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 여태명 선생의 민체 이야기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기념 표지석의 가림천을 걷으셨습니다. 그 순간, ‘평화와 번영을 심다’라는 문구가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그 글씨를 쓴 이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서예가, 효봉(曉峰) 여태명 선생이셨습니다. 역사의 한 순간을 기록한 그 글씨가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선생님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서체를 몇 종류로 써달라는 요청이었죠.”
선생님께서는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서체, 완판본체, 그리고 민체로 ‘평화와 번영을 심다’를 써서 보냈고, 그중 민체(民體)가 선택되었습니다. 그렇게 남북 정상이 기념식수를 하고 세운 기념 표지석에 선생님의 글씨가 새겨졌습니다.
민체—그것은 단순한 글씨가 아닙니다. 백성들의 손끝에서 태어나, 삶의 숨결이 스며든 서체. 여기에 선생님의 철학과 민중을 향한 깊은 애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궁중에서 사용하던 서체를 궁체라 부르듯,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 서체를 저는 민체(民體)라 불렀습니다. 기존의 법첩만을 모방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서체도 사람처럼 살아 숨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글씨를 찾고자 고서점을 헤매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낡은 종이에 새겨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손글씨를 발견하셨습니다. 기교 없이도 정성이 가득한 글씨, 억센 듯 따뜻한 필획.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마치 백성들의 손길을 직접 느끼는 듯했습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 애틋한 정성과 삶의 결이 깃들어 있었죠. 그렇게 민체가 탄생한 겁니다.”
그러나 처음 민체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반응은 곱지 않았습니다. “이런 서체를 누가 쓰겠느냐”, “글씨가 너무 투박하다”는 혹평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서체는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시대를 담아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글씨에는 언제나 의미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전주 톨게이트 현판 글씨를 보셨나요?”
전주로 들어가는 글씨와 나가는 글씨가 다르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전주로 들어갈 때는 ‘ㅈ’을 작게 쓰고 ‘ㅓ’를 크게 썼어요. 자음은 자식이고 모음은 어머니입니다. 엄마 품에 안기는 자식의 형상이죠. 반면, 전주에서 나갈 때는 ‘ㅈ’을 크게, ‘ㅓ’를 작게 썼어요. 자식이 바깥세상에서 건강하고 크게 성장하라는 뜻을 담은 겁니다.”
서체 하나에도 깊은 뜻을 담아낸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여태명 선생님의 철학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글씨에 담아 전하는 것. 그것이 선생님의 서예입니다. 그런 여태명 선생님의 민체에 대해 시를 한 편 썼습니다. 2025년 1월 22일에 썼음에도 이제야 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백성의 글씨, 역사가 되어
바람 머금은 한 자, 물결을 담은 한 획,
불꽃 같은 그리움이 스며
백성의 손끝에서 피어난 글씨.
삶의 무늬를 새기듯 다듬어지니
그것은 시대의 뼈대요 민족의 숨결 아니랴.
고서의 빛바랜 종이 위에서
낡은 붓 끝에 매달려 떠돌던 염원이
간절한 기도로 새겨진 그 순간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이 땅의 백성들이
피맺힌 마지막 절규로 남긴 글자
그 정신을 엮어 되살린 이여.
민체라 불리는 서체
궁궐의 장식 같은 정갈함이 아닌
산골 마을 흙벽에 남겨진 마음 같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남긴 서툴지만 다정한,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적었을
그 따스한 울림의 글씨가
역사의 한 순간 다시 문장을 새기네.
평화를 심고 번영을 새기고
한반도의 숨결 속에 스미어
새로운 희망을 일으키는 이름
그러나 그 길이 어찌 쉬웠으랴
못난 글씨라 세상은 등을 돌렸고
붓 끝을 밀어내는 소리 속에서
한 획, 또 한 획 더 깊이 새겼으니
글씨가 곧 역사가 되어
한 나라의 숨결이 되어 그렇게 새기네.
병마가 그의 손끝을 떨리게 해도
휠체어 위에서도 전각을 새기고
광장의 깃발 위에도 남겨지는 붓놀림
그것은 단순한 서체가 아닌
민중의 목소리요, 시대의 기억
한 필로도 시대를 새길 수 있음을
손끝으로도 정의를 지킬 수 있음이야
우금치를 넘어 남태령의 그 장함을
한남동 눈보라 속 지켜낸 촛불의 희망을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 글씨를 보며
기억하리라 평화와 번영을
한 시대를 품어 안았음을.
민중의 목소리요, 시대의 기억
한 필로도 시대를 새길 수 있음을
손끝으로도 정의를 지켜낼 테니
우금치를 넘어 남태령의 그 장함을
한남동 눈보라 속 지켜낸 촛불의 희망을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그 글씨를 보며
기억하리라 평화와 번영을
한 시대를 가슴 깊이 품었음을.
삶을 담은 글씨, 역사를 새기다
병마가 선생님을 괴롭힐 때도 붓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병실에서도, 심지어 휠체어 위에서도 전각을 새기며 글씨를 남기셨습니다. 한 사람이 생애를 걸고 남긴 선물—그것이 선생님의 서체였습니다. 백성의 글씨로 역사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선생님께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광장에서 새기는 평화와 민주주의
최근 선생님께서는 윤석열 탄핵 광화문 미술행동에서 깃발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작가들과 시민들을 위해 예술포차(무료 어묵 나눔) 행사의 경비를 후원하기 위해 작품을 판매하셨습니다.
“문화예술인들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뜻을 모아야 합니다.”
그렇게 판매된 작품들의 수익금은 광화문 미술행동의 깃발부대 참여와 함께 헌법재판소 앞 집회에서 진행된 어묵 나눔 행사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이미 각자 주인을 찾아갔지만, 선생님의 정신과 철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소개합니다.
깃발부대는 ‘광화문 미술행동’이라 명명한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으로, 무도한 권력자들의 불편부당한 처사에 평화적으로 항거하는 미술과 예술을 사랑하는 문화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시더라도, 예술인으로서 연대하는 마음을 담아 작품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는 광장의 중심에서 예술이 가진 힘을 믿습니다. 붓 한 자루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그의 글씨는 단순한 서체가 아니라 시대의 숨결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민중의 숨결이 깃든 역사의 기록이며, 정의를 향한 마음의 발현입니다.
예술이 만드는 새로운 역사
병마와 싸우면서도 붓을 놓지 않으셨던 선생님. 병실에서도, 심지어 휠체어 위에서도 전각을 새기며 글씨를 남기셨습니다. 백성의 글씨로 역사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선생님께서 걸어온 길입니다.
그렇게, ‘평화와 번영을 심다’는 문장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삶이 스며든 글씨로 새겨졌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민체는 단순한 서체가 아닌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국민의 염원을 담아낸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광장에서 피어나는 촛불 속에서, 그리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글씨를 새기고 계십니다.
그의 서체가 담아내는 정신이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굳건한 기둥이 되기를 바라며,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기록합니다.
'문화의향기 > 미술관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평》 동주와 반 고흐 영혼의 시화전 1 (1) | 2025.03.31 |
---|---|
《서평》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0) | 2025.03.12 |
이야기가 들리는 두 분의 작품을 만나! (0) | 2025.02.17 |
펜으로 따뜻함을 표현하는 작가 ‘Danny Im’ (0) | 2025.02.15 |
백제금동대향로의 음악사적 가치는! (0) | 2025.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