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계령엔 2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통으로 넘어가는 도로고, 다른 하나는 직전에서 필례를 거쳐 인제로 곧장 빠지거나 기린으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옛 지도로 보았을 때 이 필례를 빠지는 고갯길이 소동라령으로 보입니다.
2011년에서 12년으로 해가 바뀌고 며칠 뒤 아이들과 책과 앨범을 정리하다 아버지께서 노트에 적어놓으신 기록과 함께 사진 2장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제가 1977년 오색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받은 9회 졸업 기념사진이고 다른 한 장은 제게 각별하게 대해주셨던 오색여관의 사모님께서 주셨던 사진이었습니다. 그리고 졸업장과 표창장과 우등상을 받은 상장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2004년 2월1일 돌아가셨고 2월 3일 속초승화원에서 화장장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곧장 아버지께서 사시던 양양군 서면 장승3리의 집을 물려받아 그곳에서 삼우제를 지낸 뒤 형제들이 모두 떠나고 유품을 정리할 때 다른 물건들은 대부분 버리거나 태웠지만 검정색 표지의 노트와 봉투 하나는 가족들 앨범과 함께 보관했었는데 거기에서 저와 관련된 이 물건들이 나왔던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무렵 저는 루사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 양양지역의 도로개설 현장에 목수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1월 22일이 설이었고, 며칠 뒤인 1월 26일은 이젠 어엿한 숙녀가 된 래은이의 돌이었습니다. 돌 전날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 들려 술 한 잔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래은이 손에 만 원 지폐 한 장을 쥐어주셨지요.
이 밤 방풍림 숲 지나다 보니
설을 쇠고도 며칠 지난
달빛 밝아가야만 하는 날인데
아직 봄바람이라기엔 차기만 한
북풍 저토록 불어야 하는지
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구나.
소금 내 비린 해풍 불던 그 산기슭에
성급히 복수초(福壽草) 피었다던데…
이 밤 방풍림 숲 지나다 보니
내 삶의 행로
안온한 바람막이 되어줄 이 있을까 싶어
달무리 진 하늘 바라보는 마음자리
세심하게 더듬어 보건만
여전히 북풍만 한설(寒泄:차갑게 새다.)이고
저녁나절 날아오른
앞 논 기러기 떼도 찾지 않는 터엔
달빛마저도 어스름 하네
아직도 모를 일 많은 세상이라
구차한 내 행색 가릴 줄 모르는데
내 누굴 넉넉히 가려 줄 힘 있으랴
보듬어 줄 넓은 아량 있으랴
그저, 들에 바람 불면 흔들리고
저 강에 물 흐르면 흐를 줄 알 수밖에.
그 밤 머물던 양양읍 감곡리의 집에 돌아와 잠시 아이와 놀아주다 물을 끓여온 아내와 함께 래은이를 목욕시키고 이내 잠든 아내와 아이 얼굴을 본 뒤 화장실을 가려고 나섰었습니다. 날이 흐렸는지 달빛도 없는 마당가에 서서 담배 한 개비 태우고 방에 들어왔지만 종일 고단하게 일을 했어도 쉬 잠이 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쓴 시가 바로 저 시입니다.
그리고 닷새 뒤 그날은 강풍이 심하다고 교량위에서 위험한 작업은 못한다며 새벽부터 전화로 출근하지 말라는 현장 소장의 말을 들었기에 조금 늦도록 쉬며 래은이와 놀아줄 때였습니다. 아내는 아침식사를 준비한다고 부엌에 나갔는데 누군가 오토바이로 마당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들리더니 “여기가 장승리 정씨 아저씨 아드님 사는 집이 맞나요”란 말이 들렸습니다.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장승리 이장이 오토바이에서 내리지도 않고 “제가 그분 아들 덕수 맞습니다”라 하자 “아버지가 아프신 거 같으니 빨리 장승리로 와요”라 하곤 곧장 오토바이를 돌려 나가더군요. 아내는 부엌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왔고, 저는 며칠 전 아버지를 뵈었었기에 “아버지가 어디 편찮으신 모양이야 얼른 준비하고 가 보자고”라 하곤 아침식사를 하고 아버지께 갈 준비를 하려고 아이 목욕을 시키는데 다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습니다.
“빨리 오라는데 왜 안 와서 다시 오게 만들어요”라며 짜증난 목소리를 말하더군요. “어린 아이가 있어서 그럽니다. 다 준비되었으니 금방 가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프시다면 병원으로 모셔가면 되니 걱정 마세요. 금방 갑니다”라 조용히 대답하고 아이에게 옷을 입혀 안고 차에 올랐습니다. 저는 운전면허를 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가 운전을 하는 차로 장승리 아버지집 앞으로 가는데 언덕에서 보니 아버지집 앞에 몇 명의 남자들이 웅성거리고 서 있더군요.
마당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당신 아버지가 아프신 거 같다는데 왜 그렇게 늦게 오나? 이거 완전히 불효자식 아니여”라 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을 당겨보았지만 안에서 걸어놓아 열리지 않았습니다. 부엌의 유리를 통해 방안을 살펴보니 부엌과 연결된 문은 열린 상태였고 아버지는 이불을 젖혀두고 요위에 엎드려 계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며 “아버지”하고 몇 번 불러도 움직이지 않으시더군요.
새벽에 현장 소장의 전화를 받기 전 걸려온 전화 때문에 잠이 깼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현장 소장 전화도 그 바람에 벨이 울리자 곧장 받을 수 있었는데,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고, 전화는 그냥 연결된 상태 그대로 한참을 “여보세요”를 외쳐도 조용했었다는 생각에 시멘트를 바른 마루로 올라섰습니다. 며칠 전 왔을 때 여름철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는 방문을 열어두었던 생각이 나서 아버지가 다시 걸어놓지 않으셨다면 문이 열리겠지 싶어서였습니다. 그 문도 잠겼다면 창문 하나를 깨서라도 일단 방에 들어가야 되었습니다.
“경찰을 불렀으니까 기다려요” 누군가 뒤에서 말했습니다. “아들인데 문을 뜯었다고 경찰이 뭐라 하겠오. 그냥 둬요”라는 이도 있었습니다. 문을 당기자 열렸습니다. “어, 열리는 문이 있었네”라 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곧장 안방문을 밀쳤습니다. 그리고 방안을 살펴보았습니다. 역시 수화기가 줄에 매달린 상태로 방바닥에 놓여있었고, 저와 동생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수화기 밑에 깔려있었습니다. 필요한 뭔가가 있으시면 전화를 하시라고 굵은 펜으로 크게 적어드린 종이입니다.
부엌문을 열며 냉장고와 밥솥을 쳐다보았습니다. 문을 연 다음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코에 손을 대 보았지만 호흡이 없으셨습니다. 목에 손을 댔으나 맥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받았던 시간이 새벽 3시를 조금 넘겼을 때니 6시간이나 지난 시간이라 인공호흡도 할 필요를 못 느꼈습니다. 다시 부엌으로 가서 밥솥을 열어보았습니다. 저녁에 팥을 넣고 밥을 지어 한 그릇 드셨고, 개수대엔 소주를 드신 듯 맥주컵 하나와 수저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가스레인지엔 작은 냄비가 있어서 열어보니 꽁치통조림을 넣고 끓인 김치찌개가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시고 다시 잠이 안 오셔서 소주를 한 컵 드신듯했습니다.
마당으로 나와 아내에게 “아버지 돌아가셨네. 아들이라고 하지만 함부로 아버지를 모실 수 없으니 소방서에 연락부터 해야 돼. 경찰도 불러야 되고”라 말했을 때 마을 주민이 불렀다는 경찰이 도착했습니다. “언제 전화를 했는데 이제야 와” 예의 그 사람은 경찰에게도 불만입니다. 경찰이 자신의 연락만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데도 매번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인 듯합니다. 이장은 아니지만 그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한테 술을 얻어 먹으로 가끔 들린다고 했던 사람이니 그날도 술을 얻어 마시려고 들렸다가 대답이 없으니 이장한테 연락을 했겠다 싶더군요.
▲ 아버지의 노트에 이 기록을 남긴 이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막 결혼을 한 제 조카들의 어머니가 쓴 필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74세 되시던 해 생신을 두 달 남겨두고 돌아가셨습니다.
2004년 2월 3일 오전 10시
2004년 2월 3일 오전 10시
‘아버지 집에 불났어요.
어서 나오세요.’
웬 황당한 “아버지 집에 불났어요.”
어서 나오시란 외침에 대답 없이
불꽃 속에서 미동도 않으시니
아, 진정 가시긴 가셨나보다 싶어
불과 하루 전
곱게 세안세족(洗顔洗足) 하시고
정성껏 차려입은 옷차림
좋은 곳 가시란 바람 간절하였건만
그 모습 그대로 영이별
부자간(父子間)의 정(情) 다 태우고 가시니
비감(悲感)의 눈들 어디 두어야 하리
살아 늘 소원하시기를
‘내 죽거든 태워 아무데나 뿌려다오.’
그 소원 이렇게 황망한 일인 줄 깨달기도 전
아직도 서럽도록 뜨거운
당신의 마지막 육신을 받으니
이 비통(悲痛)의 가슴들 어이 하리요.
승화원에서 기다리며 적었던 시입니다.
꿈속만 같더이다.
꿈속만 같더이다.
이 아침 울린 전화벨소리
바람결에 날려버리고만 싶은
아픈 곡조의 노래
모든 게 다만 꿈속만 같더이다.
이미 식은 육신을 만난 내 눈
어찌하여야 하는가를 몰라
황망히 시선 거두려 하였으나
그도 힘든 일이라
난처하기 다만 그지없더이다.
다 그만그만한 삶들
어찌 보면 다 그렇게 오고 가겠지만
막상 현실로 닥친 날
허망한 부르짖음
아무 대답 없더이다.
그렇게 접어야 했을 운명인 줄
늘 알면서도 위태롭게 헤매는 길
그게 우리의 삶인가 싶더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장승리에 형제들 모두 모여 저녁식사를 한 다음 울산 사는 여동생이 삼우제를 준비하며 사왔던 문어를 안주로 술들을 마시고 모두 잠 든 뒤 썼던 시입니다. 그 뒤로 몇 년 세월이 흘러 래은이가 제가 졸업한 학교에 입학을 해 학교관사에 거처를 옮겨 살게 됩니다. 그리고 래원이도 누나가 다니는 학교에 나이는 어리지만 입학합니다. 아마도 그런 아이들과 함께였으니 개학을 며칠 남겨둔 요즘과 같은 시기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발견하고 사진 몇 장을 촬영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다음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 글을 하나 썼었습니다. 그 글은 다시 5년이 더 지난 다음 2017년 12월 27일 광화문광장에 머물 때 할리스 커피숍에 들려 오마이뉴스에 ‘사는 이야기’ 부분에 기사로 보냈는데 채택이 되었습니다. 그 글은 따로 옮겨놓겠습니다. 글 한 편이 다음블로그에서 2012년 2월에 처음 쓰여지고 다시 5년이 지나 오마이뉴스로 소개되었다가 다시 제 블로그로 옮겨지는 일도 다 생깁니다.
▲ 1974년 1월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엔 저작권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동생이 있을 뿐 이 사진은 촬영자도 오색여관에 왔던 전도사였습니다. 사진과 관련해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오색여관을 운영하던 방만웅 어르신과 그의 부인 하춘하 여사여야 합니다. 양양읍내에 사는 그 분의 아드님이라면 또 모르겠군요. 사진은 하춘하 여사께서 비용을 지불하고 아이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습니다.
그때 발견된 사진 가운데 제가 4학년이 되던 해 촬영한 사진이 또 다른 기억들을 만들었습니다.
1974년 겨울, 아버지께서 대나무를 자르러 울진으로 떠나셨습니다. 저와 동생들은 적막한 오색 산골에 남겨졌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사람들이 찾는 오색이지만, 겨울의 오색은 쓸쓸한 산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겨울철 동안 일거리를 찾아 대나무 작업에 나서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겨울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사진은 서울에서 온 방만웅 어르신과 그의 부인이 홍익대 학생들과 전도사에게 다양한 공부를 가르치던 시절의 우리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 해 설날 무렵, 아버지께서는 저와 동생에게 지게를 건네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며 겨울방학 동안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사진 속 친구들 중 두 명은 세상을 떠났고, 그들을 포함해 다섯 명의 동창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 있던 자리는 현재의 남설악식당 자리이며, 오색여관은 다른 곳으로 이전했습니다. 망경여관은 현재 '약수온천장'이라는 이름으로 고향 선배님께서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 시절,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였고, 우리의 웃음과 눈물은 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때의 추억은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2012년 기록으로 남겨놓았던 사진을 재작년 12월 말에 한국인의 밥상을 촬영할 때 방송작가의 부탁으로 제공했습니다. 어렷을 적 추억이 담긴 사진을 부탁받았는데 저는 사진이 없습니다. 방송에서 그 사진을 내보냈지요. 그리고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작년 1월 26일에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어제 오전, 친구와의 약속을 준비하던 중에 한국인의 밥상 대표 작가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뭔가 의아했지만 전화를 연결하니 듣고 정말 황당한 내용이었습니다. 오색 주민 중 한 명이 저작권을 주장하며 저작권료를 요구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사진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사진을 받았고, 저 역시 이 사진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오색여관을 운영하셨던 하춘하 여사께서 겨울방학 동안 서울의 교회에서 인연을 맺은 전도사와 청년부를 초대하고, 오색 마을의 아이들을 불러 공부와 놀이를 가르칠 때 촬영한 것입니다. 사진에는 저작권을 주장하는 분의 동생도 있지만, 촬영자라고 주장하는 분은 1974년 12월 성탄절 무렵 불과 18살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에게 카메라가 있었지만, 주민들을 위해, 마을 아이들을 위해 필름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마을 아이들이 오색여관에서 나눠 받은 것이고, 자신이 촬영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돈에 눈이 멀지 않고서는 미친 짓이 아닙니다. 자신의 동생이 사진에 있어 이 사진을 받았을 테지만, 그걸 자신의 가족이 촬영했다고 우기는 것은 억지입니다.
2002년에 제가 만든 오색산벚꽃 축제 기획안 서류를 양양군 문화관광과에서 복사해 들고 와서 자신이 좋은 기획안을 준비했다며 말하던 그 사람, ‘오색옹기장’ 된장집에서 촬영한 제 사진도 자신이 촬영했다고 억지를 부리던 사실, 더 이상 묻어두고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조용히 묻어주고 침묵하면, 자칫 한계령도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할 위인입니다.
7년 선배면 그만큼 선배답게 처신하길 바랍니다. 계속 이런 짓을 하면 이름까지 공개하겠다고 미리 경고합니다.
이렇게 기록을 남겨놓았는데 여기에 대해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마디 반론도 없습니다. 물론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 결혼식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신 분들의 성함을 기록한 이는 두 분입니다. 큰 글씨는 아버님의 필체가 맞습니다. 아래 3개의 글씨는 형수님의 필체입니다.
제 아버지의 노트에 형수가 기록한 결혼식 부조금 어디에도, 그리고 물품을 낸 분들 성함 어디에도 그 부모의 이름도 없는 사람이 자신이 촬영하지도 찍히지도 않은 사진의 저작권을 주장하며 방송국에 돈을 요구하다니 기막힌 일입니다. 1977년 11월 아버지가 월급으로 13700원을 받으실 때이니 부조금 1000원은 상당히 큰 돈입니다. 대부분 500원을 부조할 때인데 가난한 집 살림에 보태라는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 결혼식에 얼굴도 비치지 않은 집의 아들이 저작권을 내세운 사진을 다시 봅니다.
어제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전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셨던 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음력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날이 되는데 2004년보다 일주일 늦게 음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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