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령!
누군가 물었다.
“오색에도 한계령 말고 또 다른 고개가 있어요?”
아마도 한계령의 또 다른 이름을 묻는 걸까?
그렇다면 ‘한계령을 한동안 오색령이라 부른 적이 있었고, 소솔령이나 소동라령으로도 불렸다고 한다.’고 말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은 대개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나에게 한계령(오색령)은 단순히 여행길의 목적지나 여정의 한 부분에 그치는 곳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곳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
삶의 이유가 되고, 존재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런 특별한 대상 말이다.
나에게 한계령은 그렇다.
험난한 길을 걸어온 세월을 묵묵히 지켜봐 준 증인이며,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그리고 여전히 한이 서린 곳이면서도, 행복이 깃든 곳이며, 동시에 아직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계령을 따라 내려오면, 남대천이 있다.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듯, 남대천은 이 고장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영원히 회귀를 꿈꾸게 하는 모천이다.
이 강은 대청봉과 한계령, 점봉산, 구룡령과 오대산자락 법수치 위의 수많은 샘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 결국 동해로 닿는 물줄기의 도도함은, 삶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울림을 전해 준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과 깊은 인연을 맺은 또 하나의 고장이 있다.
바로 인제.
남대천이 흐르는 양양과 마찬가지로, 인제 역시 대청봉과 서북주릉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물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줄기가 모여 원통을 지나고, 인제를 지나며 강이 되어 흐른다.
이곳은 나에게도 의미가 깊은 곳이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머니와 형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릴 적부터 너무나 익숙했던 이름, 인제.
한계령을 경계로 마주한 두 고장, 양양과 인제.
이 두 곳과 내가 어떤 인연으로 얽혀 있는지는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18살의 나에게 찾아왔던 한 편의 시가 어떻게 ‘한계령’이란 노래로 태어나게 되었는지—
그 기억을 더듬어,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1.
1969년 초봄, 한계령 아래 작은 산골 마을은 아직 진달래가 피기 전이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낮에는 그만큼 포근한 기운이 돌았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외가 쪽 식구들이 가까운 곳에 사는 이모할머니 댁에 모여 있었고, 어머니는 그곳에 불려가 있었다. 저녁밥이 늦어지는 것이 불씨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마흔두 살이었다. 원래 성정이 거칠고, 불의한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을 쉽게 삭히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항상 화가 많았고, 집안에는 고요한 날이 드물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는 평소보다 늦게 돌아왔다. 아버지는 표정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다. 늦어진 저녁밥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모할머니와 어머니의 친정 식구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 어머니가 오랫동안 붙잡혀 있었던 것이 아버지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날 오후, 이모할머니는 어머니를 불러내며 말했다.
“정규화, 성질 좀 고쳐야겠다. 오늘도 뭐라 하면 아주 단단히 혼쭐을 내야 해.”
이모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여기저기 심부름을 시켰고, 어머니는 좀처럼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난 어렸지만 불안했다. 이제 그만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 저녁준비를 하면 좋겠는데 이모할머니는 얄밉게도 자꾸 어머니를 붙잡고 뭔가를 시켰다.
차라리 아버지를 누군가 가서 이모할머니 집으로 오라고 해서 저녁밥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지고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서야 어머니는 종일 일을 한 탓에 지친 몸으로 동생을 엎고 집으로 향했다.
“밥을 먹고 가지?”
이모가 말했고, 외할머니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애들 아버지 저녁을 해야 돼요.”
어머니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있던 장수를 불러 손을 잡고 앞장섰고, 난 불안하지만 오늘은 아무 일도 안 생겼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며 어머니 뒤를 따랐다.
늘 그랬듯, 어머니가 그들과 얽히면 아버지는 기분이 상했다. 어머니가 돌아온 순간,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처음에는 짧은 말이 오갔다. 하지만 말이 길어질수록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결국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화를 폭발시켰다.
찬장이 부서지고, 살림살이가 나뒹굴며 집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나는 구석에 웅크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네 살 난 남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막내 여동생은 젖을 물고 있다가 놀라 엉엉 울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몸을 움츠린 채 서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집안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움직였다. 아버지가 잠시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어머니는 집을 떠났다. 이웃 아주머니들이 속삭이며 말했다.
“인자, 엄마는 잠시 피하다 들어오면 된다. 아저씨 지쳐서 잠들면 그때 들어오라지.”
어머니는 처음엔 단순히 피신하려던 듯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사라지자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찾아 나섰다.
어둠이 깔린 마을 곳곳을 뒤졌지만, 어머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를 숨길만한 곳을 찾던 중, 몇몇 사람들은 순자네 집 방 하나가 수상하다고 말했다. 그 방만 유독 조용하고, 어딘가 눌린 기운이 감돌았다며 다시 한 번 가보자고 했다.
어머니가 떠난 지 한 시간쯤 지나 아버지와 몇 사람이 순자누나네 집으로 향했다. 그때, “얘네들 밥은 멕여야 되잖아?”
아주머니 한 분이 말했다.
“우리가 왜. 걔네 아버지 있잖아. 난 안 해. 집에 갈래요.”
옆집 영학이 엄마가 그렇게 말하고 영학이를 데리고 나갔다. 개울 건너 이웃집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를 챙겨주었다.
아버지와 사람들은 그곳을 확인하러 갔다. 하지만 순자네 가족은 단호히 거부했다.
“거긴 노모가 아파서 누워 계시고, 다 큰 딸들이 자는 중인데 어딜 문을 열어본다고 하냐?”
그렇게 말하며 강하게 거절했다. 어른들은 더 이상 강하게 요구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사람들은 더 따져 묻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처음엔 어머니가 몸을 피하러 나갔다고 생각했지만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여섯 살이었던 나는 겨우 철이 들 무렵이었고, 동생들은 아직 어머니의 품이 절실한 나이였다. 어머니가 왜 떠났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우리는 그리움과 원망 속에서 살아야 했다.
사흘 뒤, 아침밥을 먹고 난 후였다. 아버지는 뒤뜰에서 몇 가지 목수연장을 꺼내놓고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혼자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아버지였지만,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집 앞 개울가에서 막 꽃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진달래와 활짝 핀 버들가지를 만지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징검다리가 놓인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니 순자누나가 비탈을 내려서서 막 개울을 건너오려고 했다.
순자누나는 어머니가 인자를 업을 때 쓰던 끈이 달린 포대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 포대기는 어머니가 집을 나설 때 인자를 업고 나갈 때 쓴 거란 걸 알기에 순자누나가 막내 여동생을 업고 개울을 건너오고 있다는 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아직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아버지, 인자 온다!”
아버지는 그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막내는 졸린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우리 집 마당에 다다랐을 때 잠에서 깨어났다. 돌 지난 여동생 인자는 우리가 낯설다는 듯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온몸을 뒤덮는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머니는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여동생은 돌아왔다.
나는 여섯 살이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볼 방법도 없었고, 어머니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가 떠난 후, 젖을 먹던 인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인자는 배가 고프면 울었고 나는 그 울음소리가 두려웠다. 어머니가 없는데 젖을 찾으며 우는 인자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른들은 각자의 일에 바빠 보였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저 인자가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손을 뻗어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달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 가족의 빈자리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늦가을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인제군의 어느 마을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큰형에게 여비를 쥐어주며 어머니를 찾아 함께 돌아오라고 했다. 1969년의 한계령엔 차가 다니지 않았다. 형은 오색을 출발해 양양 읍내까지 걸어 나가야 했고, 속초로 이동한 뒤 진부령을 넘어 인제로 가야 했다. 왕복 여비와 사흘간의 끼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마련한 돈이 충분했을지 의문이었다.
형이 떠난 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문을 열고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 건너 소나무가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언제쯤 형이 어머니를 데리고 돌아올까. 남동생도 놀다가도 어머니를 찾았고, 막내는 배고픔에 울다 지쳐 잠들곤 했다. 그런 동생들을 보며 차마 함께 울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울음은 허락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사흘이 지나고 흐린 저녁, 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마을 어귀 소나무가 있는 그 길을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형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엔 어머니가 없었다. 형의 걸음은 무겁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형은 아무 말 없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묻지도 않았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이내, 형의 울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찾지 못했어… 아무리 찾아도…”
형은 이틀 동안 인제의 이곳저곳을 헤매며 어머니를 수소문했지만, 어디에서도 어머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울며 말했다. 나도 함께 울었다. 막내는 우리가 우는 것을 보고 덩달아 울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날 밤,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마당의 흙먼지가 일었고, 처마 밑에서 바람이 긴 울음을 토해냈다. 형의 울음이 가라앉고 동생들의 숨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나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없는 집.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한 방 안. 우리는 그날, 그렇게 또 한 번 어머니 없는 밤을 받아들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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