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랑의 불로
우리는 불을 알아버렸네
무엇이 타고, 무엇이 남는지를 본 눈
무너진 지붕 아래서도 별을 기억한 눈
누군가는 “끝났다"고 낙담했지만
우리는 그 불꽃 속에서 시작을 보았네
불은 묻지 않았네
이 흙이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품었는지
이 마당의 웃음이 몇 겹의 세월을 지나왔는지
그저 삼키고, 그저 태우고
그저 지나갔을 뿐
그러나 불은 몰랐다.
그대가 남은 자가 아니라
버티고 선 자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꺼지지 않았네
잿더미는 무너짐이 아니라 뿌리의 언어
모든 끝은 다음의 시작이며
불탄 자리는 우리가 다시 태어날 무대라네
벽이 사라진 날 우리는 서로를 집이라 불렀고
그늘이 없던 날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주었네
그대의 손에 들린 작은 삽 하나, 못 하나
그것은 선언이었네, 나는 다시 짓겠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살겠다는
그래서 우리는 멈추지 않았네
상실은 가르쳤네
무너짐은 곧 쌓음이라는 진리를
불은 태웠으나 우리를 꺾지는 못했네
우리는 누구인가
기억의 재를 품고, 내일을 짓는 사람들
불 앞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대신
돌을 들고, 흙을 뒤집는 사람들
쓰러지지 않고, 무릎 꿇지 않고 끝끝내 서 있는 사람들
불의 나라에서 우리는 다시 이름을 부르고
다시 문을 세우며 또, 다시 불씨를 살리려네
이번에는 사람과 사랑의 불로
상처를 덮고, 삶을 지키는 불로
잊지 않고 다시 껴안는 불로
우리가 우리를 다시 희망을 밝히는 불로.
한 줄의 시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저는, 그 시작이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무언가를 창조해낼 손끝이 먼저였고, 가슴이 아닌 어깨에서부터 울림이 올라왔습니다.
사실 기억은 무겁고, 말은 머뭇거렸으며, 언어는 때로 너무 멀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어가 아니라, 그저 다른 어떤 고민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손이 문장이 흐르듯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말의 결과라기보다, 다시 살아보려는 손의 고백에서 태어난 기록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과 사랑의 불로」는 불에 대한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쓰며, 불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건 불은 모든 것을 삼키기도 하지만, 어쩌면 다시 피워낼 수 있는 씨앗의 열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불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 땅에 쌓인 웃음이 몇 겹의 계절을 지나왔는지, 그 집의 벽이 어떤 바람과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불은 그저 삼키고, 그저 태우고, 그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불은 몰랐습니다. 그곳에 남은 이가 단지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사실을 저는 분명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상실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으려는 다짐의 문장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무너진 자리 위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삽을 들고, 못 하나를 쥐고 “나는 다시 짓겠다”고 말하는 순간을 저는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 순간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선언이었으나 그 고요한 결심만큼은 제가 살아오며 본 그 어떤 외침보다도 강하게 가슴에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주고 싶었습니다.
삶은 무너질 때마다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여기서 끝내겠느냐고요. 저는 그 물음 앞에서 항상 작아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한 줄의 시라도 써야 했습니다. 그 한 줄이 저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기도의 시가 아닙니다. 눈물과 탄식을 외는 시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흙을 들고, 돌을 짚고 다시 문을 세우는 사람의 움직임을 그린 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불’로 닫지 않고, ‘사람’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사람이 지키는 불. 사람이 품는 불. 사람이 껴안는 불. 그 불이 있어야 다시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타버렸을 때에도 불은 모든 것을 다 태우지는 못했습니다. 한 줌 남은 불씨처럼 버텨 서 있는 사람 하나. 저는 그 사람의 흔들리는 어깨에서 이 시의 첫 문장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문장을 떠올리며 삶의 끝에서 다시 시작을 짓는 분들게 이 시를 조심스럽게 건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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