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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포커스

신뢰할 수 없는 금융과 경제전문가들

by 한사정덕수 2025.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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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프랑 통화, 그리고 그들의 삶은

 

2020년 봄, 저는 스위스에 있었습니다.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휘감고 있던 그 시기,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 보였지만, 정작 가장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던 것은 스위스의 사회적 질서와 금융 시스템이었습니다. 제가 머문 곳은 아르가우주 할뷜(Hallwil)이라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취리히와는 고속도로를 타고 여러 마을과 도시를 지나야 도달할 수 있으며, 승용차로 편도 40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자전거로 3분이면 면사무소에 해당하는 관공서에 도착할 수 있었고, 걸어서 10분 남짓 되는 거리에 있는 역은 열차가 정기적으로 다녔습니다. 마트는 걸어서도 갈 수 있지만 자전거로는 가까운 곳은 5분정도 거리에 있었고, 보다 큰 대형마트는 15분 사이의 거리였습니다. 마을 주변에는 조용한 호수가 있었고, 고성이 몇 군데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풍경은 마치 시간마저도 신중히 흐르는 듯한 질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일상의 질서였습니다. 낙엽이나 정원의 부산물을 처리하려면 반드시 표를 구입해 그것을 부착한 용기에 담아야 했습니다. 처리팀은 지정된 날에 통을 깨끗하게 비운 다음 다시 제자리에 놓고 갔습니다. 의외로 음식물 쓰레기는 따로 수거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집집마다 화단 옆에 놓인, 바닥이 뚫린 자연 분해 통에 잔반을 쏟아 넣는데 위는 조금의 빈틈도 없는 견고한 뚜껑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이 통은 흙 속 미생물이 음식물을 분해하게 하며 날파리나 해충은 접근하지 못하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방식조차 자연에 대한 신뢰, 공동체의 질서에 대한 존중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기 스위스 프랑 환율은 1,180원대까지 떨어졌습니다. 한국 원화는 당시 세계적 혼란 속에서도 스위스 프랑과 일정한 환율 범위 내에서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세계의 눈으로 보았을 때 대한민국은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나라였고, 시장은 그것을 수치로 답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통화가 곧 신뢰이며, 환율은 말없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팬데믹의 위기 속에서도 마을은 절제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먹거리와 난방용품 같은 필수품 외에는 거의 소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농기구나 종자 외에는 거래되지 않았고,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조심스럽게 최소화하며 지켜나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마트보다 비싸지만 작고 투박한 농가 직거래 채소들을 사람들이 더 선호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당근은 작고 흙이 묻어 있었고, 양파와 감자도 볼품없이 자라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상품의 외형이 아니라 그 채소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길러졌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믿음이 신선함의 정의였고, 그것이 바로 소비의 윤리였습니다.

 

스위스를 선택해 환율을 바라본 건 단순한 취향이나 감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달러가 아닌 프랑을 선택했습니다. 달러는 세계 경제의 중심이지만, 그 기반은 군사력과 패권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위폐가 유통되는 통화이며, 미국 정치의 불확실성과 금리의 급격한 움직임에 따라 쉽게 흔들립니다. 반면 스위스 프랑은 군사적 패권이 아니라 제도적 안정성과 사회적 신뢰로 만들어진 통화입니다. ‘힘의 언어가 아닌 믿음의 언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저는 프랑을 선택하는 것이 더 정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스위스는 중립국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중립은 비참여가 아니라 준비된 독립이었습니다. 스위스의 가정집마다 방공호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저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단지 국가시설이나 공공기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개인의 단독주택, 심지어 농가의 지하에까지 방공호가 존재합니다. 방독면, 비상식량, 정수 장치, 의료 키트까지도 기본적으로 비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설은 단지 있어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관리되고, 점검되며, 가족 단위로 사용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대비한다는 철학을 지녔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은 정지된 상태로 멈춰 있는 것이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남과 북은 여전히 휴전선 하나를 두고 대치하고 있으며, 정전협정은 정전이지 평화협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집에 방공호가 없습니다. 비상식량을 비축하지도 않고 방독면 사용법을 교육받지도 않으며, 행정기관조차 공공의 재난 상황에 대한 매뉴얼을 실효성 있게 작동시키지 못합니다. 정작 전쟁의 실상을 체험하고 있는 나라인데, 대비는 부재합니다. 스위스는 전쟁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지만 그 준비는 철저했고, 우리는 전쟁을 직접 겪은 나라면서도 대비는 허술합니다. 이 불균형이 저는 무섭고 낯설었습니다.

그 준비성은 경제 시스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스위스의 금융은 단지 이자와 수익률이 아니라 신뢰자체를 판매하는 구조입니다. 그들은 자산을 보관하는 나라이고 세금을 숨기는 국가가 아닙니다. 그들의 제도는 투명하고 법률은 빈틈없이 작동하며, 권력자는 자신의 자산을 외국에 맡기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스위스 프랑 환율은 계속 상승하여 20254월 현재 1,695원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20225월의 1,281원에서 3년도 안 돼 450원이 오른 수치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그만큼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 와중에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미국의 30년 만기 국채를 약 2억 원어치나 매입했습니다. 원화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수익이 커지는 구조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국가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요. 그는 과거 인사청문회 당시 같은 문제로 비판을 받았고, 국채를 매각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다시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은 실수나 판단의 오류가 아닙니다. 의도적 선택이며 책임을 외면한 신뢰의 이탈입니다.

202544,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전원일치로 인용하자 그날 오후 130, 최상목 부총리는 한국은행 총재 이창용, 금융위원장 김병환, 금융감독원장 이복현과 함께 F4 회의를 긴급 소집했습니다. 금융과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들은 시장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필요시 대응계획에 따라 가용한 안정 조치를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며 국민은 묻습니다. 통화정책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과연 국민을 위한 안정성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들의 자리와 신뢰를 되찾기 위한 형식적 조치를 반복하는가.

특히 F4 회의에 참석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행보는 또 다른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그는 최근 상법 개정안과 관련한 정치적 파장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김병환 금융위원장의 반려와 최상목 경제부총리, 이창용 총재의 만류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야 정치권은 그의 언론 인터뷰와 사의 표명을 정치적 출구전략으로 해석하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금융감독의 책무를 지닌 고위 공직자가 임기 내 처리해야 할 수많은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책임 회피로 읽힐 수 있는 움직임은 결국 또 하나의 신뢰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금융을 감시해야 할 사람이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감정의 메시지를 외부에 흘릴 때, 경제는 불안정해지고, 시장은 동요합니다. 공직자의 자리는 정책으로 말해야 할 곳이며, 언론의 조명을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조정하는 무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이들을 너무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의 통화는 점점 더 믿음을 잃고 세계의 투자자들은 우리가 믿지 않는 통화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됩니다.

국가는 말이 아니라 태도로 신뢰를 증명합니다. 통화는 그 증명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통화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왜 그들은 우리 통화를 믿지 않았으며, 왜 우리는 그들의 거짓을 이토록 오래 참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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