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장터, 대화는 어디로 갔을까
— 광장은 요구하는데 헌재는 침묵합니다
양양은 4일과 9일이 장날입니다. 예전 같으면 이른 아침부터 장터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좌판마다 봄나물이 넘쳐났으며 상인들의 목소리가 골목마다 메아리쳤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장이 서는 날도 시장에 나가보면 썰렁합니다. 장날이면 늘 만나던 상인들도 보이지 않고 빈 자리가 유독 많습니다. 무언가 빠져나간 자리처럼 텅 빈 공간이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장을 둘러보아도 찾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그나마 나온 이들도 대개는 지갑을 여는 대신 말만 건넵니다. 가격표를 보고 다시 내려놓는 손길이 많아졌습니다. 달래 60~70그램에 5,000원 냉이 한 줌도 5,000원. 봄나물의 향은 여전하지만 그 향을 즐길 여유는 점점 사라지는 듯합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때 팔리지 못한 나물들이 며칠 뒤 다시 장에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24일 장날이면 지난 장에 나왔던 나물들을 그대로 들고 나올 아주머니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저장 시설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달래나 냉이 같은 봄나물은 냉장고 속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고 몸부림칩니다. 스스로를 녹여가며 잎을 키우려 하기에 금세 풀이 죽고 맛이 상해버립니다.
우리 사회도 어쩌면 이 봄나물과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상처 입고 주저앉은 채 스스로를 부풀리고 지탱해 보려 하지만 그 끝은 늘 시듦과 침묵입니다.
사람들은 경기 탓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경기의 책임을 두고는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민주당이 탄핵을 너무 많이 해서 나라가 이 모양이지.” 또 다른 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윤석열이랑 국민의힘은 경제는 뒷전이고 정치 장난에만 빠졌잖아.”
잠시 언성이 높아지지만 그 말들은 서로를 설득하지 못합니다. 대화는 깊어지지 않고 각자의 말만 진실처럼 날아다니다가 누군가 한 마디 던지면 곧 조용해집니다. “정치 얘긴 하지 맙시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마치 장터 전체에 눌린 듯한 침묵이 찾아옵니다. 말은 사라지고 오가는 시선들만 시장 바닥을 스칩니다. 이 침묵은 어쩌면 가장 무서운 공통어인지도 모릅니다. 말이 막힌 광장은 민주주의의 종착역처럼 느껴집니다.
한편 광장 저편에서 정치는 여전히 자신의 게임을 이어갑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에 올라갔지만 결론은 지지부진합니다. 법리 검토는 깊다고 하면서 국민들의 목소리는 얕게 듣습니다. 헌재는 중립을 말하지만 침묵과 지연은 그 자체로 판단입니다.
탄핵이라는 단어는 이제 너무 많아 익숙해졌고 그 익숙함 속에서 절박함은 빛을 잃었습니다. 정의는 지체될수록 멀어지고 판단은 미뤄질수록 의심을 낳습니다. 정치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광장의 침묵은 길어지고 있습니다.
양양의 장터 그 고요한 풍경 속에는 우리의 정치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비춰집니다. 비어 있는 좌판처럼 비워진 약속 값만 오르고 의미는 사라진 대화 말은 있지만 대화는 없는 사람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나라는 정말 국민의 나라입니까? 우리의 말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민주주의는 선거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대화에서 피어나고 장터의 언쟁 속에서 자라고 서로를 설득하려는 말들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대화의 끈을 놓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 대신 침묵과 회피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헌재는 결론을 미루고 정치인은 책임을 유예하며 국민은 또다시 봄나물 앞에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비어 있는 것은 장터만이 아닙니다. 광장도 헌법도 우리 마음도 비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며칠 뒤면 양양의 현산공원과 남대천 제방도로에는 벚꽃이 만발할 시기입니다. 2017년 3월 말, 광화문 광장에서 활동하다 잠시 양양군청에 볼일이 있어 내려왔을 때가 떠오릅니다. 비가 그친 뒤 햇살 속에 핀 현산공원의 벚꽃은 정말이지 곱게 흐드러졌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묵묵히 피어난 봄이었습니다. 봄은 달력대로 찾아오고 있지만 정작 마음은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어나는 꽃들 앞에서도 우리는 무기력하고, 봄의 빛깔보다 무거운 현실의 그림자가 더 짙게 느껴집니다.
광장도, 헌법도, 우리 마음도 비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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