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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설예보에 잔뜩 기대를 했지만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만 사납습니다. 그 덕에 지난 사진으로 눈구경 합니다.
제가 ‘누나’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걸 잘 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누나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열일곱 살 되던 시절부터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는 저보다 너덧 살 위인 여성들도 경우유독 저를 무언가 말을 하거나 부탁할 때 Mr정이나 아저씨라고 부른 탓일 겁니다. “덕수야”는 고사하고, “덕수씨”라고 부르지도 않았기에 Miss김이나 미경씨 이런 식으로 호칭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제가 누님이나 누나라고 호칭을 하는 경우는 사촌 누님 한 분이 유일했는데, 몇 년 전부터 누님이라고 불러도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덕에 최근엔 서너 살 위인 분들에겐 곧잘 “아, 누님 왜 그러신 답니까?” 정도는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직업이 ‘가수’라고 하면 지레 “양희은씨구나” 하거나, “양희은 선생님이죠”라 할 겁니다. 제가 18살에 쓴 시로 된 노래 한계령을 세상에 알리신 가수시니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한 행사에서 단 한 번 양희은 가수를 만나 바로 옆자리에 앉았었지만 그때 저는 “양희은 선생님 반갑습니다”라 인사를 한 게 전부였습니다. 그 행사장의 주빈이셨던 분께서 “이 분이 바로 ‥‥‥ ”라 인사를 시키시려 하자 “아, 알고 있어요. 정덕수 시인이잖아요”라 해서 인사를 시키시려 했던 분이 도리어 머쓱하게 만든 기억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을 제가 누님이라 부를 일은 없지요.
지금까지 제가 쓴 시로 노래를 만드시겠노란 말씀도 없으신 분이지만 분명히 제가 누님이나 누나라 부르는 분은 많이 알려진 가수가 맞습니다. 1982년 ‘들국화’란 노래로 데뷔를 하셨으니 벌써 40년이 넘는 긴 세월을 가수로 활동하셨군요. 1995년에서야 드라마 주제가이기도 한 ‘장녹수’를 부르며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이 분, 그렇습니다. 가수 전미경입니다.
▲ 1982년에 가수로 데뷔를 하셨으니 40년을 훌쩍 넘은 세월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만나면 편안하게 배려하시는 모습, 봄에 다시 오시라 말씀드렸습니다.
직접 뵌 건 제가 이곳 양양의 계곡에서 개여울을 거니며 낚시한 꺽지와 미유기로 인사동의 시가연(시(詩歌演)에서 초복에 복달임으로 어탕을 끓일 때였습니다. 2019년이니 짧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연이군요. 시가연은 처음 문을 열고 얼마 안 지났을 때 제가 눈이 내리는 날 시낭송을 하러 다녀오며 인연을 맺은 문화카페로 시와 노래, 공연이 있는 작은 공간입니다. 몇 분의 여성분도 그날 오셨지만 다른 분들은 저와 이미 잘 아는 사이였으나 단 한 분, 저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 그 자리에 함께 하셨는데 인사를 시키며 “장녹수를 부르신 전미경 가수세요”라 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몇 번 더 시가연에서 만났고, 반갑게 인사를 나눌 정도로 낯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저로서야 거리도 멀고, 하는 일이 있어 자주 시가연을 찾지 못했지만, 미경 누님은 가끔 다른 일행 분들과 다녀가시곤 하셨다는 말씀을 시가연의 김영희 선생님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정 시인, 그 누구야. 아, 그래 맞다. 장녹수 부른 전미경 가수 다녀가셨어요.”
가끔 산나물이나 카페에서 필요로 할 무언가를 보내면 전화를 주셔서 이생진 선생님이나, 저에겐 한국 산악계의 대선배님이신 이해동 형님, 장경호 선생님, 정운현 형님처럼 제가 잘 아는 분들의 근황을 전해주십니다. 장경호 선생님께서야 인사동의 터줏대감이신 분이지만 다른 분들은 제가 시가연으로 모시며 단골이 되신 분들입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분들은 삶이 참으로 향기롭습니다. 가수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사랑하고 정말 소중한 보물처럼 아끼시겠지요. 전미경 누님이 그런 분이시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이 낯 선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생각에서인지 자칫 오만하게 비쳐질 모습을 보이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 없이 서로간의 간극을 이어주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실천하시더군요.
작년 여름엔 오색을 찾으셨는데‥‥‥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가 끓인 어탕을 즐기시기는 하지만 뭔가 더 기쁜 추억을 만들어드리고 싶더군요. 날이 채 밝기 전 서둘러 양양읍의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오전 10시엔 오색에 도착하신다고 하니 서둘러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어탕을 끓이는데 필요한 대파와 청양고추, 부추와 같은 야채를 구입하고, 돌을 달궈 구울 삼겹살도 숙성을 잘 시키는 정육점에서 넉넉히 구입했습니다.
수박과 쌀, 그리고 강원도 하면 여름엔 감자와 옥수수를 떠올린다는 걸 알기에 옥수수와 감자도 구입했습니다. 감자는 밥을 지을 때도 넣고, 생선을 조릴 때나 어탕에도 구수한 맛이 풍부해지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비린내가 나는 생선이라면 초피를 빼놓을 수 없기에 구입한 물건을 잠시 맡겨두고 초피나무 잎을 채취하러 다녀왔습니다.
그때서야 해가 뜨기 시작했고 아침에 오색으로 가는 시내버스도 곧 운행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더군요. 운전을 안 하는 입장에서 구입한 물건을 정류장까지야 옮긴다고 해도, 오색에 도착해서 옮기는 건 난감해서입니다. 양양에서 오색까지는 택시비가 제법 많이 나옵니다.
오색에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시장에서 구입한 짐을 옮기고 삼겹살을 구울 바비큐 그릴을 청소까지 마쳤을 때 미경 누님과 일행 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가볍게 요기를 하고 모두 한계령으로 향했지요. 이날 한계령에서 누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제가 그 직후 핸드폰을 잃어버리며 사진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누님과 나란히 촬영한 사진은 유일했었기에 더 아쉬움이 큽니다.
▲ 미경 누님이 나오신 방송들 일일이 찾아 노래를 들어 보았습니다. 어떤 노래거나 편안하게 부담없이 들을 수 있더군요. 뭐랄까. 그냥 평소 사람을 대하시는 모습 그대로 노래에도 그대로 실린다고 하면 되겠다 싶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오래전 제가 어려서 살던 집터 작의 골짜기에 잠시 들렸습니다. 삽겹살을 숯불을 피우고 구울 때 사용할 작은 돌들을 줍기 위해서였습니다. 설명을 들으신 누님도 납작한 돌들을 찾아서 몇 개 손에 들고 날라서 차에 실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누군가 주도적으로 하면 대부분 물러서서 구경만 하는데, 미경 누님은 자신의 화장품과 샴푸 등을 담는 바구니까지 기꺼이 내 주셔서 차 안에 돌들이 뒹구는 일이 없게 배려하시더군요.
숯불을 피우고 돌을 그 위에 덮었습니다. 손에 물을 조금 묻혀 튀겼을 때 돌 위에서 물방울이 치익 소리를 내며 톡톡 튀기 시작했습니다. 고기를 올려도 돌에 달라붙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가열된 상태란 신호입니다. 고기를 굽고 있을 때 일행들은 이미 몇 잔 술들을 걸쳐 각각의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간의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에서 구입해 온 마늘과 청양고추, 오이, 양파만으로도 제가 봄에 산을 찾을 때 먹기 위해 만들어 둔 달래와 초피를 넣은 된장으로 안주들을 하며 술을 시작했습니다. 빈 술병이 몇 병 쌓일 때서야 삼겹살도 먹기 좋게 익었습니다.
저보다 누님이 주빈이나 다름없는 자리였기에 잠시 자리에 앉아 대화를 하시던 누님이 바비큐그릴이 있는 곳으로 오시더니 조용히 말씀을 하시더군요. “동생은 챙기느라 하나도 못 먹잖아요. 앉아서 한 잔 해요. 잠시 내가 구울게요”라 하셨습니다. 옷에 냄새 밴다고 말려도 걱정 말라시며 잠시 구워진 삼겸살을 접시에 먹기 좋게 썰어 담으려고 집게를 놓았는데 이미 손에 잡으셨더군요. 어탕을 끓일 때도, 밥을 지을 때도 미경 누님은 주방에 들어오셔서 무얼 도와주면 되느냐 부터 물으셨습니다.
이러하신 모습을 보면 반드시 미경 누님이 아닌 다른 분이라도 저는 존경합니다. 스스로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에겐 정이 가지 않습니다. 자연히 곁을 내줄 일이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지정해 어떻게 불러달라고도 하더군요. 그런 정도의 그릇이라면 뭐 더 이상 마음을 내어 수고할 일이 없다 생각합니다. 스스로 낮추고, 다른 이를 존중하는 이들일수록 더 멋진 삶을 살아왔으며, 생각도 그만큼 깊고 넓다는 정도는 살아오며 깨달았습니다.
저는 2000년대 중반까지 저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하대하는 걸 참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많은 섬유업종에서 오래 일을 해서입니다. 일반적인 시장에 전날 생산한 옷을 내는 봉제공장은 물론이고, 웨딩업체도 남자는 여자에 비해 훨씬 적습니다. 더구나 1980년대 초반 봉제공장을 억지로 떠맡아 일을 할 때도 함께 일을 하는 나이 어린 소녀들은 사소한 말 한 마디에서 쉽게 상처를 받더군요. 어린나이에 고향을 떠나 봉제공장의 직공으로 일을 배우며 월급을 받아 고향으로 보내는 소녀들이 많았습니다. 소녀들은 늘 고향을 향한 향수와 가난 탓에 친구들과 다른 생활을 한다는 서글픔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아주 작은 말 한 마디에도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그들 스스로 자신이 존중받으며 살고 있다는 믿음부터 주어야 되었습니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도 망설이는 걸음이 역력하게 쭈뼛거리며 들어와서도 어지간해서 먼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무실의 자리는 상석이 정해져 있지요. 이들에겐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게 하려면 최선의 방법이 마주보게 앉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해서 바짝 움츠린 몸을 돌려 말을 하기란 쉽지 않기에 맞은편에 앉아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대부분 불만은 말끔히 지우더군요. “5번 시다지?”와 같이 몇 번 미싱의 보조를 지칭하는 투의 말을 하면 정말 몰상식한데 그런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미싱사를 부를 때도 “어이 5번 오야(같은 봉제공장이라 하더라도 월급을 받으면 일을 하는 사람과 팀을 구성해 작업한 양에 따라 돈을 받는 객공팀이 있습니다. 그 객공팀을 이끄는 사람을 오야라 합니다.) 이리 좀 와봐!” 이런 모습 수없이 보았기에 저부터 조심하겠다고 다짐했었지요.
“김○○이는 집이 전남 어디라고 했었죠? 전에 들어놓고 다른 일을 신경쓰다보니 잊어서 그래요” 정도로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시만 해도 충분히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그런데 “또 뭔데? 너 뭐가 불만인데”로 몰아붙이면 함께 일할 맛이 뚝 떨어지게 되겠지요. 쉬운 일인데도 보통 자신의 권위부터 생각하기에 다른 이의 마음에 상처들을 줍니다.
“어떤 가수가 좋다”는 평가는 항상 자신만의 입장이기에 뭐라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좋아하는 가수고 노래라도 누군가는 정말 싫어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그 노래와 관련해 기억조차 지우고 싶은 아픈 상처가 개입되면 정말 좋은 노래라도 듣는 자체도 극도로 기피하게 되기도 하지요. 가수도 사람이기에 그 가수의 어떤 특정한 일면만 보고 싫어하기도 하더군요. 노래가 정말 좋은데도 TV에 그 가수가 나오면 전원을 꺼버리거나 리모컨을 찾아 채널을 바꾸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느 남편은 제게 “임영웅 때문에 TV를 부셔버리고 싶다”고도 하더군요. 자기 아내(여편네라 하더군요.)가 임영웅이라면 그냥 껌벅 죽는데요. 밥도 안 주고 임영웅 CD를 보는 족족 사서 그걸 보는데 환장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 평생 임영웅이라면 이를 바득바득 갈 겁니다.
▲ 이 글을 써 놓고 미경 누님에게, “누님 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더 좋은 노래 많이 부르시길요. 글 쓰며 누님 노래 듣다 인사드립니다. 아, 그리고 누님 촬영된 사진 가운데 가장 자랑하시고 싶은 사진 3장 정도만 파일로 부탁드려요. 누님의 노래에 대해 글을 쓰려고요.”라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몇 장의 사진을 받았지만 ‥‥‥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방송화면으로 대신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무작정 좋아하는 수준이 아닌, 언제든 가요 프로그램에 모습만 비쳐도 반가운 이들이 있잖아요. 오히려 과도하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면 상처를 받는 이들이 있게 되지만, 잊은 듯 살다 만나면 반가운 얼굴과 이름 말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미경 누님의 노래를 좋아하시더군요.
저야 누님이라 부르니 당연하겠지만‥‥‥. 하루 어울려 음식도 나누고 즐겁게 이야기도 나누며 머문 다음 날, 아침 일찍 옥수수를 손질하고 감자를 깎아 솥에 물을 잡고 소금을 조금 넣어 올렸습니다. 옥수수 위에 깎은 감자를 올려 찐다고 하자, “동생, 감자 그렇게 쪄도 돼요? 우린 씻어서 그냥 찌는데”라 하시기에 껍질 그대로 찌면 감자가 익어도 물렁거리지만, 껍질을 벗기고 찌면 팍신하고 부드럽게 익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침식사를 하고 헤어지며 찐 옥수수와 감자를 차에서 드시라고 챙겨드리자, “동생, 정말 신기하게도 감자가 분이 하얗게 피고 너무 맛있네”라 하셨습니다. 설탕도 안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고 하시며 “다음엔 나도 집에서 이렇게 감자를 쪄야할 거 같아요”라 하십니다. 옥수수 영글고 햇감자 나오면 다시 한 번 모셔야겠습니다. 아, 봄에 점봉산 산나물 시작되면 한 번 오시겠다 약속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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