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주장에 맞서 진실을 지키는 노력
김장하 선생님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언론의 역할
김장하 선생님의 삶과 정신은 단순히 정치적 논란을 넘어,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모습과 나눔의 가치를 실천한 귀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종종 왜곡되었고, 특히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러한 왜곡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이 글에서는 진주에서의 탄핵반대집회 참석자들, 헌재, 한남동, 광화문광장에서 전광훈의 입에 휘둘리는 이들에 의해 제기된 왜곡된 주장들이 다시 한 번 확산되지 않도록 진실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김장하 선생님의 장학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문형배 재판관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하며, “어르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정치적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협박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김장하 선생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가 받은 장학금과 지원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며, 마치 정치적 후폭풍이 있을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정치적 압박을 넘어서 법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법관에게 외압을 가하려는 명백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법조문에 충실하면서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야 하는 판사에게, 이런 위협적 요구는 그 자체로 법적 판단을 왜곡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단코 김장하 선생님께서 탄핵반대를 지지하지 않으심에도 말입니다.
이와 같은 왜곡된 주장과 정치적 압박 속에서 김주완 기자와 김현지 PD는 김장하 선생님의 정신과 삶을 올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이미 『어른 김장하』를 통해 밝혀 두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인의 책임을 다하며, 왜곡된 주장을 바로잡기 위해 정확한 사실을 전달했습니다. 그들의 협력은 단순히 언론인의 역할을 넘어서, 왜곡과 정치적 압박 속에서 진실을 지키려는 중요한 노력이었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책임감과 결단력은 언론의 진정성과 사명을 실천하는 귀감이 되었습니다.
진주에서의 탄핵반대집회 참석자들, 헌재, 한남동, 광화문광장에서 전광훈의 입에 휘둘리며 왜곡된 주장을 펼치는 이들에 의해 진실이 왜곡될 위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김장하 선생님의 유산을 왜곡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법의 독립과 진실에 대한 존중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인들의 진실을 바로잡는 노력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진실을 지키기 위한 언론의 역할은 단지 사건을 보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곡된 정보와 진실을 혼동시키려는 시도를 막고, 공정한 사회를 위한 책임감을 다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김장하 선생님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왜곡된 주장이 다시 확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김주완 기자와 김현지 PD가 보여준 진실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과 언론인의 역할은 중요한 본보기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마주하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도 진실을 바로잡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인들의 책임감과 정의를 위한 끊임없는 실천은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 될 것입니다.
최근 제가 구입해 읽은 책들 중의 저자인 김미옥 작가는 진주문고에서의 강연 경험을 바탕으로 문형배 판사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이야기를 오늘 새벽에 페이스북에 소개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작년에 경남 진주의 대표 서점 ‘진주문고’에서 강연한 적이 있다.
그때 문형배 판사가 그곳을 먼저 다녀갔다는 말을 들었다.
“문학 속 재판”을 주제로 한 그의 글을 나는 <문학사상>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한 문장 때문이었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고,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며, 양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가 사례를 든 책은 『레 미제라블』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부활』, 『안나 카레니나』, 『베니스의 상인』 등이었다.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판사들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책 베스트 5’의 첫 번째도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다.
굶주림에 빵을 훔친 자에게 내린 중형은 사법부의 가혹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을 것이다.
다른 네 권은 다이아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김호의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알비 삭스의 『블루 드레스』,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알비 삭스의 책을 좋아한다.』
글을 읽으며 서로 동시성을 가진 점도 특별했지만, 더군다나 그 동시성이 또 다시 겹쳐지는 부분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김미옥 작가가 문형배 판사에게 읽기를 권유하며 소개한 총 14편의 역사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저도 읽었던 책인데 책은 행방불명입니다. 여기에서 김미옥 작가는 ‘요한 아우구스트 수터의 사건’으로 이름을 붙여 “판사가 법조문에 충실히 따를 때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파장의 위험”을 잘 보여주고자 합니다. 톰슨 판사는 법에 충실히 판결을 내렸지만, 그로 인해 사회적 폭동과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결국 원고인 수터는 가족을 잃고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법적 절차와 사회적 정의 사이에서 판사가 겪는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판사가 법을 따르면서도 공정하고 정의로운 결과를 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촉발하는 과정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 기억엔 이 책에서 ‘요한 아우구스트 수터’란 인물을 못 보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이 없으니 검색을 해서 책을 다시 찾아 내용을 살펴보고자 하였지요. 김미옥 작가는 ‘John Augustus Sutter’를 독일이나 스위스식으로 읽었고, 저는 영문발음식으로 ‘존 어거스터스 서터’로 읽어서 빚은 짧은 확인과정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공석인 헌법재판소장을 대행하는 문형배 재판관을 동시에 이야기하고, 거기에 ‘존 서터’란 인물과 관련된 사건을 함께 차용한 일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근사치에는 근접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문형배 재판관을 향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고, ‘요한 수터’와 ‘존 서터’만큼의 미묘한 차이는 여전히 거리를 느끼게 하지요.
존 서터의 생애에 대한 설명에는 몇 가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존 서터(Johann August Suter)는 1803년 2월 23일 독일 바덴의 칸데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 출신이었지만, 어머니는 독일인이었습니다.
서터는 스위스에서 자랐으며, 1818년부터 1823년까지 바젤에서 인쇄 및 출판 견습생으로 일했습니다. 1834년 5월, 서터는 부채와 법적 문제를 피해 프랑스 여권으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이때 그는 아내와 다섯 자녀를 스위스에 남겨두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를 프랑스 이민자로 이야기하는 내용들도 만나게 됩니다.
서터는 여러 지역을 거쳐 1839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멕시코 정부로부터 토지를 받아 “Nueva Helvetia(New Switzerland)”라는 정착지를 설립했습니다. 1848년 1월 24일, 서터가 목재를 가공하기 위해 세운 제재소에서 금에서 제임스 마셜이 금을 발견했습니다. 이 수터스 밀(Sutter's Mill)의 발견으로 인해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시작되었고, 서터의 토지는 금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황폐화되었습니다. 1852년까지 서터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서터는 법정투쟁을 벌여 1855년 캘리포니아 법원으로부터 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는 승소판결을 받아냈으나 금광 이주민(Forty-niners)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폭동을 일으켜 법원에 불을 지르고, 판사를 폭행하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입니다. 서터는 이 폭동으로 인해 세 아들을 잃었습니다. 서터는 자신의 토지 권리를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법적 투쟁을 벌였습니다. 1858년 미국 대법원은 서터의 11리그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지만, 추가적인 22리그 토지에 대한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은 아들인 존 서터 주니어는 새크라멘토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마저도 법정분쟁 비용으로 날려버립니다. 서터는 이후 20년이 넘도록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으로 워싱턴 DC를 오고갔지만 워싱턴 DC 의회가 배상 법안을 고의로 지연시키며 결국 워싱턴 DC에서 심장발작으로 1880년 6월 18일 사망했습니다.
서터의 이야기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의 복잡한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입니다. 그의 경험은 급격한 사회 변화가 개인에게 미칠 수 있는 극적인 영향을 잘 보여줍니다.
저는 이 사례를 헌법재판소의 지지부진한 내란수괴 윤석열에 대한 탄핵심판기일 확정을 ‘워싱턴 DC 의회가 배상 법안 고의 지연’과 맞물려 보았던 것입니다. ‘요한 수터’이던 ‘존 서터’이던 그를 불행한 죽음으로 이르게 한 과정엔 미국 법원의 판결도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워싱턴 DC 의회가 배상 법안 고의 지연’도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더라도 이미 양분된 여론을 잠재우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한쪽은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 없도록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기 때문입니다. 변론기일을 끝낸 날로부터 일주일 내로 탄핵을 인용했다고 하면, 탄핵반대를 외치는 무리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집결되는 일은 방지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