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아우가 촬영한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미치겠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저 헛헛한 웃음으로 감췄던 감정이 드러났지 싶습니다.
소설 한계령도, 다소 직설적으로 문장이 바뀐 글도…
언젠가 상상을 했습니다. 한계령을 소설로 쓰고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면 내가 찾는 그 엄마 역은 김영옥 배우라고요.
그런데 엄마 역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엄마를 닮은 배우도 늙었네요.
참말로 오래 버텼는데, 정말로 엄마도 세상 떠난지 오랜데, 이젠 김영옥 배우도 늙어서 제 기억 속 마흔살 엄마가 되지는 못하겠군요.
하지만 여전히 김영옥 배우라면 또 다른 어머니의 역을 멋지게 소화해 낼 거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눈물 많은 나에겐
흑백 사진 한 장에
묻어난다, 지난날의 그림자
웃고 있었던가, 울고 있었던가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선명했을까
시간이 바래놓은 얼굴 위로
손끝이 스치면 번지는 회한
빛과 어둠이 뒤섞여 흐르듯
그 속에 남은 나의 기억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눈물은 여전히 마르지 않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지난날의 향기가 서린다
한걸음, 또 한걸음
그때의 나를 부르면
흑백 속에 잠긴 시간이
고요히 대답하네
사진 속 그 눈물 많은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여기에
어제의 풍상을 품고
오늘도 노래하네
어제의 풍상을 품고
오늘도 노래하네
권혁재 아우가 촬영한 김영옥 배우게서 멋지신 건지, 사진을 촬영한 권혁재 아우가 그만큼 근사하고 멋진지는 저로서는 판단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아우나, 모델이 되어주신 김영우 배우나 모두 멋집니다.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1985년 4월 중순, 그 봄날의 끝자락입니다.
그때 스물둘의 청년이었고, 겨울의 중심에서 1월이 온전히 자리 잡기도 전,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월 7일, 형에게 급히 연락을 했고, 마장동 버스터미널에 나가 첫 버스로 어머니가 계시던 양구로 향했습니다.
양양방향으로 달리던 버스는 신남에서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1월의 양구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산길을 따라가며 차창을 두드리는 바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길옆의 나무들은 눈꽃을 이고 서서 조용히 겨울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공기는 깊은 산속의 냉기를 품고 있어, 호흡조차도 하얗게 얼어붙을 듯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형과 함께 정선군 남면 무릉리, 지금의 민둥산역 근처에 있던 강원산업 묵산광업소 사택으로 향했습니다.
원주에서 열차로 갈아타고 증산역으로 가는 그 길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습니다. 산봉우리마다 남아 있는 잔설이 반짝였고, 정차하는 역들을 지나며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길을 떠올렸습니다. 어머니는 많이 수척해지셨고, 숨소리마저 가늘었지만, 한사코 걱정 말라고 손을 내저으셨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형이 일하던 묵산광업소에서 당분간 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지내며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고한에 있는 강원산업 지정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닷새 뒤 묵산광업소에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탄광의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막장은 미지의 세계 같았습니다. 나는 난생처음 막장이란 곳에 배치받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2편 9크로스의 막장, 폐광을 준비하는 곳. 그곳에서 막장 정리를 전담하는 손봉실이라는 선산부와 단둘이 탄을 광차에 퍼 담으며 정리하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탄광의 공기는 무겁고, 숨조차 거칠어졌습니다. 방진마스크를 쓰고, 허리엔 매달고, 군용 탄띠로 불리는 허리띠를 이용해 안전모에 기워 불을 밝히는 캐프와 전선으로 연결된 배터리를 매달고 움직여야 했습니다. 고무장화를 신고 광차를 궤도에 얹고, 밀고 당기는 반복이 이어졌습니다.
눈앞은 온통 검은빛이었습니다. 광차 한 통을 채우려면 삽질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검은 석탄을 퍼 담는 삽질이 계속되었습니다. 방진마스크를 쓴 탓에 숨이 차올랐고, 이마에는 탄가루가 땀과 뒤섞였습니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도 삽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첫날 일을 마치고 다음 날 출근을 하니, 작업성과를 적어 놓은 칠판이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제 이름 옆에 9,800원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시절, 이 돈은 탄광생활을 상당히 오래한 선산부에게나 주어지던 금액이었습니다. 자정이 넘어 퇴근하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틀째 되는 날의 실적은 세 번째 출근을 하며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선산부 손봉실 아저씨는 15,400원, 그리고 내 이름 옆에는 12,000원이라는 액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작업장의 선산부가 8시간 동안 열심히 해야 겨우 벌 수 있는 큰 금액이라며 모두가 놀라워했습니다.
같은 반에는 김세기 계원이 감독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씩 어김없이 막장으로 내려와 작업 현장을 살펴보곤 했습니다.
다섯째 날, 막장에 들어가 일을 하는데 김세기 계원이 다가와 잠시 쉬며 담배 한 대 태우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막장까지 공기를 밀어넣는 파이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옆에 앉은 계원이 말을 걸었습니다.
“정창연 씨 동생이라며요?”
고개를 끄덕이자, 계원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여기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고 김경수 주임한테 들었어요. 힘은 안 들어요?”
김경수 주임은 한 살 많은 형의 처남이었습니다. 태백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 입사한 뒤, 갱내(坑內)에 차는 물의 수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장치를 개발하면서 전격적으로 정직원으로 채용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저의 사정을 전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날도 손봉실 선산부와 함께 열 두 광차의 탄을 캐 채우고 퇴근하여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막장 안에서는 얼굴이 깨끗해 보이지만, 목욕을 할 때 보면 온몸이 새까매서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목욕을 하던 사람이 불쑥 말을 걸었습니다.
“정덕수 씨, 내일 출근하면 곧장 입항하지 말고 기다려요.”
고개를 돌리니 김세기 계원이 제 옆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부터 광차가 권양기로 끌어올려지면 이를 배터리로 움직이는 전기광산차에 연결해 선탄기와 폐석처리장으로 분리해 나르는 작업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작업은 갈고리를 하나 들고 전기광산차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따라 포인트를 바꿔주거나, 광차들을 연결한 핀을 뽑고 끼워주는 단순한 일이었습니다. 바깥과 수평으로 된 갱도만 드나들었고, 광차 끝에 올라타 이동했기에 걸을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식사도 막장과는 달랐습니다. 도시락을 권양실의 발전기 위에 올려두면 점심(3교대로 작업을 하는 광산에서는 밤 8시나 새벽 4시에 식사를 해도 점심이라고 해요.) 밥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권양기 기사가 김치찌개나 라면도 끓여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20일 정도 했으니, 갑반부터 을반과 병반까지 모두 경험한 때였습니다.
퇴근을 하려는데 김세기 계원이 어두운 얼굴로 다가와 말했습니다.
“전기차 기사가 다른 사람을 쓰겠다고 하니 정덕수 씨가 이해를 해줘요. 아마도 예전부터 아는 사람이 오니까 그 사람과 함께할 생각인 거 같아서 나도 더 뭐라고 하기 어려워서 그래요.”
김세기 계원의 말 속에는 미안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탄가루에 절은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인간적인 정이 서려 있었습니다. 탄광은 늘 어둡고,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계원으로서, 그도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막장을 들어가도 되고, 아니면 폐석을 처리하는 보다까시를 해도 돼요. 바깥에서 일을 하면 돈은 적지만 덜 위험하고 공기도 좋아서 난 정덕수 씨가 차라리 밖에서 일을 하면 좋겠는데 어때요?”
밖에서 일한다는 것은 덜 위험하고, 탄가루에 찌든 공기를 막장만큼은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생계의 문제로 직결되었습니다. 2월의 태백산 자락은 여전히 겨울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았고, 산등성이마다 하얀 눈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차디찬 공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석탄 먼지가 태양을 가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날린 탄가루가 세상을 덮었습니다.
막장에서는 하루가 끝나면 손톱 밑까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기침을 하면 목구멍에서 석탄 가루가 함께 섞여 시커먼 가래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더 많은 돈이 있었습니다. 위험수당, 생산량에 따른 성과급, 그리고 무엇보다도 탄을 캐는 손길 하나하나가 곧 생존을 의미하는 곳이었습니다.
잠시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차디찬 공기 속에서도 탄가루 냄새가 섞여 들었습니다. 김세기 계원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제가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했습니다.
“막장에서 계속 일하겠습니다.”
말을 내뱉으며 제 마음 속에서도 결심이 굳어졌습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탄광 속은 더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었습니다. 막장은 어둡고 깊은 곳이었지만, 그곳에서의 노동은 제 몫이었습니다. 그것이 비록 거칠고 혹독한 길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 길을 걸어가기로 선택했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더 안 좋아졌습니다. 3월 어느 날, 방우리를 받고 입항하는데 멀쩡하던 도시락이 풀려 시커먼 물이 흐르는 도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캐프등도 불이 나갔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김세기 계원이 다가와 자신의 캐프등을 벗어 내밀었습니다.
그 바람에 10분 남짓 지체되었는데, 갑작스럽게 비상신호가 울렸습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누군가 현장에서 전기 신호를 거칠게 울리도록 교육을 받았기에 그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배치를 받아 들어가야 했던 3편 7크로스에서 천장에서 돌이 떨어지는 낙반 사고가 발생해 사람이 다쳤습니다. 머리와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광차에 실려 나와 곧장 고한의 지정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만약 도시락이 빠지지 않았고, 캐프등도 고장 나지 않았다면 그 사고는 나에게 닥쳤을 것입니다.
그날의 사고로 그는 10주라는 중상을 입고 입원을 했습니다. 더러 손가락을 다쳤다고 병원에 입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병원에 입원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기본급의 60%를 받으며 공상 처리를 받는 점을 노려 고의적으로 사고를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탄광에서는 한 달에 두 번 ‘햇돼지잡기’라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막장 간다’는 말은 광산에서 사용하는 은어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선택하는 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탄광은 가혹한 환경이었고, 조건만 맞으면 누구나 탄광을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렇기에 탄광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들고났습니다. 하루아침에 새로운 얼굴들이 나타나고, 함께 일을 하던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누구든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나고 싶어 했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하지만 떠난 자리는 곧 또 다른 누군가로 채워졌고, 탄가루가 가득한 막장은 언제나 새로운 이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광원들이 막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들에게는 의무가 하나 생겼습니다. 후산원은 2,000원, 선산원은 4,000원을 걷어 식당으로 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햇돼지잡기’였습니다. 탄가루를 뒤집어쓴 얼굴들이 환한 불빛 아래로 모이고,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익어갑니다.
탄광은 탄가루와 함께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온몸이 검게 물들어도, 기침을 할 때마다 목구멍에서 검은 가래가 섞여 나와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햇돼지잡기의 삼겹살 기름 한 점이면, 그 모든 탄가루가 씻겨 나간다고 믿었습니다. 누군가는 미신처럼 여겼고, 누군가는 웃으며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탄가루를 씻어낼 수 있다는 작은 위안이었습니다.
깊은 막장에서 올라온 이들이 소주잔을 부딪치며 삼겹살을 씹는 모습은, 마치 숨을 돌리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탄가루를 씻어내는 기름진 고기 한 점, 그것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또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문득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날이 더 안 좋아지셨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으로 어머니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맘 먹고 두꺼운 원고지를 몇 묶음 샀습니다. 퇴근을 하면 잠들 때까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의 피로가 쌓였지만, 펜을 쥔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막장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던 어머니의 존재를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습니다.
그때 드라마에서는 ‘사랑과 진실’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김영옥 배우가 남원댁이라는 비중이 크지 않은 배역으로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유독 특별한 인물로 다가왔습니다. 어머니와 동년배였고, 얼굴도 참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저는 자연스레 그 배우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어느 순간 제 마음속에서 한 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쓰는 소설이 언젠가 드라마가 된다면, 반드시 김영옥 배우에게 어머니 역할을 맡겨야겠다.’
어두운 막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지탱해 주었다. 삽을 쥔 손과 펜을 쥔 손은 서로 다른 일을 했지만, 둘 다 저의 생존을 위한 도구였고 목적이었습니다. 탄가루가 가득한 공간에서 몸은 고단했지만,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저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막장생활을 버티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어두운 막장에서 글을 써 내려가는 힘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이 이야기를 완성해야 했습니다.
3개월을 어머니를 보살핀다는 이유로 형은 일을 하지 않았고, 회사로부터 기본급 60%만 받으며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김세기 계원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정덕수씨 형을 좀 보게 역 앞 다방으로 오라고 해요.”
그렇게 전한 지 이틀 뒤, 형도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4월이 되고 쉬는 날이었습니다. 을반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을 때, 정말 많이 안 좋으셔서 걱정을 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 어머니의 “아이쿠야!” 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무사하시구나’ 하며 다시 잠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어머니가 계신 방문을 열었습니다. 전등을 켜자 어머니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조용히 계셨습니다. 다가가 살펴보니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습니다.
그길로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형과 형수도 놀라 달려왔고, 날이 밝자 동생들과 친척들에게 전보를 쳤습니다.
사흘의 장례식을 치르고 다시 출근을 했지만, 더 이상 막장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퇴근길에 김세기 계원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정덕수 씨, 계속 일을 할 건가요? 난 정덕수 씨가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좋겠단 생각인데…”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고, 떠나고 싶으면 그냥 떠나도 괜찮아요.”
다음 날 월급을 받자마자 더 이상 그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어 열차를 탔습니다.
차창 밖으로 시커먼 석탄더미와 대비되는 푸른 산자락이 이어졌습니다. 연둣빛 새 잎이 막 피어나고 있었고, 파란 하늘 아래 나뭇잎들은 살랑이며 반짝였습니다.
먼지가 자욱한 갱도 속에서 보던 어두운 풍경과는 달리, 세상은 따뜻한 봄의 빛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오랫동안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권혁재(중앙일보 사진전문 기자) 아우의 사진을 허락도 없이 빌려와 이렇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지금 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한계령’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우님, 올 봄에 만나서 근사하게 소주 한 잔 사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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