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읍내엔 현대식 건물들과 오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앉은 건물이 공존합니다.
평소엔 주차장으로 이용되지만 장이 서는 날이면 온갖 잡곡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싸전 주변이 그렇습니다. 양양의 중심지라고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은 세월을 한참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듯합니다.
일제강점기 건물과 한국전쟁을 견뎌냈음직한 건물들이 골목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이런 모습이지만 70년대엔 이곳은 정말 온갖 제철 과일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한 되의 쌀을 살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은 한 홉씩 쌀이나 보리를 사서 끼니를 해결할 수도 있었습니다. 제법 번화한 장터의 중심지였던 겁니다.
요즘에야 설마 그렇게도 쌀을 구입할까 싶지만, 그렇게라도 쌀을 구하는 이들이 한없이 부러운 이들도 많았습니다. “밥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된다”는 말도 사치로 여겨질 정도로 그 라면 두 봉지 값이면 국수로 너덧 명 가족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라면이라야 20원이면 한 봉지였는데 국수 반 관에 100원을 주었고, 그 국수 반 관이면 이틀을 한 가족이 굶지 않아도 되었었습니다.
온 가족이 한 방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던 풍경이 이제는 낯설 정도로 각자 생활하는 시간들이 나뉜 요즘에야 이런 집들이 있는 풍경이 정겹긴 합니다. 그만큼 마음이 많이 누그러져서일까요. 그건 아닙니다.제게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조선의 소녀’로 즉흥창작무를 펼쳤던 장순향 누님께서 “삼일문이 나오게 촬영된 사진을 줬는데 그걸 왜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해 드렸습니다.
“그 글씨 박정희가 썼어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군을 혈안이 되어 잡아죽이는데 앞장 선 만주군 박정희가 그 글씨를 썼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친일 빨갱이 박정희가 삼일문 현판을 위대한 대통령이랍시고 친히 하사하시던 시절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초가와 굴피나 너와로 지붕을 얹었던 집들에서 함석으로 지붕을 바꾸고, 대통령이 지나간다고 도로에 인접한 전면만 시멘트로 모양을 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국가의 거짓말에 잘도 속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바뀔까 싶었지만, 여전히 대를 물려 거짓선동에 속는 모습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대를 물려 친일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사죄를 하기는 커녕 마치 이 나라의 발전과 자유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거짓을 늘어놓습니다. 알면서도 이런저런 인연에 얽혀 짐짓 모르는 척 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 되는데… 자신들이 애국자요, 반공투사며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이라도 한 듯 설칩니다. 진보진영에서 권력을 잡으면 반드시 자신들을 옥죄어 올거라는 불안감에 ‘보수’라는 탈바가지를 쓴 승냥이가 되어 전광훈이나 극우집단에 연결한 끈을 쥐고 버팁니다.
요즘은 눈이 예전처럼은 내리지 않습니다. 그 시절엔 1m 이상 내리는 눈은 예사였습니다. 사나흘 그칠 기미 없이 퍼붓는 눈에 설을 맞아 외진 산골 큰집에 차례를 지내러 가서 이런 일도 겪었습니다. 대보름에도 길이 안 뚫려 산골짜기에서 버스가 들어오던 정류소집까지 내려와서도 다시 40리 신작로를 터벅이며 눈길을 걸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친척집에서 하룻밤 잠을 자고 다음날 새벽, 중간까지 겨우 왔다 읍내로 가는 버스를 막 먼동이 튼 새벽에 탔던 게 엊그제 같건만 참으로 아련한 옛 이야기 되었습니다.
1980년 12월 31일 청량리에서 철암까지 통일호 열차를 타고 갔었습니다. 1979년 봄 영풍광업소에 입사한 형이 그해 가을 형수와 조카를 데려가 속세골 사택에 자리를 잡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둘째 조카가 초여름으로 접어들 때 태어났고, 바로 밑의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데려가 중학교를 보냈기에, 설엔 못 가도 연말이나 휴가 때는 형이 살던 그곳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열차가 영주에서 거꾸로 다시 북상하기 시작해 석포역을 지나면 천천히 내릴 준비를 했습니다.
동점역을 지나 잠시 뒤 철암역에 도착하면, 열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통과해 대합실에서 잠시 망설입니다. 추워도 그냥 이 대합실에서 첫차가 운행하길 기다리거나, 역전 맞은 편 국밥집에서 요기를 하며 기다리거나 해야 되니 갈등을 했던 겁니다.
잠시 망설이다 결심을 하고 밖으로 나가면 휑한 역 앞 광장을 가로질러 건너야 했습니다. 시커먼 탄가루에 가려 칙칙하게 비치는 노란색 촌스런 간판을 애처롭게 밝힌, 국밥집은 페인트를 언제 칠했는지 알 수 없는 나무 미닫이문이 삐걱거리며 힘을 줘 열어야 했습니다.
거기 들어가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식탁에 등받이도 없는 빨간색 비닐까지도 낡은 철재 의자를 당겨 앉아, 소주 반병과 순대국밥 한 그릇 시켜놓고 천천히 먹으며 버스가 다니길 기다렸습니다.
국밥이 식으면 난로에 이가 빠진 뚝배기를 올려 데워 가며, 네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새벽 5시 50분에 계산을 하고, 뿌연 유리창 밖으로 골목을 빠져나오는 버스의 불빛을 기다렸습니다. 6시에 대한교통 버스로 강원도 삼척시에 속했던 철암리에서 도경계를 넘어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까지 덜컹거리며 느리게 달려갔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속세골 담배집에서 내려 촌스럽게 파란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늘색이라고 말하던 스카이 블루도 아닌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한 철다리를 건너갑니다. 패션 일을 하던 저는 흰색은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파랗다고 표현하는 블루컬러도 그 종류가 엄청나게 만드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색이라고 말하는 색깔은 초록색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만 아주 잘 배합이 되어 산듯하게 도색이 되었다면 모르겠으나 붓질이 그대로 느껴지며 초록과 회색과 블루가 묘하게 뒤섞인 색은 정말 짜증을 유발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색깔은 학교의 놀이터나 운동기구, 또는 철제로 된 다리 등 철제로 된 구조물엔 어김없이 칠해지고 있었습니다.
미루나무가 있는 산비탈과 냇가 방향으로는 사택들이 있는 트럭이나 어쩌다 무언가를 팔러 들어오는 신작로를 따라 걷다, 다시 언덕길을 따라 똑같은 구조로 지어진 사택들을 보며 한참을 올라가면 거의 맨 꼭대기에 형이 사는 사택이 있었습니다.
영풍광업 묵산광업소 속세골 사택 4동 4호, 주소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 속세골 4동 4호였는데… 1999년 찾아 가 본 그곳은 온통 미루나무와 싸리나무가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숲을 이루었더군요. 블록으로 벽을 쌓고 석면 가득한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사택 한 동에는 네 가구씩 총 23채가 있었고, 다섯 동의 공중화장실을 함께 사용하며 복닥거리던 마을, 다섯 채의 민가까지 모두 사라지고 길가에 단 두 집만 덩그러니 남겨진 상태였습니다.
철암역에서 구문소 지나 동점, 그리고 석포와 갈라지는 육송정에서 다시 방향을 틀어 봉화, 영주로 넘어가는 비포장길을 한참을 걸어야 되는 거길 세 번 걸어서도 갔었는데… 철암에서 육송정까지는 온통 새까만 풍경이었다면, 육송정에서부터는 그나마 자연의 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풍경이었습니다. 더구나 자정을 넘긴 철암역에서 날이 밝아야 운행하는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30리 넘는 길을 걸으며 마주했던 그 까만 풍경!
지난밤처럼 눈이 내리는 날이면 고생스러워 어서 지나갔으면 싶던 그 시절로 마음이 끌려갑니다.
산촌마을에 눈 내리는 밤
가난한 산촌마을 덮으며 눈 내리는 밤
천지를 매우며 고요는 더 깊어지고
오래된 나무들과 닳아버린 길뿐
여린 소리조차 없이 눈은 쌓이고
빛바랜 등불 하나 희미하게 흔들리는데
결핍 속에 차분히 가라앉는 이 고요라니
삶의 틈마다 스며드는 적막은
바람에 실려 흩어지듯 쌓이고
닫힌 문 너머 오랜 기다림이 부른
낮은 숨결 하나 들렸던 듯싶어 귀 기울이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질문 가슴에 묻고
또 다른 눅진한 고요 속으로…
마음 가득 눈이라도 내려 덮어줬으면
말 없는 우리들 절망 포근히 덮어줬으면
그러나 문득, 새벽이 깨어나듯
눈 속에서 피어나는 희미한 발자국 하나
우리가 잃어버린 길이 거기 있었을까
결핍 속에 눈만 소리 없이 내리네.
“日帝(일제)의 쇠사슬에 묶여 徵兵 徵用(징병 징용)으로 끌려가 大東亞戰爭(대동아전쟁)과 北海道(북해도) *○○炭鑛(○○탄광)에서 悲慘(비참)하게 숨져간 우리 同胞(동포)들의 넋을 기리고, 四色黨爭(사색당쟁)의 終末(종말)은 國權(국권)을 잃어 罪(죄)없는 善良(선량)한 百姓(백성)이 죽어간 歷史(역사)를 되새겨 우리 민족은 다같이 合心(합심)하자는 忠情(충정)에 이 碑(비)세우다.”
철암천을 따라 걷다 동점역 바로 직전에 제법 우렁찬 물소리가 들립니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潢池)에서 시작된 황지천이 장성을 통과해 철암천과 만나기 직전 구문소(求門沼)를 통과하며 내는 소리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처음 이 곳을 통과할 때 얼마나 두려웠던지요.
이 구문소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록으로 전할 정도로 유명한 장소입니다. ‘천천(穿川)’이라고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완성)와 대동여지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겨운 우리말로 “뚜루내”라고 불렸습니다.
한 번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구문소를 자세히 보러 낮 시간에 철암이나 지금은 태백이라고 하는 황지에 내리지 않고, 중간에 있는 동점역 앞에 내렸었습니다. 그때 구문소를 둘러보다 만났던 비에 새겨진 글귀를 2014년 친구와 사진촬영을 하러 가면서 다시 들렸을 때 비에 적힌 글자를 모두 적어두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엔 못 보던 낯 선 글자가 구문소 안쪽 바위에 새겨져 있더군요. 아, 1999년 7월에 들렸을 때 얼핏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동행도 있었고 글씨를 촬영해 판독하기는 어려워 포기했었던 기억이 있군요.
이번엔 확실하게 그 각자까지 사진을 담는데 성공했습니다. 오복동천자개문(五福洞天子開門)
오복동설화의 주요 내용은 “나무꾼이 사슴을 쫓다가 굴속으로 들어가 이상적인 마을에 도달하는 이야기로, 이곳에서 행복과 평화를 경험하지만 다시는 이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가 전합니다. 또한 “모든 복이 고루 갖추어진 이상향으로 오복동(五福洞)은 묘사됩니다. 설화에 따르면, 이곳은 난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별천지로,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입니다.
그런데 글씨가 너무도 선명하고 깨끗해서 이리저리 알아보던 중 “무진원월 김강산 사(戊辰元月 金剛山 寫)”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태백의 문화에 대해서 연구하고 자료를 찾아서 발표하신 향토 사학자인 ‘김강산’이란 분이 쓰신 글이란 얘기와 무진원월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 1월을 말하는 거더군요. 그때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바위들이 수난을 당했습니다. 양양만 하더라도 강현면 정암리의 정암(釘岩)에도 “양양이라네”를 세겨 놓았고, 대청봉 정상에도 “양양이라네”를 새겼었습니다.
초서체로 해독만 어렵게 한껏 멋을 부리긴 했지만 저는 위에 한 비의 뒷면에 전힌 글을 옮겨 놓은 바로 그 비가 더 살갑게 느껴집니다. “글 銅店人 李炳沿(동점인 이병연”이란 분이 세운 해는 밝히지 않고, 國恥日 八月 二十九日(국치일 8월 29일)에 세웠음을 밝힌 “徵兵 徵用 者慰靈碑(징병 징용 자위령비)의 초라한 모습이 더 장하다 하겠습니다.
아, 이 비를 저 말고 관심을 갖고 살펴보신 분이 또 계십니다. 2022년 5월 “<당신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한길사”를 출판하신 강미숙 선생님께서 2023년 9월 무더위 속에서 낙동강을 따라 걸으시며 이 비에 대해 언급을 하셔서 정말 반가워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강미숙 선생님께서 쓰셨던 글에 제가 댓글을 드렸던 기억을 더듬어 찾아왔습니다.
“銅店人 李炳沿이라고 써 있다. 이병연씨, 동점인은 그의 호였을까”란 말씀에 1980년대 한 부분, 그리고 철암에서 봉화로 넘어가는 길을 작업했던 경험으로 말씀 드립니다.
구문소 옆 비는 언제고 그 이야기를 찾아야지 했으나 놓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비를 세운 이를 밝히는 내용에서 동점인은 그곳 동점이란 지명을 그대로 살려 적고 있습니다. 바로 근처에 동점역도 있었는데 이곳 동점이 동쪽에 점하나 찍듯 있는 마을이 아닌 구리와 황산동이 나오는 지역이란 사실입니다. 대체로 지명에 사용되는 東자가 아닌 구리 동자를 그곳은 씁니다.
최근 환경문제가 되는 석포제련소가 영풍광업의 아연괴와 황산동을 재련하며 그 폐수가 흘러서죠. 동점은 그렇게 오래전부터 구리와 연관이 깊고, 일제가 이 광물을 가져가기 위해 많은 조선인들을 끌어다 착취했겠지요.
이제 거슬러 가시는 길에서 만나는 지역이 육모정을 지나면 석포면이 되는데 예전엔 이 석포면이 봉화군 석포면이 아닌 봉화군 소천면 석포리였습니다.
이런 내용의 댓글을 강미숙 선생님께 겁도 없이 드렸었습니다. 그때 스마트폰으로 댓글을 입력하다보니 손이 느려 바로 앞에 다른 이가 먼저 동점인에 대해 동점사람을 이르는 것 같다는 내용을 먼저 밝힌 뒤에 제 댓글이 올라가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날이 2023년 9월 8일이군요.
눈 내리는 밤중에 이 글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아, “北海道(북해도) *○○炭鑛(○○탄광)”는 밝히고 넘어가야 속이 편하겠군요.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탄광을 비롯한 온갖 광물자원을 채굴하는데 조선인을 끌고가 고된 노동을 시키며 착취를 했던 그들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는 않습니다. 워낙 많고, 광범위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탄광으로 표기가 된 이상 ‘가야누마탄광(茅沼炭鑛)’는 북해도에서 징용자들이 고초를 겪은 탄광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탄광이 아닌 다른 광물자원을 채굴했을 수 있는 북해도의 광업소로는 ‘테이네광산(手稲鉱山)’과 ‘가미오카광산(神岡鉱山)’을 찾을 수 있는데, 기회가 되면 동점에 다시 들려 이중 어느 광업소의 표기와 일치하는지 확인을 해야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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