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양양은 끝내 눈을 만나지 못한 채 지나갑니다. 사실 눈이 내리면, 최근 강원민예총 음악협회장을 맡은 홍정원 가수의 ‘폭설’이라는 노래를 이야기로 풀어볼 생각이었는데, 이제 2월도 사흘 남았으니 이대로 있을 수 없어 예전 사진이나 보며 글을 써보려 합니다.
한계령에 눈이 내리면 저는 늘 촬영하는 풍경이지만, 그래도 막연한 기대를 안고 찾습니다. 날리는 눈발은 때때로 절절한 가락을 타고 흐르는 구성진 소리꾼의 절창처럼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미련 많은 사랑을 애타게 참는 소녀의 흐느낌 같기도 합니다. 늘 같은 느낌일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제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요. 때로는 분수를 지키며 조용히 할 일을 하는 선비의 모습 같다가도, 물불 안 가리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일시에 터뜨리는 광폭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폭설의 이미지는 아무래도 소녀나 선비보다는, 광폭하게 폭주하는 성난 사내의 모습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폭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류근, 2010, 『상처적 체질』
류근 시인의 ‘폭설’은 단순한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화자의 감정이 투영된 상징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퍼붓는 눈은 이별의 슬픔을 더욱 깊고 강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눈이 내리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이며 감정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눈은 이별의 기억을 지우려는 몸부림이지만, 결국 다시 그 기억 속에 갇히게 되는 아이러니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설’을 자칭 ‘낭만 홍땡이’라고 하는 홍정원 가수는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할까요? 그의 노래를 이쯤에서 들어보겠습니다.
한 음 한 음에 영혼을 실어, 서서히 날리는 눈발처럼 흩뿌려지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한 조각씩 부수어 온 풍경을 덮으며 퍼붓는 폭설처럼 가슴에 새겨 넣는 듯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허공을 떠돌다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리는 눈발처럼 가슴 깊이 자리합니다.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길게 참았던 바람이 휘몰아치며 퍼붓기 시작하는 눈발이,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대지에 내려앉는 순간 차분하게 잦아듭니다.
홍정원 가수를 처음 만난 건 2018년 5월 19일이었습니다. 최근 그는 ‘춘천민예총 음악협회장’을 맡았습니다. 춘천에서 ‘문화공작소 낭만’의 대표로 활동하며, 1996년 춘천MBC 28주년 창사특집 전국 MBC 주부가요열창에서 수와진의 ‘영원히 내게’를 불러 대상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2012년 시집과 함께 『누구나 한 번쯤』(귀갓길, 그래그래, 봄날에는)을 발표하며 함춘호, 장혁 세션으로 싱글앨범 1집을 내놓았고, 2016년엔 ‘춘천에 가면’을 타이틀로 싱글앨범 2집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제가 처음 그를 만났을 당시, 이제하 시인의 ‘모란동백’과 여기 소개한 ‘폭설’을 장혁의 세션으로 3집 싱글앨범에 담아 발표했습니다.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아 한동안 활동이 뜸했지만, 최근 다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제가 쓴 시 ‘한계령 2’를 포함해 새로운 음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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