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한계령 4 ‘할머니도 떠나신 설’
4.
저녁 식사를 마친 아버지는 건너 마을에 일이 있다고 나가셨다. 형과 나, 그리고 장수와 인자는 화롯불을 가운데 두고 할머니와 함께 둘러앉았다. 불꽃은 서서히 부옇게 재를 뒤집어쓰며 흔들렸고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부젓가락으로 화롯불을 다독이며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젓가락을 화로 한쪽에 꾹 눌러 꽂으시고 할머니는 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창연아, 니 엄마는 그 뒤로 여태 아무 연락도 없니?”
그 말을 듣는 순간 가만히 할머니가 돋워놓은 화롯불이 내는 빛을 바라봤다. 가물거리며 숯은 또 다시 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장수와 인자도 아무 말 없이 불을 바라보고 있었고, 형도 대답 없이 손에 뻗어 부젓가락을 집더니 화롯불을 휘저을 뿐이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속이 저릿했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가슴 한편이 헛헛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어리지만 그 슬픔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엄마는 어디 계신지 아직 몰라요. 할머니, 그런데… 덕수 정말 큰집에 데려가야 돼요?”
순간 숨을 멈췄다. 형의 말이 귀에 쩌렁 울렸다. 큰집. 낯선 곳. 할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차가운 밥상.
할머니는 한숨을 깊게 내쉬셨다. 불빛에 비친 얼굴이 더 깊은 주름으로 구겨졌다.
“지난밤 니 애비가 하는 말 들은 모양이구나? 어쩌냐. 장수랑 인자도 있으니… 니 애비도 입 하나라도 덜어야 뭘 하든 니들 멕일 거 아니겠냐. 나도 낼이나 모래 다시 갈천으로 돌아가야 하잖니. 가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하고 혀를 찬다. 그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둠 속에서도 나는 선명하게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듯했다. 할머니의 애타는 표정, 형의 굳어버린 얼굴, 그리고 따뜻했던 밥상과 대비되는 차가운 현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 캄캄한 시야가 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내가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처럼.
눈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선명한 그림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고 집을 떠나는 모습. 할머니는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는 모습. 형과 장수, 인자가 아무 말도 못 하고 화롯불만 바라보는 모습. 더듬어 할머니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 손을 꼭 쥐었다. 할머니의 손은 아직도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가 언제까지 내 곁에 남아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왔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할머니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할머니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침이 밝아왔다. 방 안은 아직도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의 공기에 젖어 있었다.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희미한 빛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아버지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잠결에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제 나갈 때 입고 있던 군용 항공점퍼를 그대로 걸친 채였다. 옷자락에는 싸늘한 새벽 공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주머니가 묵직해 보였다. 할머니도 인기척에 깨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셨다.
“뭘 하다 지금 들어오느냐.”
아버지를 향한 책망 섞인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불 속에서 몸을 조금 더 움츠렸다.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군용 점퍼의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담배 여러 갑을 꺼내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어머니, 어제는 일진이 좋아서 담배를 모조리 땄어요.”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딘가 들뜬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담배 갑들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계실 때도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봤었다. 밤을 새우고 들어온 아버지가 담배 갑을 내려놓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문 채 부엌으로 나가셨다. 그때마다 방 안에는 이상한 정적이 감돌았다.
할머니는 혀를 차시며 부엌으로 향하셨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만 빼꼼 내놓은 채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천천히 몸을 숙여 할머니가 주무시던 자리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곧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제 밤,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잠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익숙한 듯, 그러나 여전히 낯선 이 장면이. 어린 마음에도 어째서인지 참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지난밤 앞이 안 보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날이 밝으며 앞이 보인다는 사실도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란 걸 기억했다. 문득 어머니가 계시던 어느 여름날이 떠올랐다.
마당으로 내려서는 뜨락 아래에서 나는 뜨락 위에 신발을 올려놓고 맨발로 신발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여름날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늘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단단한 검은 장막이 드리운 듯한 무서운 광경이 펼쳐졌다.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공허 속에 갇힌 듯했다. 공포가 한순간에 몸을 휘감았다. 숨이 턱 막혔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손을 뻗을 수 없었고, 어둠은 나를 완전히 삼켜버린 것 같았다.
겁에 질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목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퍼져 나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 순간, 부엌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장수를 업은 채 허둥지둥 뛰어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도 이상하게 머릿속에 선명했다.
어머니의 두 손이 나를 덥석 감쌌다.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자 그제야 간신히 숨을 삼켰다. 눈을 감고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어머니의 품속만큼은 선명하고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엌에선 할머니와 형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창연아, 덕수 쟤 뭔 병이 있니? 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시던 할머니의 목소리는 어딘가 흔들렸다. 깊고 낮은 그 소리 속엔 지난밤 내가 앞을 보지 못해 더듬거리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뭔 병이 걸렸나. 얘가 앞을 못 보는 사람처럼 더듬거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은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있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맹증이에요. 근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형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른스러웠지만, 자신 없는 듯도 했다.
할머니가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때구나. 덕수가 네 살 되던 여름에 갑자기 그렇게 됐었지… 약수여관 할아버지가 침을 놔주고, 약을 지어 먹였는데…”
조용한 부엌에서 나누는 대화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말들이 나에게는 유독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때 할머니가 집에 왔었고, 어머니와 함께 약수여관이 동생과 날 데리고 할머니와 함께 갔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숨을 죽인 채 나는 이불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지난밤, 그리고 오래전 여름날의 기억이 겹쳐지듯 스며들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까지 분명 방 안에 있었던 형이 언제 부엌으로 나갔는지가 떠올랐다. 내가 이불 속에 웅크려 있던 사이 형이 언제 일어나 나갔던 걸까? 나는 그 순간을 놓쳤다. 마치 형이 갑자기 사라지고, 부엌에서 조용히 등장한 것만 같았다.
어린 마음에 그게 이상했다. 혹시 형이 방 안에 그대로 있는데, 부엌에서는 형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 용기는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상상은 점점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숨을 죽인 채, 이불 속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 부엌에서 다시금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엌에서는 여전히 할머니와 형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창연아, 네 아버지는 밤마다 나가서 새벽에야 돌아오니?”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 깊고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대답했다.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어요.”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삼키며 이불 속에서 더욱 움츠러들었다. 조용했던 방 안에서 갑자기 아버지가 몸을 뒤척였다. 무거운 천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자세를 바꾸며 몸을 비틀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시나 아버지가 깨어나서,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을까?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나 아버지는 깊은 잠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깊고, 크고, 무겁게.
이불 속에서 손을 꼭 움켜쥐었다. 밤이 되면 사라지고, 새벽이 되면 돌아오는 아버지. 몇 날 며칠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 할머니가 묻고, 형이 대답하고, 나는 가만히 듣고 있는 이 순간이 마치 꿈속 같았다.
이불 밖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두려웠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이불을 더욱 꼭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창연아, 물 좀 길어 와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형이 마지못해 양동이를 들고 나가자, 곧 집 앞 냇가 바위틈에 있는 우물로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 다시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할머니가 솥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다.
“창연아, 솥에 넘치지 않게 조심해서 붓고 다시 한 양동이 길러올래.”
형은 말없이 물을 부었다. 다시 양동이를 들고 나가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졌다.
“덕수랑 장수, 이제 씻고 밥 먹자. 어여 일어들 나.”
할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몸을 일으키고 부엌으로 내려서려 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들어 한마디 하셨다.
“그냥 거기 앉아 있어라.”
시멘트를 바른 부뚜막 옆 계단참에 조용히 쪼그려 앉았다. 할머니는 가마솥뚜껑을 열고 세수대야에 물을 떠서는 내가 앉은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손수건을 적셔 부드럽게 내 얼굴을 닦아주셨다. 따뜻한 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어딘가 나른하고 기분이 좋았다. 손을 씻겨 주시고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셨다.
“됐다. 들어가서 장수도 나오라고 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가 장수한테 할머니가 부엌으로 나오란다고 했다. 곧 장수도 나와 똑같이 씻겨졌다. 그때 형이 다시 양동이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바깥 공기는 싸늘했지만, 부엌에는 따뜻한 김이 가득했다. 할머니의 손길이 닿은 물이 더없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화로 위에 얹힌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뚜껑이 들썩이며 간간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방 안까지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할머니는 찌개를 한 번 휘젓더니 국자로 국물을 떠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밥 먹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부엌에 잔잔하게 퍼졌다. 찌개가 끓으며 풍겨오는 냄새에 이끌려 나는 이미 부엌으로 내려서 부뚜막 옆 계단참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을 바라보았다. 겨울 아침의 싸늘한 공기 속에서도 부엌은 따뜻했다. 화롯불이 이글거리고, 익숙한 냄새가 공기 속을 부드럽게 감쌌다.
할머니는 물을 받아 행주를 적신 뒤 힘주어 주물렀다. 낡았지만 하얀 행주가 물에 젖어 뽀얗게 느껴졌다. 그 행주를 꼭 짜서 형에게 건네며 말씀하셨다.
“창연아, 들어가서 밥상 닦고 준비해라.”
형은 말없이 행주를 받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부엌 바닥에 앉아 형의 움직임을 귀로 쫓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둥근 밥상을 가운데 놓고 다리를 척 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행주로 사각사각 밥상을 닦는 소리. 형이 늘 하던 익숙한 일들이었다.
“아버지, 진지 드시래요.”
형이 조심스레 아버지를 깨웠다. 방 안은 아직도 새벽의 기운이 남아 있었고, 아버지는 그 기운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형의 부르는 소리에 아버지는 몸을 조금씩 비틀며 겨우 눈을 떴다. 이불 속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부엌에서는 할머니가 밥을 푸고 계셨다. 할머니의 손길은 분주했지만 한결같이 부드러웠다. 쌀밥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채로 그릇에 담겼다. 반찬들도 정성스레 담아 쟁반 위에 올려졌다. 김치, 된장찌개, 고슬고슬한 밥. 할머니는 쟁반을 두 손으로 들어 형에게 건넸다.
“창연아 조심해서 받아라.”
형은 조심스럽게 쟁반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아버지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한 눈빛으로, 그러나 익숙한 듯 천천히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아침밥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찌개 냄새가 방 안까지 퍼지고, 둥근 밥상을 가운데로 가족들이 둘러앉았다.
할머니가 밥그릇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그릇이 손끝을 데울 듯했다. 형이 조용히 수저를 놓고 아버지가 말없이 대접에 물을 따라 벌컥거리며 마시고 나서 젓가락을 들었다. 나는 밥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시래기된장국을 떠 먹었다. 구수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할머니는 한 손으로 국자를 잡고, 다른 손으로 반찬을 가지런히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들 먹어라. 국도 더 떠줄 테니.”
방 안에는 숟가락이 밥그릇에 부딪히는 소리와 수저와 젓가락이 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밥상은 따뜻했다.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아범아, 애들 좀 신경 써서 잘 챙기고. 그리고 밖에 나가더라도 집에 들어와서 잠은 자야지. 애들 걱정도 안 되니?”
책망인지 당부인지 모를 그 목소리는 한결같이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스며든 염려와 한숨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아버지는 말없이 마지막 숟가락질을 해 밥을 긁어 입에 넣고, 김치를 집어 천천히 씹었다. 씹는 동안 길게 늘어진 침묵 끝에, 짧고도 무심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알았어요.”
그 한마디가 마치 먼 길 떠나는 배웅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계시다가, 작은 한숨을 삼키며 말씀하셨다.
“오늘 날이 좀 풀리는 것 같구나. 눈이 좀 더 녹으면 내일이라도 갈천으로 돌아가야겠다.”
그 순간, 할머니 없는 집이 떠올랐다. 텅 빈 방과 싸늘한 공기, 그리고 누구도 어루만져 주지 않는 밤. 내 안에서 두려움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은 너무도 적막하고, 어둠은 나를 더 깊이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이틀 더 머무르시던 할머니가 결국 떠나시고, 설이 되었다.
다른 집들은 명절 분위기로 북적였지만, 우리 집은 여전히 조용했다. 문밖으로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우리 집 안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오후가 되자 수원여관 아주머니가 들렀다. 노란색 실로 뜬 옷을 내게 입혀주고, 장수와 인자한테도 새옷을 하나씩 입혀 주셨다. 아주머니의 손길은 따뜻하고 정성스러웠다. 옷을 다 입힌 후, 아주머니는 우리를 번갈아 안아주셨다. 부드러운 체온과 포근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그러다 형을 불러 무엇인가를 조용히 말씀하시고는 이내 돌아가셨다. 문이 닫히고 나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따뜻했던 손길이 사라지고 나니 더욱 쓸쓸함이 밀려왔다.
저녁이 되자, 소금으로 간을 맞춘 떡국이 밥상 위에 놓였다. 아마도 누군가 떡을 가져다 준 듯했다. 희뿌연 국물엔 하얀 떡이 둥둥 떠 있었고, 국물에서 피어오른 김은 천천히 퍼지며 방안을 가볍게 채웠다. 하지만 따뜻해야 할 저녁 밥상에선 아무런 말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없었다. 그의 빈자리는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아무도 앉지 않았던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형은 말없이 숟가락을 들어 국을 떠먹었고, 나도 따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몸이 조금은 데워지는 듯했지만, 속은 여전히 허전했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설을 맞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고, 누군가는 장작을 패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우리 집 안에는 그 어떤 기쁨도, 소란도 없었다. 오직 숟가락이 그릇을 긁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