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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포커스

불에 탄 산과 그 뒤에 남은 것들

by 한사정덕수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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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탄 산과 그 뒤에 남은 것들

강원 동해안 산불 30년의 기록과 교훈

 

현재 전국에서 발생한 산불로 난리입니다. 2025323일 정오를 넘긴 현재 전국 10곳에서 산불을 잡기 위해 소방헬기가 분산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산림청도 실시간산불정보를 심각단계를 유지한 상태입니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해마다 봄이 되면 대형 산불로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그중 1996423일부터 25일까지는 고성군 죽왕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3,834헥타르를 태우며 당시까지 역대 최대 규모의 산불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불은 군부대 사격장에서 불량 TNT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꽃이 강풍을 타고 번지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평창, 양구, 인제에서도 동시다발적인 산불이 발생해 초기 대응이 지연되었고, 49세대 140명의 이재민과 약 227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200544일 밤 1153, 양양군 화일리의 도로변 야산에서 시작된 산불은 제게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32시간 동안 꺼지지 않았던 그 불길은 낙산사라는 천년 고찰을 집어삼켰고, 문화재와 산림, 주민들의 삶까지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초속 15~20미터의 강풍이 화재를 빠르게 확산시켰고, 이 강풍은 양간지풍이라 불리는 지역 고유의 기상 현상이었습니다.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으로 불어내려오는 서풍은 마치 화마에 날개를 달아준 듯했습니다.

불은 45일 오후 낙산사로 번졌고, 6일 오전 8시가 되어서야 진화되었습니다. 그 사이 낙산사의 대웅전, 종각, 일주문, 보물 제479호였던 낙산사 동종 등 주요 건물 21채가 소실되었습니다. 보물 지정조차 해제될 만큼의 손실이었습니다.

인근 산림 약 150만 제곱미터, 무려 973헥타르의 산림이 불탔고, 수많은 야생동물의 서식지도 사라졌습니다. 이후 복원작업이 진행되어 2015년에서야 낙산사는 화재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201911일에도 양양군 서면 송천리 떡마을 입구에서 새해 첫날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축구장 면적의 28배에 해당하는 약 20헥타르의 산림이 소실되었고, 300여 명의 주민이 대피했습니다. 인명 피해나 주택 소실은 없었지만, 송이 채취지 등 지역 주민의 주요 소득원이 피해를 입어 간접적 재산 피해는 매우 컸습니다.

당시 화재의 원인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실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조사되었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습니다.

201944, 또 한 번의 대형 산불이 고성과 속초를 덮쳤습니다. 이번에는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일성콘도 인근 전신주에서 발생한 불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초속 30미터에 달하는 강풍, 역시 양간지풍이 산불 확산을 가속화시켰고, 화재는 불과 21시간 만에 산림 1,757헥타르를 삼켰습니다. 주택 401, 축산시설 925곳을 포함한 총 916곳의 시설물이 전소되었고, 두 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4,0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피해액은 3,054억 원에 달했습니다.

그날 전국의 소방차와 인력이 강원도로 모였습니다. 헬기 32, 장병 16천여 명이 투입되었고, 소방청은 대응 수준을 최고 단계인 3단계로 격상했습니다. 정부는 국가재난사태를 선포했고, 화재는 총력 대응 속에 가까스로 진압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 이미 예견되었던 비극이 반복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또 하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처럼 대형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겪는 또 다른 고통, 그것은 바로 피해보상의 지연책임 회피입니다. 특히 2019년 산불 당시 전신주에서 시작된 화재의 경우, 한국전력공사의 관리 책임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었으나, 한전은 충분한 배상과 책임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 주민들은 절차의 지연, 자료 요구, 복잡한 법적 기준 앞에서 또 한 번 무너져야 했습니다.

산불로 전소된 집은 복구될 수 있지만, 삶의 시간과 기억, 공동체의 회복은 시간이 아니라 정당한 책임과 보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산불 피해자들은 행정의 회피와 기업의 무책임 앞에 서 있습니다. 실질적 손실보다 정신적 고통은 훨씬 오래가고, 구조적인 무관심은 피해를 더 깊게 만들고 있습니다.

202235일에는 강원도 동해시에서 또 다른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이번 화재의 원인은 한 60대 남성이 주택에서 고의로 불을 지른 토치 방화였습니다. 이 불은 강풍을 타고 동해·강릉 지역으로 확산되어 약 4,000헥타르의 산림을 태웠고, 동해시에서는 181채가 전소되고 113채가 일부 소실되었습니다. 이재민은 53세대 111명에 달했으며, 산불은 207시간 30분 만에 주불이 진화되었습니다. 정부는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산불 감시 체계와 무인 감시 장비, 전문 예방진화대의 확대가 추진되었습니다.

2023411일에도 강릉시 경포 일대에서 또다시 대형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이날 오전 830분경 시작된 산불은 강풍을 타고 빠르게 번졌고, 8시간 만에 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산림 379헥타르, 축구장 530배에 달하는 면적이 불탔고, 1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다쳤으며, 217가구 48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266동의 건축물과 122동의 농업시설이 소실되었고, 7만여 그루의 소나무와 15천여 그루의 활엽수가 사라졌습니다. 총 피해액은 약 398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강릉 경포대' 현판 7기는 긴급 대피 후 보존처리를 거쳐 다행히 제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저는 고성, 속초, 양양, 강릉을 비롯한 수많은 산불 현장을 직접 찾아 취재했습니다. 산림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불에 타버리는 광경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화마는 늘 한순간이고, 피해는 영원한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산불을 단지 자연재해로 여길 것이 아니라, 명확한 인간의 대비와 태만이 낳은 사회적 재난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건조한 날씨와 강풍이 자주 발생하는 봄철 강원 동해안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체계적인 예방 시스템과 초기 대응 시스템 강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동시에 지역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교육과 대비 훈련이 수반되어야 하며, 문화재와 취약 시설에 대한 보호 체계도 정비되어야 합니다.

불에 탄 것은 단지 나무나 건물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뿌리 깊은 숲의 정령들과, 천년 사찰의 종소리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주민들의 환경까지 사라졌습니다. 그 잿더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기억해야 할까요?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화마는 숲과 자연을 삼키며 많은 이재민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원도의 숲 어딘가는 또다시 봄을 맞고 있을 것입니다. 연둣빛 새순이 돋고, 산벚꽃이 피기 시작하며, 아직 살아남은 나무들이 또 한 계절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숲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30년 동안의 산불이 남긴 흔적 위에 새겨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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