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언어로 계절을 건너는 길
봄이 오면 언제나 그렇듯 시인 윤동주가 생각납니다.
조만간 창문을 스치는 바람에 잎이 떨리고 오후의 빛이 방 안 가득 번질 때면 그의 시 한 줄이 조용히 떠오를 것입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문장은 시대의 고통과 한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품으며, 해가 바뀔수록 더 맑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2025년은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여든 해가 되는 해입니다.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광복을 몇 달 앞두고, 그는 조국의 하늘을 끝내 다시 보지 못한 채 스물일곱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오랜 시간 그의 사인은 ‘뇌일혈’로 알려졌지만, 2009년 미국 국립도서관에서 공개된 전범재판 문서는 그의 죽음이 일제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드러냈습니다. 한 시인의 죽음이 아니라, 시대의 고백이자 늦은 증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 윤동주는 죽음조차 시로 이겨낸 사람입니다. 그의 시는 어둠 속에서 내민 한 줄기 불빛이었고, 침묵 너머 건네는 참다운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자신을 깎아내며 써 내려간 문장들 속에 그는 끝까지 인간의 존엄과 언어의 가치를 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동시에 일으켜 세웁니다.
스타북스에서 펴낸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윤동주의 시 126편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생전에 발표한 시와 유고작까지 아우른 이 책은 시인의 사유와 삶을 따라가는 가장 온전한 길잡이입니다. 단어 하나, 마침표 하나에도 오래 머물게 되는 이 시집은 그의 맑은 영혼을 지금 우리 곁으로 조용히 불러냅니다.
이 시집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감상은 「윤동주의 시집, 다시 손에 들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스타북스 판본)을 읽고」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스타북스 판본)을 소상하게 밝힌 이 글은, 시인이 남긴 언어가 가진 맑음과 절망, 그리고 다정한 희망의 밀도를 그를 기리는 많은 이들의 다양한 글들과 함께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했습니다.
또 하나, 『윤동주 전 시집 필사북』은 독자에게 특별한 독서 경험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따라 써보는 일입니다. 시인의 문장을 한 글자씩 옮겨 적다 보면 어느 순간 그의 호흡과 마음의 속도가 손끝을 타고 전해집니다.
필사는 침묵 속에서 자신을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빠르게 읽을 땐 스쳐 지나갔던 문장들이, 손으로 써 내려갈 때 비로소 마음속에 닿습니다. 비로소 시는 감상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되새김의 행위이자 되살림의 의식으로 거듭납니다. 그 순간, 윤동주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앉아 조용히 말을 건네는 이가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주 오래전 자신 안에 숨겨두었던 문학소년, 문학소녀의 꿈을 다시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단어 하나에도 가슴이 뛰고 시 한 줄에 무한한 세계를 그리며 열정을 느끼던 그 시절의 마음. 현실에 치여 잊고 지냈던 그 투명하고 다감한 감수성이 윤동주의 문장을 따라 걷는 동안 다시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누군가는 필사의 자리에서 조용히 자신의 첫 시를 꺼내들지도 모릅니다. 윤동주의 시를 따라 적어가다 어느새 자신만의 시를 쓰기 시작하는 그 순간, 한 줄의 시가 한 사람의 생을 깨우고 그 생이 또 다른 이에게 건네질 시가 되어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문학은 언제나 그렇게… 손에서 손으로, 그리고 숨결에서 숨결로 이어집니다.
시인 윤동주의 시는 오늘도 무대 위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1938년 북간도에서 동지이자 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경성으로 온 청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서 외솔 최현배 선생의 조선어 강의를 들으며 우리말과 우리글, 우리 정신의 소중함을 배워갑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혼돈 속에서 그는 많은 것을 빼앗기고, 절필과 시 쓰기를 반복하며 고뇌합니다.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 윤동주, 달을 쏘다.』는 이러한 윤동주의 내면과 삶을 무대 위로 불러옵니다. 2012년 초연 이후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 작품은 윤동주 서거 80주기와 광복 80주년을 맞아 더욱 깊은 울림으로 돌아옵니다. 2025년 5월 9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되며, 연출에는 『사일런트 스카이』,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 등을 연출한 김민정이 맡고, 안무에는 조인호, 무대디자인에는 이엄지가 참여합니다. 윤동주 역에는 김용한, 송몽규 역에는 윤태호가 출연하며, 이한수, 이기완, 이혜수 등 서울예술단 단원들이 함께 무대를 채웁니다.
시가 움직임이 되고 언어가 음악이 되어 피어나는 무대, 그것은 윤동주라는 한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자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 다시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언어로 살아가고 있는가?”
윤동주 시인은 시로 살았고, 시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를 통해 그를 다시 불러옵니다.
그의 시 한 줄이, 내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그의 생 한 줄이, 나의 시간 속에서 숨 쉬기를 염원하며 말입니다.
그렇게 2025년 봄은 또 한 번 윤동주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다시 시를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윤동주를 기억합니다. 제가 이 수필로 그를 떠올리듯, 누군가는 서평으로, 누군가는 독후감으로, 또 누군가는 그를 위한 추모시로 자신의 목소리를 더할 것입니다. 그의 언어가 시간의 벽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왔듯,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다음 세대에게 건넵니다. 시로, 글로, 무대로.
이 모든 기억과 시, 문장과 움직임들이 어우러질 때 우리는 하나의 ‘윤동주 에디션’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집으로 그의 언어를 읽고, 필사북으로 그의 사유를 따라 쓰며, 무대에서 그의 삶을 바라보는 이 구성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선 특별한 ‘참여의 기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수필은 그 기억을 잇는 조용한 한 조각으로, 시인을 사랑한 누군가의 사적인 사유이자 공적인 기념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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