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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정

안병하 경무관, 국민을 위한 경찰의 표상

by 한사정덕수 2025.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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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안병하 경무관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였습니다. 광주의 518 민주화운동 과정을 조사하며 관련 자료를 찾던 중, 당시 전남도경국장을 지낸 그에 대한 기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가 강원도 양양군 출신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양양에서 안병하 경무관에 대해 아는 이들이 있는지 찾았지만 기억하는 분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1950년대 이미 양양군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여서일 겁니다. 이에 2014년부터 다른 방법으로 그의 행적을 찾기로 했습니다. 당시 경찰 간부 출신으로 오색1리의 이장을 맡은 임승엽 씨에게 술자리에서 물어보았습니다.

 

“형님, 청와대도 근무하시고 종암경찰서와 강남 등 오랫동안 경찰에 몸을 담으셨는데 저는 1990년대 초반 종암경찰서 관할의 종암2동에서 봉재공장을 했습니다.”

“덕수 자네가 거기에서 봉재공장을 했다고?”

“네 형님, 경찰서 앞에 ‘마가레트호텔’이 있고, 장안쇼핑센터가 있었잖아요. 그 바로 옆에 아주 조그맣게 종암파출소가 있었고요.”
“오, 그래 맞네.”

“이 봉재공장이란 일이 다양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 늘 조심해도 사고가 나거든요. 뭐 장안쇼핑센터 2층에 있던 스탠드바만큼이야 아니지만요. 그러니 경찰서에서 방범대나 선도위원 중 뭔가를 봉재공장을 하는 사람은 맡아야 하더군요.”

“규모가 컸었나?”

“조금요. 뭐 몇 년 안 돼서 완전히 뒤집어엎어졌지만… 더우면 파출소장이 공장에 와서 사무실에 앉아서 윗도리 단추를 슬쩍 풀면서 ‘아이구 시원하다. 정 사장님 여긴 에어컨 참 빵빵합니다. 우리 파출소는 더워서 앉아 있지를 못해요. 우리 파출소에도…’ 이러면서 쓰윽 눈치를 살펴요.”
“그럴 수 있지…”

“정말 난감합니다. 그까짓 에어컨 그냥 3평짜리 하나 설치해주면 되지만 주변 다른 사람들도 입장이 있고, 이 인간이 도대체 몇 군데를 이 짓을 하며 돌았는지를 모르잖아요. 하여간 이런 일은 당시 제가 공장을 운영하던 신당동과 마포까지 모두 똑 같았어요.”

“그런 일도 있긴 했었지.”

“생각하면 정말 기분 더럽습니다. 엿 같아요. 말이 민중의 지팡이지, 숫제 그냥 민중의 날강도가 경찰이라고 봅니다.”

“그래, 그건 정말 그때들 그랬어. 인정하지. 그리고 미안하네.”

“아, 형님 그건 이미 지난 일이고요. 혹시 안병하란 경찰 아세요?”

“안병하? 어디 속초경찰서에 있었나?”

“아니요. 전남도경국장으로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고 해서 전두환이한테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안병하 경무감요.”

“아, 그럼 경찰이라면 당연히 알지. 자네는 어떻게 경찰도 아니면서 아나?”

“혹시 그 분 고향이나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있을까요?”

“글쎄… 경찰에서 특별히 뭐 살펴 볼 일도 없었는데…”

 

이 임승엽 오색1리 전 이장의 대답은 2018년 달라집니다.

 

“안병하 경무관은 존경받는 인물이지. ‘경찰 영웅’ 1호로 참 본 받을 분이지.”

 

지금 이 시점에 다시 기억하고자 이 글을 쓰며 살펴 볼 안병하 경무관은 대한민국 경찰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결단을 내린 인물 중 한 분입니다. 19805,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의 항쟁이 격화되었을 때, 신군부는 계엄군뿐만 아니라 경찰에게도 강경 진압과 발포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며 발포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지키고, 경찰 조직의 명예를 보전하기 위한 결단이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광주에서 발포를 거부한 그는 527일 강제 연행되어 보안사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신군부의 눈 밖에 난 그는 62일 석방되었으나 경찰직에서 강제 해임당하고, 이후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 속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힘겹게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1988, 끝내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삶을 기억하며

안병하 경무관에 대한 기록은 몇 차례 글로 남겼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오마이뉴스의 기사 <벚꽃놀이 대신 역사 배운 양양 현산공원> 속 한 부분뿐입니다.

이곳 현산공원 바로 아래 도로변 양양등기소 옆에 지금은 꽃집으로 바뀌었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칭송받을 인물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입니다. 1980년 광주 5·18민주항쟁에서 신군부가 전남도경에 발포명령을 내렸을 때 거부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당시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던 고 안병하 경무관(1928~1988)이 이곳의 인물입니다.이렇게 말입니다.

그가 태어난 곳에서 바라보면 앞산이 현산공원이었고, 그가 다녔던 양양초등학교도 군청을 지나 불과 2~3분 거리에 있었습니다. 작은 강원도의 고장에서 태어나셨지만, 훗날 대한민국 경찰 역사에서 가장 큰 도덕적 결단을 내리게 될 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국민을 지킨 경찰, 그러나 지켜지지 못한 경찰

안병하 경무관은 경찰이 국민을 위한 조직이라는 점을 온몸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우는 너무나도 소홀했습니다.
1988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2003년 참여정부에서야 처음으로 순직 판정을 받습니다.
이후 2006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되고, 2017년 경찰청 최초의 경찰영웅 칭호를 받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이 마땅히 기려져야 할 자리에서조차 잊히고 있습니다.

안병하 경무관의 후배 공직자들은 그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5.18 정신의 발상지인 광주에서조차 그의 이름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광주시에서는 안병하 경무관을 기리는 기념행사조차 공식적으로 마련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일부 시민들과 안병하 기념사업회에서만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경찰청 또한 그를 따르던 참모들에 대한 명예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으며, 생존한 동료들조차 생활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안병하 경무관의 막내아드님이신 안호재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전남경찰청에는 아버지를 기리는 ‘안병하 공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현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

국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안병하 경무관과 그와 함께했던 참모들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입니다. 518 당시, 목숨을 걸고 경찰 본연의 역할을 다했던 분들은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참모로 함께했던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은 극심한 고문 후유증을 겪으며 파면당하고, 이후 평생을 술로 고통을 달래야 했습니다. 함께했던 전남 경찰청 간부들은 고향을 떠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한, 광주시는 더 이상 안병하 경무관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광주시민들의 생명이었으며, 그로 인해 그의 가족과 후배들은 40년 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1980년 당시 수천 명의 광주시민을 살린 분이, 그 광주의 공식적인 기념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2025년의 시점에서 우리는 왜 그를 기억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안병하 경무관의 삶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직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 그리고 국가와 국민이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국가의 명령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이었습니다.
그가 거부했던 것은 권력자의 뜻이 아니라 경찰의 본분을 저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희생으로 남긴 것은 우리가 경찰과 공직자의 역할을 다시금 되새길 계기였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안병하 경무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곧, 정의를 부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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