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희생과 핏빛 선연한 동백꽃
이승만의 폭력적 정권과 그로 인한 기억의 아픔
1947년 3·1절 발포 사건은 제주 4·3사태의 서막을 알리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 하의 한국 정부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승만의 하와이에서의 행적과 상해 임정에서의 도둑질 등 죄상들이 밝혀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위협을 제거하려는 의도 아래 국가폭력을 행사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승만의 행동은 그가 내세운 자유민주주의와 애국이라는 이상과 전혀 다른 현실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정부를 세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반공을 명분으로 한 권력 유지였으며, 이에 대한 피해는 제주 4·3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승만의 폭력적 대응은 제주 4·3사태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승만은 과거의 친일 세력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부역했던 군과 경찰을 재등용하면서 친일 청산은 물 건너갔고, 그들은 새로운 국가의 경찰력과 군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승만은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과거 하와이에서의 폭력적 전통을 이어갔고, 그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민간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며 그들의 고통은 온전히 무시되었습니다.
특히 서북청년단의 등장은 이승만 정권의 폭력성을 더욱 극대화한 사건으로, 이들은 반공 이념을 앞세워 제주 4·3사태와 같은 사건에 깊이 개입하게 됩니다. 많은 민간인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학살당했으며, 서북청년단은 이승만 정부의 반공정책을 충실히 따르며 정치적 적들을 제거하는 일을 벌였고, 그들의 폭력적인 성향은 이승만 정권이 점차적으로 국가폭력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는 제주 4·3사태의 진압과 맞물려, 국가의 군사적 대응이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이라는 기구를 통해 명목상으로는 좌익 전향자들을 관리하고, 사상 교육을 실시하며 국가의 이념적 순수성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이 보도연맹은 각 고장마다 할당량이 있어 좌익 활동을 한 이력이 없는 이들도 그 수를 채우려는 자들에 의해 도장만 찍어달라고 하여 억지로 가입한 이들이 부지기수라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직후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대규모로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역시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간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삼았던 사례 중 하나였으며, 그로 인한 고통은 무수히 많은 가정과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폭력적 정치는 결국 정치적 폭력과 국가폭력의 정당화를 낳았고, 제주 4·3사태는 이 모든 폭력의 산물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제주도의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주 4·3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중요한 이정표이자, 그 이면에는 단지 제주도민만의 아픔이 아닌, 국가 전체의 부정의가 묻혀 있는 사건입니다.
그 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물러나 다시 하와이로 도망쳤습니다. 잠시 과도기를 거치며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습니다.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국군에 투신했는데, 1940년대 후반 공산주의 계열의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하며 군 내부 세포 조직을 구축하는 데 관여했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군 내부의 남로당 조직이 발각되면서 박정희는 체포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군 정보 책임자였던 백선엽 등의 도움으로 동료들을 밀고하고 전향하여 살아남았습니다.
이처럼 추악한 전력을 지닌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찬탈한 다음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다시 재건한다는 명분하에 국가를 운영했습니다. 그의 권력 기반도 마찬가지로 폭력과 부정으로 채워졌고, 그의 군사정권이 강화되면서 새로운 희생자들이 등장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민주화를 위한 길을 막았고, 그 후의 전두환, 노태우 정부도 마찬가지로 폭력과 억압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며, 결국 그 시대의 아픈 상처는 민간인들의 고통과 함께 남겨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는 제주 4·3사태를 단지 과거의 아픔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은 단지 한 시대의 비극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극우세력의 준동과 같은 현상은 그 당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권, 그 후의 정부들이 취한 정치적 기조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들이 그간 부채질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재, 극우세력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나서서 빨갱이 타령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면에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유산으로 남긴 친일파와 과거의 만주군, 그리고 경찰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 건설에 반대하며, 한미동맹을 강력히 주장하며, 친미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의 독립성과 자주성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사실 이미 우리 사회를 충분히 겪어왔으며, 이제는 그 사상적 잔재를 청산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와 국가의 자주적인 독립을 위한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특히, 제주 4·3사태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다시는 이런 폭력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철저한 반성과 재정립이 필요합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리며, 우리는 과거를 넘어서 평화와 화합을 향한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주 4·3사태는 이제 단순히 기억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동백꽃이 그 비극을 기억하는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동백꽃은 붉은 꽃잎을 통째로 떨어뜨리며 희생된 이들의 순결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또한,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꽃말처럼, 제주 4·3사태의 진정한 의미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로 재해석되며,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백꽃을 제주4·3의 상징으로 사용하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1992년 강요배 화백의 연작 “동백꽃 지다”가 4·3 희생자를 붉은 동백꽃에 비유하며 상징적 이미지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김인생 할머니께서 1988년 출간된 채록집에서 “흰 눈 위에 동백꽃보다 더 붉게 뿌려진 죽음”을 언급하며 문화적 코드로 정착되어 2018년 제주4·3 70주년을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추모 참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강요배 화백 이전에도 이미 제주 무속에서 동백꽃은 환생과 부활을 상징하며,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염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었습니다. 강요배 화백이 이에 연작 작품으로 핏빛 붉은 동백꽃을 그리게 되었다고 보아야 겠지요.
이제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더 나은 사회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제주 4·3사태의 교훈은 우리가 어떻게 정치적 폭력과 갈등을 예방하고, 진정한 화합을 이룰 수 있을지를 묻고 있으며 그 답을 찾기 위한 길은 바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는 저 무도한 자들의 망령되이 부르짓는 빨갱이 타령과 종북타령에 휘돌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작으로 빨갱이였던 자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끌어들여 대한민국 헌법을 바로 세우는 자리에 앉히고, 그들의 입을 통해 빨갱이 소리를 하게 만드는 자들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할 때입니다.
핏빛 붉은 동백이 퍼억 퍽, 재 몸을 송두리째 떨구듯 우리 마음 그대로 온전히 다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