더라도 산엘 오르는 날들이 많습니다. 산촌에서 나이 적지 않게 든 남자로서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방법입니다. 혹여라도 뭔가 다른 생각이나 기대를 갖고 제가 부탁하지도 않은 일은 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메밀막국수나 기타 산나물에 대한 내용이나 특별히 다루어 주었으면 하는 내용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내주시면 참고를 해 보겠습니다. 글감이 되는 내용이고,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는 요령껏 글을 쓸 수는 있습니다. 단 저는 영업사원은 아니란 사실만 기억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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