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이름으로 광장을 짓밟는가
– 헌법을 가르쳤던 자가 민주주의를 배신할 때
광화문광장에는 아직도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한남동 저택 앞에서, 남태령 고개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체온으로 겨울을 견디며 외쳤던 건 단 하나였다.
“이게 나라냐?”
그날, 바람은 날카로웠고
광장의 숨결은 뜨거웠다.
헌법은 그때, 추위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종이 위가 아니라 살결 위에,
조문이 아니라 심장 위에.
그 순간, 한 사람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야,
서울대 총장까지 지냈다는 한 헌법학자가,
민중의 절규를 “하해와 같은 용서”로 덮자고 말한다.
그는 말한다.
“탄핵은 기각될 수도 있었다”고.
“계엄은 해제되었고, 내란은 미수였다”고.
“검찰과 법원이 정치에 침식되었다”고.
그러나 우리는 묻는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헌법을 읽었는가.
헌법 제1조 2항은 분명히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은 잊지 않았다.
그날, 광화문에는 늙은 미술인들이 깃발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광화문미술행동’이라 불렸고,
깃발은 칼날처럼 바람을 가르며 흔들렸다.
그 행진은, 그 발자국은 ‘시각의 아우성’이었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몸으로 그린 증언이었고,
침묵이 낳은 언어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노(老) 서화가는
남태령 대첩과 내란수괴 탄핵을 부르짖었을 것이다.
없는 여비에도 용기를 휘날리며 먼 거리를 달려왔을 것이다.
아픈 무릎으로 기원의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들을 응원하며 시를 지었고,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들이 춤춘 바닥,
그들의 손에 건네진 종이컵.
어묵국물 한 컵, 차 한 잔.
무얼 바라서였겠는가.
명예도, 대가도 아니었다.
그저 함께 버티고 함께 견디기 위한
하나의 따뜻함, 하나의 연대.
눈보라 치던 한남동의 밤,
찬 아스팔트 위에 몸을 던진 이들은
은박지로 감싼 체온 하나로, 새벽을 지켰다.
그들을 우리는 ‘한남동 키세스’,
‘한남동 돌부처’라 불렀다.
그들은 시인이었고, 화가였으며,
노동자였고, 어머니였다.
그들이 지킨 것은 길이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의 마지막 존엄이었다.
그런데 이 헌법학자는 말한다.
“대타협”으로 서로 털고 가자고.
“법치는 정치의 도구가 되었다”고.
그의 말은 헌법 위에 덧칠된 유예의 미사일 뿐.
그의 중재는 정의가 지워진 자리 위에서
이성의 얼굴을 한 망각에 불과하다.
진실 없는 용서란 없다.
기억을 덮는 관용은 없다.
“헌법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자들을 이제는 용서하자.”
이 얼마나 위선인가.
광장을 지킨 이들은 용서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을 원했고, 책임을 요구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완성이었다.
서울대 총장까지 지냈던 이 헌법학자는
자신이 배운 이론에 취해, 민중의 고통과 분노,
피와 땀으로 새긴 헌법을 지워버리려 한다.
그 무도한 시도는 노장의 고매한 중재가 아니라,
노망(老妄)한 지식인의 정치적 자학이며
헌법에 대한 배반이다.
국민은 관용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지는 않는다.
그는 말한다.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자”고.
하지만 우리는 말한다.
헌법을 무시한 자들에게 민주주의는 관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광장을 지킨 이유이며,
깃발을 들고 추위를 견딘 이유이며,
차 한 잔에 온기를 담은 이유이고,
눈발 속에서 춤을 추며 새벽을 기다린 이유다.
조간, 신문배달을 할 아이들이 피곤한 몸을 가누며 보급소를 찾아들 시간에 맞추기라도 한 듯 새벽 4시에 한국일보는 ‘한국의 창(窓)’이란 코너에 “국민들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자”는 제목의 시론을 하나 올렸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용서하자는 것인지? 종일 4월의 역사들을 정리하며 내내 그 글을 읽은 마음을 털어내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대립·갈등의 골을 끝내야 할 때
계엄, 탄핵, 내란을 통합의 흐름으로
연내 개헌, 대선과 총선 모두 치러야
이 세 개의 핵심적인 소제목으로 뽑은 글을 쓴 인물은 서울대총장을 지냈다는 성낙인이란 법학자인데 그의 시론에 문장별로 제가 반박문을 한 번 써보겠습니다.
“대통합”이란 말은 상처를 덮는 붕대가 될 수 없습니다. 헌법이 짓밟힌 네 달은 단지 시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시계가 멈춘 시간이었습니다. 갈등은 헌재가 아닌 권력을 사유화한 자들이 초래했고, 속죄해야 할 이는 광장이 아니라 법을 자신의 방패로 삼은 기득권 세력들입니다. 통합은 진실 위에만 가능하며, 통합을 말하려면 먼저 책임을 지고 그들 스스로의 속죄의 벌을 자청할 일입니다.
비상계엄은 '외견상 위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이 되었습니다. 내란은 미수였기에 가볍게 볼 수 있지 않고, 도달하지 못했기에 더욱 음습하게 여전히 잠재적 워험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형사불소추’란 특권은 통치의 무결성無缺性을 담보한 헌법 수호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그 행위가 반 헌법적 권력 연장을 위한 것이라면 더 이상 방패가 될 수 없습니다. 책임을 야당에 전가하며 “기각도 가능하다”는 논리는 법학자로서 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이는 권력 범죄의 본질을 희석하려는 위험한 말장난이며 그 순간부터 법은 방향타가 망가진 거치바다의 작은 배처럼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책임을 야당에 나눠 묻는 순간, 죄는 흐려지고 윤리는 퇴색하게 됩니다. 더구나 정치란 책임의 기술이지 분산의 예술이 아닙니다. 탄핵은 기각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라 반드시 ‘인용’되어야만 하는 ‘정의입니다.
진실을 덮는 타협은 화해가 아니라 망각이며 정치적 거래로 정의를 회피하는 순간, 공화국의 윤리는 무너지게 됩니다. 사법의 장으로 내몰린 것이 아니라, 헌법의 문을 스스로 나간 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법의 정치화가 두렵다면, 정치는 스스로 정직했어야 했습니다. 미래란 과거의 책임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 책임을 털어낸 뒤에 얻는 선물이 아니란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승복은 조건이 아니라 자세여야 하며, 대타협이 아닌 정명正名이야말로 분열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87년 체제를 종식시키고 제7공화국을 열자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탄핵의 기각이나 각하를 전제로 한 개헌론은 책임을 피해가려는 정치적 전환술에 불과합니다. 정치는 책임 위에 서야 하며, 국민의 고통을 기억 속에 봉인하려는 대타협이 아닙니다. 과오를 직면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과정, 거듭 말하지만 정명正名 없이는 그 어떤 개헌도 필요 없는 일이며 그 어떤 체제도 민심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기틀 위에 설 수 없습니다.
『논어論語』에서 공자는 자로子路가 “정치를 맡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답했습니다. 이 ‘필야정명호’란 대답으로 공자는 이 구절을 통해 “명분과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통치자는 통치자로서의 책임과 덕목을 다해야 하고, 신하는 신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으면 말이 어긋나고, 말이 어긋나면 행동에 혼란이 생기며 결국 사회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즉 공자는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어긋나고, 말이 어긋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는 결국 사회 혼란으로 이어진다고 대답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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