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불현 듯 누군가 기억에 떠오릅니다. 날씨와 계절, 또는 차 한 잔이나 음악을 듣다가도 불쑥 기억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1998년 서울의 거리는 가을빛으로 물들었었습니다. 은행나무는 노란 불꽃처럼 번지고, 플라타너스 잎들은 바람에 흩날리며 도심을 유영했습니다. 가로수 아래 떨어진 낙엽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을의 완성을 알렸습니다. 성산동에서 아침에 출근할 때 리치몬드제과점 앞 언덕에서 청기와예식장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불쑥 오후엔 남양주의 하이디하우스에 한 번 찾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양주의 광릉수목원 뒤편, 용암리의 하이디하우스에서도 단풍이 붉게 익어갔습니다. 그곳은 한때 음악과 이야기, 사람들의 웃음이 가득했던 곳. 그곳에서 저는 먼 훗날 기억으로 떠올릴 가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요.
낮에 김민지 대표에게 남양주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더군요.
“우리 정 본부장님, 그러다 잘리는 수 있어요. 미스 황을 제대로 키워놓았다고 이젠 너무 믿고 모두 맡기는 거 같아요. 미스 황부터 확 잘라버릴까 보다. 뭐 거기에 혹시 애인이라도 숨겨 놨어요? 오늘은 같이 가야지 안 되겠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모델 둘도 싱글거리며 거들더군요.
“맞아요. 선생님, 우린 정 선생님이 디자인한 옷을 입으려고 하는데 맨날 피팅룸엔 미스 황인가 그 분만 오더라고요. 아무래도 정 선생님 누구 사랑하는 사람 생기셨나 봐요. 오늘 우리 다 같이 하이디하우스란델 가봐요.”
그날 오후 해가 넘어가기 전 하이디하우스엔 미스 황과 김민지 대표, 그리고 모델 2명까지 함께 갔습니다. 주변 풍경을 둘러 본 김민지 대표가 그러더군요.
“정 본부장님 성격이라면 여기 눌러 살라고 해도 당장 고맙습니다 하고 눌러 살 정도 되네요.”
그날 저녁 바람이 서늘하게 불 때 모닥불을 쬐며 커피를 마시는 우리 팀원을 위해 안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묻을 때였습니다.
“아까 우리 식사를 하고 계산을 하려는데 젊은 친구가 정 시인님하고 잘 아는 분들이냐고 하던데요? 왜 선생님을 시인이라고 하죠? 그리고 처음엔 누굴 얘기하는지 몰라서 누구를 묻느냐고 하니 정 선생님을 가리키더라고요. 그래서 김민지 웨딩컬렉션의 본부장님이라고 하니까, 거기서 오셨냐고 해요.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식사비를 안 받아요. 그리고 커피도 얼마든지 가져다 마시라고 하며 이 모닥불을 알려줬어요.”
계산대에서 아들이나 직원이 키가 큰 미녀들이 저와 넓은 창가자리에 앉아 함게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는 걸 보고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저녁시간엔 토요음악회도 있었습니다. 모닥불 밑에 잿불에 묻어두었던 고구마를 꺼내주자 맛있게들 먹더군요, 음악회가 있다고 하자, 보고 가겠다고들 해서 식사를 했던 무대 바로 앞 창가 넓은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늘 그렇지는 않았는데 11월인데도 그날은 카페 안에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통기타 라이브를 하는 친구가 공연을 마치고 곧장 음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노래 2곡을 부른 다음 하이디하우스의 주인이 무대에서 예의 그 끼를 발동합니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이 노래 누구의 노래 제목이 뭔지 아시면 손드세요.”
“양희은 노래 한계령 아녀?”
이미 그렇게 처음부터 말을 하던 모델이 손을 번쩍 들고 “저요”를 외치며 일어서더군요.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6번 테이블 미녀분 누구의 무슨 노래죠?”라 하자 “양희은 한계령요.”라 하더군요.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정답을 알려줬다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그 모델과 마주 앉아 무대를 등을 지고 있어야 되었기에 몸을 돌려 무대 방향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 덕에 오해는 크게 사지는 않았지만 이미 같이 일을 하며 알고 있으며 이런 자리에서 그러느냐고 할 수 있는 상황이긴 했습니다.
그런데요, 직장에서 제가 시를 쓴다는 사실들을 모릅니다. 더구나 양희은의 한계령을 제가 시를 썼다고는 상상도 못하고들 있었지요. 거꾸로 차홍렬 촌장도 얼마전에서야 제가 제법 큰 웨딩드레스 업체와 패션회사의 본부장으로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대표와 직원, 그리고 모델까지 동행이 되어 있다고는 몰랐을 겁니다.
“바로 이 노래 한계령을 쓴 시인이 오늘 멀리 설악산에서 하이디하우스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쪼매 시낭송을 잘 합니다. 한 번 무대로 초대해서 시낭송을 듣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누가 이 노랫말을 쓴 시인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는 팀을 향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고 무대로 올라갔습니다. 무대엔 은행잎을 잔뜩 깔아 놓았습니다. 배성환 교수께서 손짓을 하시더니 무대로 나오시더군요. 아마도 김민지 대표와 미스 황, 그리고 두 모델도 배성환 교수가 한계령 노랫말을 쓴 시인인줄 알았을 거고, 저는 왜 무대로 올라가나 싶었을 겁니다.
무대로 올라온 배성환 교수께서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으셨습니다. 이곳 아이디하우스의 그랜드 피아노는 삼익악기에서 배성환 교수가 만들어낸 디지털 피아노였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한계령에서”로 운을 떼자 배성환 교수께서 피아노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And now, the end is near
그리고 이제, 끝이 가까워졌네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그래서 나는 마지막 막을 마주하네
My friend, I'll say it clear
내 친구여, 분명히 말하리라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내가 확신하는 내 입장을 밝히겠네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나는 충만한 삶을 살았네
I've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모든 대로를 다 여행했지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리고 그보다 더, 훨씬 더 중요한 건
I did it my way
내 방식대로 했다는 거야
이 연주에 맞춰 전혀 다른 시, 한계령에서를 끝까지 낭송을 했습니다. 정말 실력 좋은 연주자는 절대로 연주가 낭송보다 두드러지게 돋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정말 잘 어우러지게 연주를 하죠. 사실 저는 이 마이 웨이를 들으며 한계령에서 시를 썼습니다. 그때 당시엔 일본에서 모든 전자제품을 소형화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하며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으로 TV와 카셋트 플레이어까지 동시에 되는 제품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배낭에 이걸 중고로 구입을 해서 넣고 다녔으니 미친놈이었지요.
저는 무대에서 배성환 교수님께 배경음악을 멋지게 연주를 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영화 “영광의 탈출(Exodus)”의 주제곡은 “The Exodus Song”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오려는데 차홍렬 촌장이 시낭송 하나를 더 하라고 손짓을 하더군요. 그대로 무대에서 조금 물러서서 배성환 교수께서 연주하는 “The Exodus Song”을 들었습니다. 디지털 피아노로 배성환 교수께서는 이 음악을 오케스트라가 협연을 하듯 웅장하게 표현을 하십니다.
배성환 교수께서 연주를 마치고 ‘목마와 숙녀’, 그리고 ‘님의 침묵’까지 낭송을 하고서야 무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희 팀의 그 황당해 하는 표정이라니…
자신들은 그냥 주말이면 산이나 가려고 하고 얼마 전부터 남양주로 자주 간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시인이고 낭송까지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홍대나 신촌, 대학로에서 함께 술 한 잔 할 때 주인들이 왜 그렇게 친절하고 반가워했는지를 그때서야 알게들 되었지요.
그때 홍신복 선생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다시 앉아 홍신복 선생에 대해 소개를 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 ‘나성에 가면’을 부르던 세샘트리오의 멤버였던 그는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던 사람. 세월이 흘러도 음악을 향한 그의 애정은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했지요. 그는 하이디하우스에서 종종 연주를 했고, 가끔은 또 다른 가수 장고와 함께 불쑥 찾아와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무대를 채우는 것은 단순한 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배어 있는 선율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곱던 얼굴을 오랜 신장병으로 검게 변해 있었기에 모습만 봐서는 한때 인기 많던 가수였다고는 알 수 없었던 겁니다.
그날, 저는 공연이 끝난 무대 앞에서 잠시 자리를 옮겨 홍신복 선생에게 말했습니다.
“홍 선생님 여기 하이디하우스 스피커가 문제예요. 늘 치직거리는데, 빨리 손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홍신복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요. 오늘 연주하는데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내일 낮에 와서 같이 살펴봅시다.”
그렇게 약속이 정해졌습니다. 저는 자정을 넘겨서야 팀원들을 배웅하고 하이디하우스의 별채에서 잤습니다. 다음날, 선생과 장고는 다시 하이디하우스를 찾았습니다. 햇살이 가득한 오후, 우리는 엠프와 낡은 스피커를 점검했습니다.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스피커의 용량이 크기에 비해 엠프가 지원하는 출력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던 것. 오래된 장비들이 만들어내는 잡음 속에서, 선율은 흐트러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낙원상가로 향했습니다. 서울의 가을은 그 길에도 가득했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익숙한 거리의 풍경이 지나갔습니다. 음향기기들을 파는 가게를 돌아다니며, 무대에 적합한 중고 JBL 스피커 한 쌍을 골랐습니다. 투명 연결선도 한 마끼(100m)를 구입했고요.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니에요?”
홍신복 선생이 물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전선은 여유 있게 있어야 해요. 그래야 흐트러짐 없이, 맑은 소리를 내죠.”
장비를 들고 돌아오는 길, 서울의 거리에는 여전히 플라타너스 잎이 날렸습니다. 바람에 실린 낙엽들은 마치 오래된 음악처럼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하이디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스피커를 내리고, 새 스피커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습니다. 전선을 피복을 벗겨 납땜을 하고, 하나하나 연결선을 정리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소리를 만들고, 공간을 채우는 일을 했습니다. 마치 하나의 악기를 조율하는 것처럼, 가을 하늘 아래에서 우리의 손길이 선율을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새로운 음향 속에서 홍신복 선생과 장고, 그리고 김도균 챔버오케스트라 단장이 무대를 채웠습니다. 조율이 끝난 스피커에서는 선명한 기타 소리가 흘렀고, 무대 위의 노래는 더욱 깊고 풍부해졌습니다. 가을밤의 공기 속으로 선율이 퍼져나갔습니다. 저 멀리 광릉수목원의 나무들 사이로도, 용암리의 조용한 밤공기 속으로도.
노래가 끝난 후, 우리는 조용히 잔을 기울였습니다.
홍신복 선생이 말했습니다.
“소리, 좋아졌어요. 이제야 제대로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습니다.
“이제 하이디하우스에서 제대로 된 음악이 흐르는 곳이 되었으니 가을도 더 깊이 머물겠죠.”
그렇게 한밤중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하이디하우스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떠나고, 공간은 사라졌지만, 그날의 노래와 풍경, 그리고 선율은 여전히 봄이나 여름, 그리고 가을밤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을 것입니다.
서울의 거리에는 여전히 가을이면 은행잎이 흩날리고,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실려 떠다녔을 것이고 이제 봄을 빚어내기 시작할 겁니다. 광릉수목원의 숲은 여전히 복수초 노란 꽃을 품고 있고, 누군가는 그 골짜기 어느 카페에선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하이디하우스에 없는 시간 쪼개어 가득 채웠던 온갖 들꽃들도 여전히 피어날까 싶지만, 그 선율이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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