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이나 우리의 정서적 감정을 연주하게 하는 모든 도구들을 시적 장치로 이용할 때가 많습니다. 2022년부터는 ‘철현금’이란 정말 독특한 악기와 철현금을 연주하는 류경화(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애 대해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가야금을 많이 시적 완성도를 높이는 장치로 중요하게 사용했는데요, 철현금도 그렇게 시적 장치로 끌어들일 수 있는 날이 있을겁니다. 오늘는 가야금에 대한 시 중 두 편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이미 경칩驚蟄이란 절기를 지났으니 지금 이 시를 소개하기엔 늦은 감은 있습니다만, 우리의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첫 번째인 입춘立春은 글자 뜻 그대로 봄을 비로소 세우는 날을 이릅니다. 그 입춘을 주제로 쓴 ‘입춘은 가락으로’를 만나보겠습니다.
입춘(立春)은 가락으로
누가, 깨어질 듯 차가운 하늘에
열두 줄 명주실 매어
타고 있는가? 시린 날
잉- 잉, 밤나무 가지 맴돌다 마침내
가장 높은 자리 올라
맑게 울리는 천상의
열두 줄 타고 흐르는 가락
지나친 세월을 노래하는가.
지잉 징~
고로쇠나무 숲 가르던
네 거친 숨결 마침내
가장 유순한 표정 짓나니
황홀한 비상의 나래
천상의 결 고운 가락 타고
흐르는가 싶어
청봉을 덮고 있던
짙은 슬픔으로 흘린 눈물
온통 남대천 큰 물줄기 이룰 날
갯버들 살 오르고
이름 모를 자리 제비꽃은
봄밤 아련한 등(燈)을 달리라.
이 시는 2004년 입춘에 썼으니 21년이 되었군요. 이미 보신 분들도 많겠지요. 가끔 입춘이면 이 시를 제가 매화나 겨울 한계령 사진과 함께 사용했었으니까요.
여기에서 제목부터 음악적인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락’은 금관가야을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가야의 우륵을 이 가락이란 용어와 떼어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륵은 가야금伽倻琴을 창시한 인물입니다.
우리 현악기 가운데 12줄로 된 악기가 가야금이고, 또한 대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을 궁중 악사로 초빙하여 12곡을 작곡하게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음악 창작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으로, 대가야 연맹의 통합과 결속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12곡을 작곡하게 했다”는 대목에서 저는 가야금의 12줄과, 12달, 그리고 우리가 한타一打라는 묶음 단위와 12시간 등에 한동안 집요하게 매달렸던 적이 있습니다. 왜 12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지요.
서양사에서는 유대인들에게 ‘12지파’란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의 한단고기부터 단군세기 등을 총망라하면 엇비슷합니다. 그들의 성경은 신봉하며 마치 전지전능한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떠받들며 우리의 역사에 속하는 이 내용은 “정사가 아니다”고 방치합니다.
분명 우리의 가락은 개념상 서양음악의 단순한 멜로디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한국 전통음악의 독특한 특성을 반영하는데도 말입니다.
겨울 가야금
누가, 얼어붙은 강물 위에
열두 줄 은빛 실을 걸어
타고 있는가? 깊은 밤
징- 징, 싸락눈 속을 헤매다 마침내
가장 고요한 자리 올라
서늘한 바람 타고 흐르는
열두 줄 차가운 음률
얼어붙은 세월을 노래하는가.
지잉 징~
눈발 사이 스치던
네 서늘한 손끝 마침내
가장 고요한 숨결 짓나니
푸른 달빛 타고 걷는 듯
얼음장 스쳐 영근 가락
천지간에 스며들 때
하늘빛을 풀어 강물 되어 흐를 날
버들강아지 움트고
천산 깊은 골짜기 매화는
겨울밤 은은한 등(燈)을 달리라.
최근 임동창 형님과 함께 ‘설악예찬’이란 제법 방대한 분량의 시와 음악작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봄 편에 대해서는 이미 원고 전체를 전달해드렸지만, 그 외 계절은 겨울에 대해서까지 작업을 거의 마쳐가면서도 아직 망설이고 있습니다. 이유는 좀 더 완숙한 시를 빚어내려는 욕심에서입니다.
그런데 이 ‘겨울 가야금’을 마지막 겨울편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 봄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할 생각으로 써놓고 “어디에서 많은 본 구조의 시다”는 생각을 며칠 했습니다. 정말 바보스럽게 말이지요. 제가 2004년 입춘에 쓴 저 ‘입춘은 가락으로’와 거의 같은 구조여서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 혹시나 다른 시인의 작품과 너무도 흡사하게 쓴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했던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표절’이란 족쇄가 채워집니다. 자신이 쓴 시와 같은 구조와 음률을 지닌 시에도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함은 당연해야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다른 이들의 시와 다양한 분야의 글을 읽더라도, 그로 인하여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게 되더라도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시의 구성은 마치 변주된 가락처럼 서로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어, 겨울과 봄이라는 대조적인 계절이 가야금의 음률을 통해 서로를 잇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가, 깨어질 듯 차가운 하늘에 / 열두 줄 명주실 매어 / 타고 있는가?’와 ‘누가, 얼어붙은 강물 위에 / 열두 줄 은빛 실을 걸어 / 타고 있는가?’라는 두 시의 첫 연은 거의 동일한 리듬과 어휘를 공유하면서도 계절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이는 마치 동일한 선율을 다른 조성으로 연주한 듯한 효과를 주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어의 선택과 운율이 가야금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장치하였습니다. ‘지잉 징~’과 같은 의성어는 가야금의 줄이 울리는 순간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 여운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변하는 듯한 정서를 자아내도록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각적 재현을 넘어, 악기의 소리 자체가 시적 장치로 기능하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습니다.
저 ‘입춘은 가락’으로도 임동창 형님께 설악예찬 봄 편에 사용하시게 함께 전해드려야 되겠습니다.
조만간 이 가야금에 대한 이야기와 임동창 형님께서 가얏고의 이름을 빌어와 17년 각고 끝에 개발하신 피앗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가야금의 이야기도 풀어야겠지요.
오래전 메모에 이런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사에서 발췌를 해 놓은 거 같은데… 내용으로 미뤄 장사익 선생이 하신 말씀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4년 형님을 만났을 때 “장사익 선생님을 음악판으로 나가시게 한 것도 임동창 선생님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사연을 소개해 주세요.”라 부탁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그건 아닙니다. 그냥 한 판 잠깐 같이 놀았지요.” 딱 이 말씀만 하셨었습니다.
“그 유명한 사물놀이패 김덕수를 쫒아 다닌 적 있어. 게서 임동창을 만났어. 공연하면 항상 뒤풀이가 있잖아. 뒤풀이에서 항상 노래 부르고 놀았지. 한번은 신촌 어느 중국집에서 판이 벌어졌는데,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임동창이 피아노로 반주를 하며 놀았지. 그런데 그 일이 참 흥미로 왔어. 일반적 반주가 아니라 내가 부르면 피아노로 화답하는 것 같았어. 나도 그랬지만 임동창도 기맥힌 경험을 한 겨. 그러다 어느 날 집으로 찾아 와서는 대뜸 한번만 세상에 나가라고 하는 거여. 그렇게 시작된 겨. 녹음을 하고 음반이 나왔지. 참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겨. 사실 임동창 때문에 세상에 나온 겨. 그러다 서로 가는 길이 달라 각자 따로 길을 간 게지. 처음엔 한번하고 말 줄 알았는데 이만큼이나 온 겨. 아무리 가는 길이 달라도 20주년 공연은 당연히 임동창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참 기맥힌 경험과 인연 때문에 오늘까지 온 겨.”
- 2013년 메모.
이 메모 그대로 형님은 한 판 잘 노신 경험으로 말씀을 하셨지 싶습니다. 저 메모의 발언을 하신 분이 장사익 선생이 맞다면 그는 “그러다 어느 날 집으로 찾아 와서는 대뜸 한번만 세상에 나가라고 하는 거여. 그렇게 시작된 겨. 녹음을 하고 음반이 나왔지. 참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겨. 사실 임동창 때문에 세상에 나온 겨.”라고 자신을 음악판으로 이끈 이는 분명 임동창 형님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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