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향기/시인의향기

실종된 기억과 책임, 그리고 4월의 바다

한사정덕수 2025. 4. 1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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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부모로서 다시 마주한 그 11.

 

매년 416일이 가까워오면 마음속 어딘가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거의 글을 쓰지 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 그날을 기억하는 일은 저에게도 참으로 고통스럽고 조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저도 딸아이와 아들을 키우는 부모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말을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습니다. 혹여나 제가 쓴 글의 한 문장, 한 단어가 아직 치유되지 못한 누군가의 마음을 다시 후벼파는 일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감히 그 아픔을 안다고 할 수 없기에, 오히려 말없이 멈추는 것이 더 책임 있는 태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한다는 건 때로 침묵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이제는 말없이 보내온 지난 시간의 마음을 담아, 아주 조심스레 다시 기록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니까요.

그날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2014416, 제 딸은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고 등교했고,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으로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갔습니다. 저는 설악산국립공원 오색분소와 속초소방서 오색의용소방대 대원들과 함께 봄철 산불조심 강조기간 캠페인을 위해 설악산 대청봉 입구 통제소 앞에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의용소방대 서무반장을 맡고 있었고, 행사는 해마다 반복되는 연례 일정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공기는 유난히 뿌옇고 탁했습니다. 봄기운이라기보다는 누렇게 깔린 황사와 아직 만개하지 못한 꽃들만이 봄이 왔음을 어렴풋이 알릴 뿐이었습니다. 산은 잔뜩 눌린 듯 조용했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웃음보다 묘한 긴장감이 돌던 날이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몇몇 대원들과 함께 오색 입구 남설악식당에 들러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식당 벽면 텔레비전에 떠 있는 뉴스 화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다 위, 기울어진 큰 배 한 척이 말없이 부유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라는 이름. 그리고 그 배에는 아직 수백 명의 승객이 타고 있다고 자막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도 화면 어디에서도 구조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명보트를 띄우는 사람도, 헬기를 내리는 구조대도 없었습니다. 단지 멀찍이 해경 선박이 배 주변을 맴도는 장면만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던 우리 대원들은 하나같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앞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소방서 직원과 의용소방대원들 대부분은 각종 사고 현장에서 수습과 구조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의 방송 화면은 익숙한 구조현장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왜 저렇게 방관하고만 있지?”

 

“왜 아무도 배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거야?”

 

속삭이는 말들이 이어졌지만,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구난 현장에선 한순간의 판단과 행동이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놓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화면 속 시간은 정지된 듯,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구조가 진행 중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그 흔한 '현장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수십 명, 수백 명의 아이들이 배 안에 있다는 보도가 계속 이어졌지만, 화면은 오히려 더 정적이었고, 그것이 더 깊은 불안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평범한 아침, 익숙한 캠페인 활동, 뿌연 황사와 늦은 봄꽃들. 그리고, 예기치 못한 화면 속 배 한 척.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장면에서 우리는 무언가 매우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그게 앞으로 이 나라 전체의 시간까지 멈춰 세우게 될 비극의 시작일 줄은, 누구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을 때도 하늘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황사가 짙게 깔려 오전 내내 해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설악의 능선들도 마치 안개에 덮인 듯 흐릿하게만 보였습니다. 해가 떠 있는 줄조차 모를 만큼 무채색으로 번진 풍경 속에서, 의용소방대 대원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해산했고, 저도 곧장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무렵이었습니다.

서둘러 집을 나서느라 TV는 아침에 켜둔 채로 뉴스 화면이 계속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화면 하단에 고정된 자막이었습니다. "안산 단원고 학생 338명 전원 구조." 너무도 단호한 어조였기에, 저는 그 문장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기울어진 채 바다에 떠 있던 세월호의 모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은 인원이 구조되었다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 머릿속을 스친 건, 불과 30여 분 전 오색마을 남설악식당에서 TV로 본 뉴스 영상이었습니다. 배는 이미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었고, 수많은 인원이 배 안에 있다는 속보가 이어졌지만, 화면 속 바다는 너무도 조용했습니다. 구조선이 가까이 접근하지도 않고, 헬기가 오르내리는 장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경이 배 주위를 돌기만 했던 그 장면들이 자꾸만 걸렸습니다.

저는 그 자막이 사실이라면 곧 반가운 장면들이 이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학생들이 배에서 나오는 장면, 구조된 사람들이 항구에 도착하는 모습, 학부모들의 눈물이 교차하는 뉴스 특보.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화면은 같은 앵글만을 되풀이했고, '전원 구조'라는 자막은 그 진위를 증명할 어떤 장면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오전의 시간은 그렇게 점점 불안 속으로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TV 화면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앵글로 바다 위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구조 장면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마침내 화면에는 뱃머리만 바다 위에 겨우 남은 세월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뒷부분은 이미 수면 아래로 잠긴 채 선수 일부만 물 위로 남아 있었고, 그 위로 구조대원이 올라가 있는 장면이 비쳤습니다. 그러나 그 구조대원은 단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안으로 진입하는 모습도, 구출된 승객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얼마나 허망했는지를 절감했습니다. 그 시각까지 구조된 인원은 세월호에서 자발적으로 탈출해 바다 위로 나온 172명뿐이었고, 나머지 수백 명의 승객은 여전히 배 안에 갇힌 채였습니다. 그 누구도 배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그 사실을 방송 화면을 통해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목신의 춤

 

푸름도 지친 깊은 곳

해 저무는 소리 들리지 않는

적막한 해구에서

우리의 침묵 같은 외침

풀빛, 꽃빛으로 풀어내는 이 누구인가

 

파도가 들고나는 저곳에

가슴 바스러지도록 흐느끼는

눈물 젖은 영혼들

감싸 안으려 감싸 안으려

구름 낮게 드리웠는데

 

그때도

지금도 아닌

영겁의 시간이 빛바랜 훗날

푸름도 지친 깊은 곳

해 저무는 소리 들리지 않는

적막한 해구에서

우리의 침묵 같은 외침

풀빛, 꽃빛으로 풀어내는 이 누구인가

 

이해할 수 없는 정적 속에서 제 머릿속엔 또 다른 장면 하나가 겹쳐졌습니다. 2010326일 밤, 뉴스 속에서 처음 마주했던 천안함 침몰 사건. 그날도 이상하리만치 정보는 혼란스러웠고, 설명되지 않는 공백과 의문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호. 두 사건은 시기와 장소는 달랐지만,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장면들과 정부의 대응이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

 

1000개의 태양을 만나고

 

여기 한 어미의 무너진 슬픔

피 맺힌 절규로 일렁거린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데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그들은 슬픔조차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잊지 않으마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으마

어미가 어찌 네 초롱한 눈빛 지울 수 있느냐

 

퍽퍽한 빵 한 조각도 미안해

천 날의 태양이 빛나도

다시 맞을 그 빛은 네 목소리였으면

아비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그림을 그렸다

완벽하게 아픈 불면의 밤

바다를 한 양동이 길러 그렸다

푸르고 검은 세상에서 별이 된

이름들을 온 몸 내던져 그렸다

 

다시 또 하루를 잊지않겠노라

완벽하게 푸르고 검은 바다에 그린다

별이 된 그 얼굴, 그 이름들을.

 

왜 이런 비극과 혼란이 반복되는가. 왜 국민은 매번 같은 의문을 품게 되는가. 이명박과 박근혜, 두 정권 아래서 되풀이된 이 감춰진 진실의 그림자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제 가슴 속 어딘가에 오래도록 가라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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