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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정

시대를 지킨 조용한 사람의 무게

by 한사정덕수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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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품성이 남긴 시대의 울림

 

덕망(德望)이란 ()’()’의 합성어로, 도덕적 품성과 행실에서 비롯된 명망(명예와 명성)을 뜻합니다. 단순히 명성이 높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명성이 도덕성과 인격, 사람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덕망 있는 사람은 권력을 앞세우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며,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지닙니다.

덕망은 권위와 다릅니다. 권위가 지위나 힘에서 비롯된다면, 덕망은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존경입니다. 그러므로 덕망은 억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꾸준한 삶의 자세와 말, 행동을 통해 차곡차곡 쌓이는 것입니다.

덕망 있는 이의 말은 무겁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존재만으로도 공동체에 신뢰를 줍니다. 특히 지도자에게 있어 덕망은 필수적인 자질로 여겨져 왔으며, 사회가 혼란할수록 덕망 있는 인물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집니다.

결국 덕망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타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삶의 향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러난 권력이 떠난 자리에서 국민은 조용히 숨을 골랐습니다. 202544, 대한민국의 헌정사에 뚜렷한 한 획이 새겨진 날,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선언이 헌법재판소의 단상 위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 짧고도 단호한 문장을 낭독한 이는 문형배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었습니다. 시대가 한동안 눌러두었던 정의감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고, 그 목소리는 마치 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처럼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었습니다.

문형배는 파면 결정 이후 국민적 관심의 중심에 섰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기자 김주완이 펴낸 단행본 줬으면 그만이지에 소개된 그와 김장하 선생과의 인연은 이미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단순한 재판관이 아닌, 시대의 무게를 감당해낸 덕망 있는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덕망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한 명성과는 다릅니다. 덕망은 도덕성과 품격, 그리고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진중한 명예입니다. 문형배 재판관의 행보는 이 덕망이란 단어를 시대 앞에 다시 꺼내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법복을 입었을 뿐, 권위를 앞세우지 않았고, 대중 앞에 서는 것보다 조용한 헌신을 택해왔습니다. 정의를 실현하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 결과보다 과정의 정당함을 택한 그의 길은 덕망의 본령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헌법재판소장의 직무를 대행하는 동안 그는 무게 있는 침묵을 견뎠습니다. 재판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 어떤 입장도 외부에 흘러나오지 않았고, 어떤 사적 의견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헌법법률이라는 두 개의 기준만을 붙잡은 채, 헌정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읽은 파면 결정문은 단지 한 사람의 정치적 생애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닌, 국민이 헌법의 이름으로 권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진실을 새긴 선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전 한 온라인 게시판에 남긴 글 하나가 다시 회자되었습니다. 무려 2010316, “그 정도 응원했으면 인간적으로 우승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는 글귀는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문형배라는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는 부산 출신 롯데 자이언츠의 열렬한 팬이었고, 지는 팀에도 진심을 다해 응원하는 이였습니다. “잘할 때 응원하는 거 누군들 못하겠어요. 못할 때 응원하는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팬이죠.”라는 그의 문장은 야구라는 일상 속에서도 그의 삶의 태도가 얼마나 성실하고 단단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야구에 진심이었던 사람은 문형배뿐이 아니었습니다. 김장하 선생과 김주완 기자 역시, 고장과 공동체에 진심을 다해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장하는 평생을 약방을 하며 버는 족족 장학금과 의연금으로 내놓았고, 김주완 기자는 지역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써왔습니다. 이들이 야구에 보여준 마음은 단순한 팬심을 넘어선, 지역과 삶에 대한 애정이었고, 그런 삶의 자세가 곧 덕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문형배는 아마도 자신이 이렇게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끄러운 주목보다 조용한 실천을 선택해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덕망은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삶의 누적에서 비롯되며, 오랜 시간 타인의 신뢰와 존경을 모은 자리에만 깃드는 것입니다.

그는 대중 앞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시대는 그에게 말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가 단 한 마디로 밝혀낸 진실은, 억지로 만든 선전이나 강요된 이미지보다 더 깊이, 더 널리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듭니다.

덕망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나, 공동체는 반드시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보여준 조용한 단호함과 일관된 삶의 태도는, 우리 시대가 다시 회복해야 할 리더십의 기준이자,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08년 초, ‘김주완 김훤주 지역에서 본 세상이라는 다섯 마디 긴 이름의 블로그를 우연히 마주했습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지만, 처음엔 그들이 기자라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글의 결이 단단하면서도 정겨워 오래 알고 지낸 이웃의 기록처럼 느껴졌고, 뒤늦게야 그들이 경남도민일보의 기자들이며 저와 연배도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묘한 동질감으로 다가와, 처음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낯설지 않았습니다. 2년도 지나지 않아, 사이판 총격사건을 제가 알리기 시작하며 우리는 더 깊은 교류를 나누게 됩니다.

김훤주 기자가 먼저 양양을 다녀가고, 그 뒤를 이어 김주완 기자도 양양을 찾아와 함께 술을 나누며 설악의 공기를 마셨습니다. 이어 저도 이들의 초청을 받아 경남의 산과 바다, 사람 냄새 묻어나는 골목들을 걸으며 이들과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지역을 오가며 마음을 건넨 시간이 어느새 흘러 제법 긴 인연이 되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만남과 교류의 순간들은 모두 조용한 삶의 궤적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알게 된 문형배 재판관의 단호한 침묵, 김장하 선생의 나눔, 김주완·김훤주 기자의 꾸준한 기록, 그리고 우리가 함께 나눈 말과 길, 풍경들은 어느 것 하나 과장됨 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덕망이란 결국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얻고, 권력이 없어도 공동체를 이끄는 힘입니다. 그 힘은 오랜 시간 일관된 삶의 자세와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조용히 제 길을 걷는 이들의 뒷모습이야말로, 혼란한 시대에 길이 되는 법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이름으로 덕망의 시간을 이어갈 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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