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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포커스

통일을 염원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세상

by 한사정덕수 202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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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4조 통일, 그 오래된 약속 앞에서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헌법 제4조의 이 짧은 문장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이상을 말해 줍니다. 통일은 단지 영토의 결합이 아니라 서로 단절된 기억과 언어, 상처와 두려움을 함께 이겨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항은 선언이기 이전에 하나의 다짐이며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이 다짐은 오히려 두려움이며 의문만 가득 들게 하는 일들로 기억은 가득합니다. 1975, 대한민국은 민방위훈련을 전격 도입했습니다. 이전의 간헐적인 민방공훈련과 달리, 민방위대가 조직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훈련이 시작된 해였습니다. 그해 여름, 국민학생이던 저는 학교에서 처음 공습경보사이렌을 들었습니다. 라디오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선생님은 외쳤습니다. “화생방훈련이다! 모두 운동장으로!”

학생들은 도랑에 몸을 숨기고,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엎드렸습니다. 그 어린 날에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이 모든 것은 단지 훈련이 아니라, 적에 대한 공포심을 각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일본의 731일 부대와 독일에 의해 자행된 아우슈비츠 살상을 책을 통해 이미 학습한 까닭입니다.

당시 국가는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북한 공산당이 얼마나 사악하고 잔인하며 극악무도한지를 끊임없이 주입했습니다. 일본의 731일 부대보다 국가는 어찌된 일인지 독일 나치에 대해 더 많이 학습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 동시에 연합하여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음에도 일본에 대한 내용은 기본적인 수준에 그쳤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독일만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른 듯 만들었습니다.

교과서에는 샛별보기운동과 천리마운동이나 천삽뜨기운동 같은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해가 뜨기도 전 금성이 떠 있는 어둠 속에 농장으로 나가야 했고, 삽을 천 번 떠야 겨우 허리를 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모가 김일성을 욕하면 자식이 이를 신고하고, 신고당한 부모는 광장에 모인 주민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집집마다 서로를 감시했고, 옆집 사람의 말 한마디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공포스터를 그려야 했고, 반공표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가슴에는 반공 구호가 적힌 리본을 달고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인사도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반공이라고 외치던 것에서 멸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통일로 받는 인사법까지 교육받았습니다. 그 인사 하나에도 이념은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이 인사법은 판문점 도끼사건이 일어난 직후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1976818,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이던 유엔군과 한국군을 도끼 등으로 기습 공격한 사건은 냉전기 한반도 최대 위기 중 하나였습니다. 미군 장교 보니파스 소령과 배럿 대위가 사망하고, 한국군 5명과 미군 4명이 부상당했습니다. 4분간의 난투 끝에 유엔군 트럭 3대가 파손됐고, 이 사건은 즉시 데프콘 3 발령과 항공모함 미드웨이호 출동, F-4·F-111 전투기 및 B-52 폭격기 한반도 배치 등 미국의 강경 대응을 촉발했습니다. '폴 버니언 작전'으로 불린 보복성 작전에서는 특전사 64명을 포함해 미루나무를 완전히 제거했으며, 이후 남북 초소가 완전히 분리되고 JSA 경계가 구체적으로 확립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관제데모가 일상이던 그 시절, 우리는 통일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그것을 두려워하던 세대였습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쏟아져 내려올 것이며, 우리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 감정은 학교의 교육과 민방위 훈련, 그리고 각종 반공 포스터를 통해 자라났습니다. 국가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통일이 왜 두려운지를 우리 가슴 깊이 새기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도, 저는 마음 한 구석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과연 통일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우리가 같은 민족임을 기억하지 않고, 오직 서로에 대한 공포만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 통일은 정말 가능한 일인가. 북한이 정말 우리보다 가난하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감시를 할까? 그리고 정말 간첩들이 곳곳에서 활동하는데, 경찰과 군인과 나라가 그들을 매일같이 잡아들여서 안전한가? 이른 아침에 이슬이 젖은 상태로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신고해야 된다는데 왜 어른들은 새벽에 산엘 올라가 버섯을 따고,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많이 밤낮 없이 산엘 오르고 내려올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말하는 간첩이나 대통령의 업적들이 모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은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죽고,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하면서부터 부쩍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3김의 화려한 말잔치와 함께 학원소요사태로 불리는 학생들의 시위로 대학들에 대한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어른들과 학생들 사이의 뭔가 다른 판단들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은 무조건적인 통합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단지 체제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상과 신념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4조는 바로 그 믿음을 국가의 헌법에 명시한 유일한 문장입니다.

저는 이 조항을 생각할 때마다 금강산에 꽃씨를 뿌리던 그 봄날을 떠올립니다. 철책을 넘어간 건 꽃씨였지만, 그 씨앗은 분명히 평화였습니다. 그날의 바람과 햇살은 마치 헌법 제4조의 한 구절처럼 느껴졌습니다. 자유롭고 평화롭게,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오는 약속. 통일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씨앗을 뿌리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평화의 씨앗 위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8711, 북한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한국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입니다. 북한 측은 그녀가 군사 경계지역을 침범했으며 경고를 무시하고 도주했다는 이유로 사격했다고 주장했지만, 피해자의 등과 흉부에 남은 총상, 경고 사격 여부에 대한 의혹, 숙소에서 사망 지점까지의 거리 등은 여전히 논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남북 관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명박 정부는 즉각 금강산 관광을 전면 중단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남북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46명의 해군이 전사하자, 대한민국은 5.24 조치를 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 천안함은 여전히 제겐 의문부호로 남아있습니다. 초기에 뉴스로 나왔던 화면은 곧장 사라졌고, 즉각적으로 구조에 전념하고 있다는 신호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빌미로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 교역이 중단되었고, 인도적 지원 외에는 어떤 접촉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2013년에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개성공단 근로자들을 철수시키면서 5개월간 공단이 중단되었고, 2016년에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이유로 개성공단은 완전히 폐쇄되었습니다. 그 결정은 통일을 위한 경제 협력의 상징을 지워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2024, 개성공단지원재단이 해산되면서 남북의 협력은 행정적으로도 종결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공교롭게도 이명박, 박근혜와 윤석열 정부 시절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은 통일정책이 단지 외교적 선언이 아니라, 정권의 의지와도 밀접히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헌법 제4조가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은 단지 책상 위의 이상이 아니라, 매일의 정치적 선택과 대응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현실입니다.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나 노태우는 물론이고 이들 보수를 참칭하는 부류에서는 통일을 원하지 않으며 오로지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으로만 이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에 의해 세뇌된 젊은이들과, 권력의 단맛에 취한 사람들에 의해 분단은 더욱 단단하게 유지되어야 할 조건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기억으로부터 통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타자화하며 살아왔는지, 그 기억의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4조는 평화적 통일을 말하지만, 그 평화는 우리 안의 전쟁부터 멈추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헌법 제4조는 말합니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한다.” 이 문장은 찢긴 하늘 아래 두 개의 별이 다시 하나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긴 기도의 문장입니다. 저는 그 기도를 기억 속에서 불러냅니다. 통일은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말과 어떤 행동으로 이 문장을 실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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