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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향기/시인의향기

봄을 짓는 마음으로 시를 짓고…

by 한사정덕수 202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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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힘차게 수관을 타고 오르는 물도 저절로 나무 속에 스며든 것이 아니듯, 봄은 부단한 기다림과 노력 속에서 스며들어 옵니다.

나뭇가지에 꽃눈이 맺힐 것은 맺히고, 여린 잎을 먼저 틔울 것들은 분주히 준비를 마친 이즈음에야, 비로소 눈이 제대로 내리기 시작합니다.

겨울 동안 서풍에 밀려온 구름들은 오는 도중 모조리 힘을 소비한 탓에, 여간해서는 눈다운 눈을 쏟아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2월을 넘겨 복수초가 산골짜기 양지바른 곳에서 노랗게 꽃등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백두대간 안쪽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오면서, 기다렸던 눈이 쏟아집니다.

이제야 봄이 오려나 싶지만, 그 과정은 여전히 더디고도 질서 있는 법이지요.

변화란 이렇듯,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예고된 흐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변화를 마냥 기다리기만 한다고 해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짓고, 어떤 것은 짜야 합니다.

천을 마름질해 옷을 짓듯, 시를 짓습니다.

철부지 아이들도 때론 놀라울 만큼 순수한 시를 짓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면 오히려 시가 더 어렵고 무겁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짓는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려 작물을 키워내듯, 시인은 마음의 밭에 글자를 뿌려 한 편의 시로 키워냅니다. 때론 천을 짜듯, 씨실과 날실을 엮어가며 시를 만들어갑니다.

봄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봄을 그려내는 동안, 누군가는 봄을 직조해 나갑니다.

마름질이 끝나면 솔기를 가르고, 잇고, 시침질을 해야 옷이 되듯, 봄도 그렇게 다듬어져야 비로소 완전한 한 계절이 됩니다.

눈은 내렸다가, 녹았다가, 다시 내립니다.

 

봄을 짓는 마음

 

봄은 거저 오는 게 아니라네

기다린다고 오는 것도 아니라네

눈 녹아 못자리에 물이 스며들 듯

뿌리 깊은 것들은 속으로

속으로 한참을 움직여야 한다네

 

꽃눈은 스스로를 맺고

제때 열 줄을 알아야 하며

새순은 바람을 읽고

적절한 때를 준비해야 한다네

 

겨울이 지나가야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을 견뎌내고서야

비로소 봄이 오는 것이라네

 

늘 신기한 변화를 기다리지만

때로는 짓고, 더러 짜기도 해야 한다네

씨를 뿌리듯 시를 짓고

천을 짜듯 문장을 엮어내나니

봄이 그려지기도 전에 누군가 이미

한 뼘의 햇살을 준비해 놓았고

누구인가? 꽃물을 들여 나무의 숨을

나무의 영혼을 피울 움 틔우고 있다니

 

눈발은 흩어지고 또 쌓이고

흩날리고, 또 녹으려니

그러나 그 눈 아래

보이지 않아도 부지런한 움직임들이

봄을 짓고 짜고 있으려니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꿈을 그려

제각각의 봄을 짓고 있는 것이려니

 

봄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불러야 오는 것

봄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어 올려야 피는 것

그리하여 오늘도 봄을 짓는 마음으로

한 편의 시를 짓노라니.

 

한계령 방향을 어림잡아 하얗게 쌓인 눈이 저 멀리 보입니다.

산의 풍경이 어떠한지 묻는 친구의 재촉에 길을 나서고 싶습니다. 하지만 잠시 근처 향교의 마당만눈이 덮인 길을 걸으며 문득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봄을 짓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누군가는 눈이 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며 다음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바람이 불어올 때, 때론 흙먼지가 일고 거센 바람이 성가시게 느껴지겠지만,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결국 새로운 봄이 찾아올 것입니다. 봄을 짓는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하고 기다릴 수 있다면, 어느 계절이든 아름답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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