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 17-2월 27 갤러리 휴(양산신문 3F)에서 초대전을 하고 계신김준환 작가의 <조우>란 작품인데 제가 허락도 없이 작품을 임의로 편집을 좀 했습니다. 이 그림 꼭 이런 형태로 한 쪽 벽에 채우고 싶군요.
몇 년 동안 글을 쓰지 않다시피 했습니다. 글을 쓰지 않는 시기에는 더 많은 책을 읽을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상하게도 그 시기에는 책을 읽지 않게 되는 버릇이 생기더군요. 글을 쓸 때는 1년에 100권 이상 되는 책을 읽었지만, 글을 쓰지 않을 때는 그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책을 흥미 위주로 읽었습니다.
최근 제가 할 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혼자 넋두리라도 하듯,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말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전 세계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있고, 저는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약간의 수고만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정보와 데이터를 빠르고 쉽게 주고받을 수 있으며, 다양한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사람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친구 및 가족과 소통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며, 이를 통해 수집한 정보들을 저만의 공간에 저장할 수 있는 블로그를 운영할 줄 압니다.
블로그를 다시 개설한 지 채 1개월도 안 되었는데, 쓴 글을 모두 합치면 원고지로 계산했을 때 200자 원고지 2,800장 분량이 되더군요. 1개월이면 3,000장은 충분히 쓸 수 있다는 계산이 됩니다. 글을 쓰는 동안 책을 읽고 뉴스를 보며, 다른 일들도 합니다. 물론 블로그에 올리는 글 외에도 문장으로 정리하는 다양한 글을 쓰기도 하지요.
물론 1년으로 계산하면 36,000매 정도의 글을 쓰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2년 정도는 20,000매 분량 정도의 글은 정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 바탕엔 예전 제가 썼던 3,000여 편이 넘는 글들이 있던 블로그는 영원히 사라졌지만 제 기억엔 대부분 간직되어 있기에 가능하지 싶습니다. 더러 인터넷을 활용해 여기저기로 누군가 가져간 글을 찾아 지금 시점으로 손질도 합니다.
또 하나, 이런 생활이 가능한 것은 저만의 생활 공간이 있어서입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 곧바로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식탁을 배치해두었습니다. 넓은 4인용 식탁은 6인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크기인데, 틈틈이 읽을 책들로 절반 가까이 채워지기 일쑤입니다. 침대도 제 몸무게만큼의 책이 쌓이기 일쑤입니다. 며칠에 한 번 책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상태로 돌아오곤 합니다.
조금 전 예전 사진들을 살펴보다 다시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2016년 광화문광장에서 겨울을 맞이하고 2017년 낮 시간이면 더위를 느낄 때가 되어서야 떠났는데, 그곳에서 했던 몇 가지 일 중에서 ‘민족춤협회’와 함께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야 함께했던 분들의 성함까지 모두 확인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이사장으로 민족춤협회를 이끄셨던 장순향 교수님과, 한대수, 이삼헌, 김경수, 고규미, 장경호 선생님이 수고하셨지요. 사진촬영을 하시는 장성하 작가님과 현장에서 서예퍼포먼스를 펼치며 민족춤협회와 발을 맞추시던 김기상 서예가와 변우균 선생님과 채희완 교수님이 그때부터 함께 하신 걸로 저는 기억합니다.
아, 얼마전까지 경기도 경제부지사를 지내시다 2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시는 염태영 의원이 수원시장을 지낼 때, 수원시의 초대로 3년 정도 가을에 수원을 찾았는데 거기에서 만났던 조선무예24반을 시연하던 임한필 무예가도 2017년 2월 광장에 나와서 수원에서의 만남을 이야기하며 인사를 나눴었습니다.
장순향 교수님께서 ‘민족춤협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드시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시던 모습을 제가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 사연은 따로 있습니다. 광화문광장에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문화예술인들이 노숙을 하기 시작한 직후 저도 거기 합류하게 되었을 때 배정받은 텐트가 장순향 교수님의 민족춤협회 명의의 53번 텐트였습니다. 의리라면 껌벅하시는 장순향 교수님께서 동생같은 녀석을 추운 광장에 혼자 머물게 했다고 저녁이면 밥과 술 자주 사주셨었습니다.
그때 <협회 설립취지문>을 준비하시던 모습도 기억하지요.
“겨레의 몸짓, 생명의 몸짓, 세계 속에 우리의 몸짓”
한국민족춤협회는 2016년 출범하여 우리 고유의 몸짓과 정신으로, 사회와 소통하려는 의지의 표현과 목소리를 대변하였습니다.
신명나고 때로는 애절한 몸짓으로 “겨레의 몸짓, 생명의 몸짓, 세계 속에 우리의 몸짓”으로 더 넓고 높게, 역사·문화·예술성의 본분을 다하고자 그 맥(脈)을 이어 사단법인으로 힘찬 출발을 합니다.
우리 민족의 애환과 함께해 온 민족춤은 고대(古代) 가장 중요한 행사인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비롯하여 신시(神市) 배달국시대 소도(蘇塗)의 경당(扃堂)에서 혼인하기 전 젊은 남녀들의 수행교육인 육례 속에 녹아있으며, 환(桓)의 광명정신을 계승한 집단원무(集團圓舞)로 시원(始原)인 ‘태백환무가(太白環舞歌)’에서 전승되어온 ‘강강술래’ 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법인 ‘한국민족춤협회’는 자랑스럽고 소중한 문화유산의 계승·발전을 위하여 나눔과 상생을 바탕으로 다양한 교육과 국제문화교류 연대의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또한 갈등과 경쟁의 틀에서 벗어나 소통과 치유의 문화를 통한 창조적이고 자긍심 있는 활동을 해 나가겠습니다.
1980년대 삼보컴퓨터가 있던 골목 허름한 식당에서 A4용지로 출력해 온 설립취지문을 다듬고 고치시기를 수없이 반복하기도 하셨었습니다.
협회를 정식으로 창단선포를 하며 이사장으로 취임하시기 직전인 2월 18일엔 이런 일도 있습니다. 광장에서 행사를 돕다 찾아온 후배 안중찬․김애경 부부와 박재동 화백님을 모시고 할리스 커피숍에 가는 길에 민족춤협회에서 힘든 일들을 맡아 돕던 김경수 선생이 아들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김경수 선생의 아들 상우가 “5학년 되요”라 하기에 “아저씨랑 비슷하네. 아저씨는 5학년 4반이야. 상우는?”이라 하자, “난 5학년 1반이예요”라 하는 바람에 박재동 화백님께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셨었습니다. 그때 광장에 촛불 들러 나왔는데 커피숍에 앉아 쉬니 “빨리 나가자”고 엄마를 조르던 상우였는데 이젠 제법 청년이 되었겠군요.
그날 밤 장순향 교수님은 피곤해 죽겠다는 제게 또 숙제를 안기셨습니다. “정 시인이 민족춤협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 뭐가 되었든 글 하나 써줘요. 그날 사용할 인쇄물에 넣게요”라 하셔서 늦은 밤 할리스 커피숍에 다시 건너가 노트북을 펼쳐야했습니다.
광장의 역사를 기록하며 만난 춤 행동
지난 밤 봄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한참 작업을 했던 탓인지 몸이 많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한양대학교 무용학교 교수이자 민족춤협회 이사장이신 장순향 교수께서 갑작스럽게 “금요춤교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지켜보았으니 정 시인이 토론에 참여해 주면 고맙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거의 반강제요, 순전히 강짜 수준의 청탁이지만 그간의 인연을 생각하니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었습니다.
사실 매년 10월 31일 밤 70~80명이 넘는 사람 앞에서도 태연했고, 몇 백 명이 앞에 있어도 뻔뻔하게 할 말 다 할 줄 알지만 이번에는 무엇을 해달라는 말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무얼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춤꾼도 아니고, 몸 자체가 나무토막 같은데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지조차 걱정되어 잠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학문적으로 풀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춤이 어떻게 민중과 동화되어 함께 새날을 열어가느냐에 대해 그동안 나름대로 생각했던 바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광장의 역사를 기록하며 만난 춤 행동>이라는 제목을 먼저 제시하고 그에 맞춰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저는 1차 촛불집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2차와 3차 촛불집회에는 강원도와 경상남도에서 광장을 찾아 더불어 함께 촛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3차, 4차 집회에는 미리 광장에 와서 금요춤교실이 태동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참으로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물론 당장은 우리 모두가 그렇듯 낯가림을 하겠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너무도 당당하게 광장의 주류문화로 자리 잡아 촛불문화제와는 별도로 서울의 대표적 문화행사로 자리하여 매주 금요일이면 광장에서 함께 어깨를 걸고 발을 구르며 몸짓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잠시 시조 한 수 소개합니다.
설월(雪月)이 만정(滿庭)한데 바람아 부지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은 번연(判然)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마음에 행여 긴가 하노라
작자미상의 이 시조에서 만정은 만창(滿窓)으로도 쓴 경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만창보다는 만정이 더 지극하다 생각합니다. 창 가득히 달빛이 들어오면 외로움이지만, 뜰 가득히 달빛이 쏟아지면 진정으로 외롭고 고독한 공간에서 무엇인가 대상이 있는 공간으로의 이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조를 해묵은 메모에서 찾은 이유는 그동안 금요춤교실을 보며 아직 우리들 정서에 당당하게 나서기 어려워하는 망설임이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시조의 두 번째 행 첫 시작에 사용된 예리성(曳履聲)이란 말은 ‘짚신 끄는 소리’입니다.
창과 소리가 당당하게 대중의 품으로 걸어갔듯, 춤 또한 당당하게 대중의 품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누가 볼까 두려워 달빛을 살며시 밟으며 임의 방문 앞으로 걸어가는 조심스러움이 왜 필요합니까? 당당하게 움직일 줄 알되 일시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더 보태자면 만초(蔓草)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많겠습니다만 부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만초’란 담쟁이나 칡, 머루나 다래와 같은 덩굴성 식물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형태의 문화도 혼자서는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더불어 함께 어울릴 줄 알아야 합니다. 대중과 함께 호흡할 줄 모르고서는 문화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광장만큼 넓게 열린 공간도 없지만, 또한 그 광장은 너무도 넓어 뿌리를 단단히 내리기에는 삭막하기도 합니다. 그러한들 담쟁이가 나무 등걸이나 벽을 타고 오르는 모습처럼, 금요춤교실로 시작된 대중과의 소통의 몸짓 또한 앞으로 더 단단히 뿌리 내리며 싯푸른 잎들을 내고 꽃을 피우리라 확신합니다.
끝으로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엔 두 가지 내용이 대문에 있습니다. 하나는 ‘문화는 세상과 소통하는 창(窓)입니다’라는 문구로, 문화가 세상, 즉 우리가 말하는 사람 사는 사회와 연결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창문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빛을 받아들이듯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쓴 시(詩)로 가장 짧은 시인데 ‘솔가지 위 / 나풀거리는 눈송이 / 가지를 부러뜨리네. // 내가 던지는 말 한마디 / 저 눈송이인 줄 아네’라는 내용입니다.
개별적인 몸짓은 가볍고 무력합니다. 그러나 뭉쳐 쌓이면 대단한 위력을 지닙니다. 그동안 금요춤교실로 광장에서 소통하고자 했던 몸짓들이 대중과 단단히 결속되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힘의 원천이 되시길 희망합니다. 고맙습니다.
2017년 2월 18일
오늘은 그날로부터 꼭 8년이 된 날입니다. 해가 바뀐 2019년 2월엔 3.1혁명 100주년 기념 ‘민족평화신명천지축전’을 한다며 연락을 주셔서 서울에 올라가 청계광장에서 만났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엔 추계예술대학 콘서트홀에서 남북문화예술교류지원사업으로 ‘해란강의 여령들’이란 제목으로 연변가무단을 초청해 무용공연을 하신다고 부르셔서 다녀왔습니다.
그 민족춤협회 다시 또 제가 함께 할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기록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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