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혼자 가끔 들려 쏠쏠하게 맛과 정을 느끼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염치를 아는 동물인지라 한 번 정도는 여럿의 입에 오르내려도 좋은 음식점 한곳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양양의 작은 포구인 수산항에 ‘수산회집이란 물회를 전문으로 하는 회집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포털 다음(daum)에서 “다음 지역정보 서비스 ‘시티N’”을 론칭하며 선발한 리포터로 활동할 때였습니다.
겨울이면 수산항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딱 여름 한 철 근처 오산해변이나 동호해수욕장을 찾는 이들을 상태로 잠깐 성수기를 맞을 뿐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한산한 작은 포구였었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도 손님이라곤 한 팀도 없었고, 주인 혼자 주방으로 연결된 온돌이 깔린 가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른 세 명에 아이들 둘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아이들은 전복죽을 부탁하고, 우린 물회를 준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이 집을 소개해도 괜찮겠다 싶어서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주방으로 들어간 주인을 따라가 “글을 쓰려고 하는데 사진 좀 찍겠습니다”라 했습니다.“어디에 쓰는 글이죠”라 주인이 묻기에 “다음 지역정보 서비스 ‘시티N’”에서 제공한 명함을 주며 “이곳에 소개할 겁니다”라 했습니다.
어쩌면 주인은 다음이란 제법 알려진 포털의 로고가 선명한 옷을 입고 명함까지 내미니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크고 싱싱한 사과와 배, 그리고 오이와 양파, 대파까지 담긴 채반을 꺼내며 “저는 이런 재료들만 골라서 구입해 물회를 제공하려고 애씁니다”란 말을 하더군요. 저야 당연히 그런 믿음이 있기에 한산한 줄 알면서도 허름한 그 회집을 찾아갔지만 동행은 영 못 미더워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그때 동행이 한 말이 “이분 상당히 유명한 시인이신데 방송에서 이분이 쓴 글을 자주 이용해 음식점들을 소개하는 걸 봤어요”라 추임새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일주일 안에 3대 방송사는 물론이고 케이블TV까지 모두 여길 취재하겠다고 찾아 올 겁니다“라 했으니…
그리고 그해 고성의 명태와 울진의 대게 등 제법 굵직한 프로젝트를 기획해 글을 쓰며 활동을 했고, 본사 도규덕 팀장은 수시로 연락을 해 올 정도로 성공적인 듯 했습니다. 하지만 20명이란 전국에서 선발된 이들이다 보니 말썽이 생기는 걸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관리자도 아닌데 중재를 부탁하는 이도 있었고… 말렸지만 하루가 다르게 정도가 심할 정도로 분쟁은 커지기만 하더군요. 분쟁의 소재란 “동네 포장마차도 모두 맛집이냐”에서 시작해, “추천과 댓글이나 하며 다니면서 되도 않는 글로 기본에 더해 추가 보상금까지 타내냐”는 거였습니다. 정말 환멸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다들 그렇게 다투며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다면 난 이 활동 안 하겠다”고 말하고 그길로 서울로 가서 봉재공장을 작게 시작했습니다.
그해 가을 한가위에 집에 왔을 때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수산항으로 갔는데 한산할 줄 알았던 수산회집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더군요. 안에서 한 팀이 나오면 밖에 선 줄에서 한 팀이 들어가기를 거듭하는 동안 제 자식들까지 줄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라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멀지 않은 바다에 가서 30분 정도 놀다 전화를 하면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지금 다시 경북대 4학년으로 복학하는 딸이 막 네 살이 되었으니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이윽고 순서가 되어 들어가려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려다 문득 “안에도 줄이 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할 생각으로 안쪽으로 들어서서 보니 예상대로 방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까지 줄이 쭉 이어져 있었습니다. 참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이들은 바다에서 놀면서도 아빠를 수시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 앞에 3팀 정도가 더 있는데 누군가 자그만 손이 제 손을 잡더군요. 딸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먼저 들어와 아빠 손을 잡은 겁니다. 아내는 2살 된 아들을 안고 사람들 사이를 양해를 구해가며 들어오는 중이었고요.
이제야 ‘이윽고’란 말이 어울립니다. 방으로 들어가 채 정리되지 않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일하는 사람들도 이전과는 다르게 아주 많아졌고, 모두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테이블을 치우고 제법 큰 뚝배기에 가득 담긴 미역국을 먼저 가져다 준 직원이 “뭘로 하시겠어요”라 묻더군요. “전복죽 하나 하고 물회 둘요”라 하는데, 아내가 “아이들 전복죽 안 시켜도 돼요. 밥을 미역국에 말아주면 잘 먹어요”라 하더군요. 직원은 더 묻지도 않고 곧장 “알겠습니다. 곧 준비하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향했고, 딸과 아들은 수저를 들고 뜨거운 미역국을 곧장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았던지 직원은 밥 두 공기를 몇 가지 반찬과 회나 먹어야 내줄 ‘스끼다시(付け出し:つけだし tsukedashi 우리말로는 밑반찬으로 사용하라지만 그러기엔 무리가 있고 전채요리로 써야 될 거 같은)까지 내왔습니다. 그 직원 마음씀씀이가 정말 남다르더군요.
아내와 저는 물회와 함께 나온 국수를 먹으려는데 딸과 아들이 국수를 미역국에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직원이 또 들었는지 국수사리가 담긴 접시를 하나 더 가져다주더군요. 아내도 미안했던지 “저기요.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잔은 하나고요”라 했습니다. 아이들이 있어서 술을 안 마시려했는데 식사를 할 때 곧잘 술을 즐기는 저를 위해 직접 술을 주문하더군요. 그리고 아내가 소주를 한 잔 따라주고 소부병을 제게 내밀며 “여기 음식도 잘 하지만 직원이 정말 친절하네요”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딸이 “아빠 이름 저기 있다”고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키더군요. 정말 겨울에 이곳을 “다음 지역정보 서비스 ‘시티N’”에 소개하려고 사진촬영을 할 때 주인이 “성함이나 기억하려고 합니다”라며 종이에 펜을 주어 썼던 제 이름이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있었습니다. 급하게 써서 엉망인 글씨는 정말 부끄럽게 만들더군요. 그런데 4살이라고 해봐야 고작 3년하고 8개월 된 딸이 글자를 읽을 줄 안다니 놀라웠습니다.
마루에서 통로에 벗어놓았던 신발을 신고 아이들 신발을 챙겨 신기는데 “아니 이거 정덕수 선생님 아니십니까? 오셨으면 저를 찾으시지요. 얼른 들어가세요 자리가 이젠 여유가 있을 겁니다”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오후 2시가 넘어 길게 줄을 썼던 손님들이 이젠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에서 식사를 하는 손님과 막 나서려는 우리 가족만 있었는데 주인은 이제 막 들어가려는 줄 오해를 한 모양이었습니다. 먹고 나가려는 중이라고 하자 한사코 그럴 수는 없다며 다시 들어가라고 막아섰습니다. 결국 다시 안으로 들어가 방금 전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습니다.
잠시 뒤 수산회집 주인은 광어와 우럭을 회를 떠 커다란 접시에 올리고, 다른 접시엔 전복을 가득 담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막 치운 테이블엔 가득하게 전채요리가 차려졌습니다. 명절이라 좋은 술이 선물로 들어왔다며 중국술도 한 병 가져와 자리에 앉더군요. “이거 과합니다. 방금 제대로 먹고 막 일어서는 중인데 한사코 붙잡으시니 인사나 나누려고 다시 앉기는 했지만 이러실 줄 알았으며 그냥 갔습니다”라 하자, 안주로 좀 드시고 남으면 전복죽도 끓이라 했으니 모두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드세요“라 하니 어쩔 수 없이 아내는 전채요리를 아이들과 먹고, 저 또한 삶은 골뱅이 몇 개로 술 한 병을 모두 비우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 시인님이 다녀가시고 나흘 뒤 정말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촬영을 하러 갔으면 하는데 괜찮겠느냐 하더군요. 저야 뭐 한가할 때라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는데 그들이 와서 물회와 수족관에 있는 생선도 회로 준비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촬영을 해가고 바로 다음 날 다른 곳에서 또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렇게 방송이 나가고 그 다음엔 귀찮을 정도로 연락이 오더군요. 말씀하신 대로 요리와 맛집을 다루는 방송이란 방송은 모두 왔었습니다. 이젠 이렇게 명절에도 쉬지 못하고 가게 문을 엽니다. 정 선생님 덕분입니다.”
수산회집은 그 뒤로 7년 정도 잘 운영을 하다 주인이 건강이 안 좋아지며 마침 회집을 하겠다고 하는 이에게 좋은 가격을 받고 넘기고, 주인은 요양을 하며 작은 요트를 하나 구입해 소실한다고 양양읍내에서 만났을 때 말을 하더군요. 사실 저는 요리와 맛집에 대해 책임을 지지 못할 글은 쓰지 않습니다. 아무 음식점이나 식사를 하면서 사진촬영을 해 맛집이라고 하고, 때로는 자신이 유명한 블로그를 운영한다며 음식점 주인에게 협박하고 돈까지 뜯어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참으로 비겁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음식점을 이곳저곳 다니지는 않습니다. 더러 자신의 가게를 오라고 말을 해도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믿음이 가는 음식점만 다니는데, 2023년 봄에 처음으로 자주 들리는 음식점이 아닌 다른 음식점을 한 번 들리게 되었었습니다. 물론 다른 음식점보다 가까운 위치였기도 하지만 ‘양양 소락’이란 음식점으로는 좀 독특한 상호가 궁금증을 유발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소락이란 말이 ‘蘇酪’이라면 중국어로 (sawo chijeu:사워 치즈)가 되는데 차조기를 발효한 유즙 정도로 뜻을 풀이하면 될까요? 아니면 小樂으로 한다면 작은 즐거움 정도로 음식을 먹는 즐거움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을 겁니다. 이 뜻을 아직 양양 소락의 주인이신 유병환兪炳丸님께나, 임명희 사모님께 묻지는 않았습니다.
요리를 직접 하시는 유병환님은 명함이 없으시고 사모님께서 명함을 사용하시는데 성함을 밝히실 때 반드시 한자를 먼저 쓰시고 그 밑에 한글로 성함을 적으십니다. 김씨나 이씨와 같이 성씨가 한자漢字를 하나만 쓰는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유씨는 劉, 兪, 庾로 각각 다른 한자를 씁니다. 여기에 더해 류씨도 있는데 柳로 한자를 쓰지요.
정씨 성은 본은 김씨나 이씨처럼 정말 많지만 한자로는 정약욕, 약전 형제분의 직계 후손들이 쓰는 丁자와 저와 같은 鄭자를 성씨로 사용하니 한글로는 같아도 전혀 다른 갈래의 성씨입니다. 때때로 “어떤 정씨세요”란 질문을 받기에 유영환님의 한자로 성함을 적으시는 모습이 십분 이해됩니다.
그해 겨울이 시작될 때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셨는데 “한 번 들리세요”라 하셔서 “참 기억력 좋으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시다가도 눈이 마주치시면 손짓으로라도 인사를 하시는 분이니 그만큼 기억력과 친절이 몸에 밴 분이시란걸 알 수 있습니다. 그날 저녁 밖에서 일을 보고 날씨가 살살하기도 하고, 저녁식사도 아예 뜨거운 국물이 있는 음식으로 했으면 싶어서 낮에 인사를 나눈 기억도 떠올렸고, 마침 머물던 장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이라 8시 무렵 들렸습니다.
양양은 사실 저녁 7시가 넘으면 식사를 할 음식점이 그리 많지도 않습니다. 최근에야 8시 이후에도 식사를 할 수 있는 음식점을 3곳은 거의 확실하게 문을 열었다고 확신하지만, 그 시간이면 대부분 문을 열어두었어도 더 이상 식사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그날 양양 소락엔 두 테이블에 손님이 계시더군요. 젊은 여성분들이 주로 어울린 두 테이블인데 한 테이블은 6명 중에 남자분이 한 분 있었고, 다른 테이블은 여성분만 네 분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4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차림표를 보는데 손님에게 드릴 음식을 가지고 주인께서 나오시더군요. 여섯 분이 앉은 테이블에 두 번에 거쳐 음식을 내시고서야 제게 “낮에 한 번 들리시라 했는데 오늘 오셨군요”라며 “혼자 오셨나요”라 물으셨습니다. 저는 “소주 한 잔 곁들여 저녁식사를 하고 들어갈 생각으로 들렸습니다”라 했습니다.
“술을 한 잔 하신다면…”이라 말씀을 하시고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아직 저희 가게에서 다른 음식은 안 들어보셨으니 오늘 제가 안주를 하시게 오삼불고기 조금 해 드리죠. 그리고 뚝배기불고기에 식사를 하시면 되겠네요. 기다리세요”라 하시곤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한 끼 음식과 술을 먹으러 찾았는데 주인은 거기에 정성精誠과 넘치는 정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음식은 단순히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달래주는 것이다.(Food is not just about providing energy; it is about nourishing the soul.)”에 대해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의 “요리는 사랑의 행위이며, 선물이다.(Cooking is an act of love, a gift.)”로 답을 하신 겁니다.
쟁반에 계란찜과 월동추된장무침, 도라지무침, 감자조림, 오징어채볶음과 소주를 먼저 내 주시며 오삼불고기를 준비한다며 주인은 소주 한 잔을 받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넣고 계란찜을 젓가락으로 조금 잘라 맛을 보는데 정말 생각보다 맛있더군요. 이번엔 소주 한 잔 마시고 월동추된장무침을 먹고… 어느 반찬이고 모두 다 맛이 좋았습니다. 그때서야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 이미 주인이 한 잔 마시고 한 잔 더 받아 놓은 상태라 소주병은 비워졌는데 주인은 주방에 들어갔으니 직접 한 병 가져오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때 주인이 소주 2병을 오삼불고기와 함께 우거지탕을 국그릇에 한 그릇 담아 내오더군요.
“반찬이 맛이 있습니다. 그 바람에 이미 소주 한 병 비웠습니다”라 하자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맛있다고 하시니 고맙습니다”라고만 하더군요. 주인도 마주 앉아 소주 2잔을 마시는데 손님이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인원이 좀 많더군요.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편한데 앉으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들어 온 손님들은 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3팀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주인은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들어갔으니 혼자 독작獨酌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집은 김치는 아예 없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이 손님들에게 물병을 가져다주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저 사장님 혹시 김치는 좀 없나요”라 물었습니다. “김치를 가져와야 되는데 오늘은 손님이 거의 안 계실 줄 알고 내일 출근하며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총각김치를 담그긴 했는데 사흘 되었으니 맛이 들었을지 모르지만 가져다 드리죠”라 하고 잠시 뒤 총각김치를 가져다주고 빈 소주잔을 채워주더니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기… 아저씨, 그 오징어와 삼겹살 볶은 거 맛있나요?”
옆자리에 앉은 3명의 여자들 중 한 여자가 물었습니다. “아직 저도 맛을 안 봤는데 궁금하시면 드셔보세요”라 대답했고, 여자는 젓가락을 챙겨 다가와 한 젓가락 집어 먹더군요. “야, 맛있다. 우리 이것도 추가해서 한 잔 하자. 어차피 낼 날이나 밝아야 어디 구경 갈 거 아니니”라며 함께 앉은 여자들에게 말을 하더군요. 그때서야 저도 오삼불고기를 맛을 보았습니다. 적당히 매콤하면서도 거부감 없게 단맛이 조화를 이루었더군요. 이 단맛, 설탕이나 물엿(올리고당)은 분명 아니라 느껴졌습니다. 그건 감자조리이나 오징어채볶음에서도 느꼈던 맛… 아니 그와 같은 느낌입니다.
주인이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기에 주방 앞으로 가서 접시를 하나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접시를 받아 자리로 돌아와서 오삼불고기를 절반 조금 넘게 나눠 옆자리에 건네주며 “술은 뭘로 가져다 드릴까요”라 물었습니다. “아저씨 드시는 소주가 뭔지 그걸로 주세요”라 하더군요. “강원도는 원래 경월이었는데 요즘은 경월이라 안 하고 처음처럼이라고 합니다. 저는 당연히 이 처음처럼을 즐깁니다. 그 이유는 술부터 가져다 드리고 말씀드리지요”라 하고 주방으로 가서 “처음처럼 2병하고 소주잔 3개 가져갑니다”라 하고 냉장고에서 소주 2병과 잔 3개를 챙겨 작은 쟁반에 올려 옆자리에 가져다주고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앉았습니다.
소주잔을 들어 마시려는데 옆자리에서 먼저 말을 붙였던 여자가 “소주 주시고 말씀해 주신다면서요. 처음처럼만 드시는 이유를요”라 합니다. “아. 그렇죠. 그리고 일단 소주 2병을 드렸는데 다 안 드시면 여기 사장님에게 반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처음처럼은 글씨를 쓰신 분이 쇠귀 신영복 교수님이십니다. 저는 미루다 기회를 놓쳤습니다만 제가 잘 아는 아우는 교수님을 자주 찾아뵙고 서예 작품도 여러 점 선물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아우가 신영복 교수님 생전에 정말 귀한 선물을 몇 개 저한테 했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책들인데요. ‘처음처럼’을 2007년 출간되자 곧장 가지고 왔고, 그 다음엔 ‘변방을 찾아서’를 이곳까지 가지고 왔더군요. 그 다음엔 2017년 3월에 광화문에 있을 땐데 ”형한테 선물도 할 거가 있고 식사도 함께하려고 들렸다며 왔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선물로 준 책이 ‘영인본 신영복의 엽서’입니다. 그런 아우가 한 말이니 분명 사실일겁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너무 지루하겠다 싶어서 옆자리 여자의 표정을 살폈습니다. 술잔을 손에 쥔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론이 길었지요?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처럼을 경남지방처럼 아예 타 지역 소주를 팔지 않는 고장이 아니면 고집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말입니다. 신영복 교수께서 돈을 받고 작품을 파시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런데 경월을 인수한 두산에서 그린을 생산하다 디자이너 손혜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처음처럼을 그린소주의 리뉴얼을 하며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손혜원은 소주의 브랜드명으로 성공회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계시는 신영복 교수님의 처음처럼 서체를 사용했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사례를 하려고 했지만 한사코 ‘처음처럼을 돈을 받고 팔 수 없다’시며 한사코 거절을 하셔서 처음엔 성공회대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한 병당 얼마씩 모아서 꾸준히 강원도의 장학금으로 기부를 이어오고 있다고 듣고도 제가 강원도 사람이니 다른 소주를 마실 수는 없는 일이죠”라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처럼은 크로스포인트의 대표인 디자이너 손혜원이 제안해 만든 것으로, 손혜원은 ‘처음처럼’이라는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교수의 글귀가 아주 마음에 들어 브랜드명으로 사용하고 싶어하였다고 합니다. 그린소주의 리뉴얼을 준비하고 있던 생산자인 두산에 ‘처음처럼’을 새로운 브랜드명으로 사용할 것을 권유하였고, 두산은 ‘처음처럼 목 넘김이 좋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처음처럼을 그린소주의 새로운 브랜드명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훗날 확인을 한 결과 성공회대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한 것도 사실이고, 신영복 교수께서 사례를 받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옆 자리엔 이것저것 물어왔고 저는 간간이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 주인이 함께 자리에 앉아 소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옆자리에선 자신들이 먹으려고 주문한 오삼불고기를 그대로 제게 양보를 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고 꼭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단맛은 나는데 반찬이나 이 오삼불고기나 모두 그 단맛이 거부감이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음식 단걸 대체로 싫어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이죠.
주인은 제가 질문을 하는 말을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잠시 뒤 그는 매실액을 한 병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이 매실로 유명한 광양이라고 하더군요. 집에서 매실농장을 하는데 거기서 매실액을 담아 가지고 와서 요리에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들고 온 매실액을 제게 선물을 하겠다며 가지고 가라더군요. 마침 저도 자연산 산나물에 대한 글을 쓰던 중이라 샐러드에 드레싱 소스를 만들 때 매실액을 사용하면 좋겠다 싶어 거절하지 않고 받았습니다.
양양 소락에 대해 음식 이야기를 쓴다고 시작했는데 이미 너무 길어졌습니다. 자세한 음식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되겠군요. 양양 소락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양양읍 양양로 46. 1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가게 내부는 깔끔하고 청결하며, 테이블마다 좀 보기엔 그렇습니다만 일회용 식탁보를 깔아 위생적이긴 합니다. 매번 행주로 깨끗하게 닦는다 하더라도 위생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더 좋은 방법이라면 이 위생을 위해 사용하는 일회용 비닐테이블보를 양양 소락만의 디자인을 해서 사용한다면 더 좋겠단 의견입니다.
양양 소락은 다소 다양한 차림이라 걱정을 했으나 맛은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규모는 작습니다만 깔끔한 분위기로 양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맛집입니다. 다음에 다시 양양 소락의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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