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부터 국회 충돌까지
1. 22시 27분,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이 선포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 윤석열 대통령께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조치였으며, 이후 군 병력과 경찰력이 주요 국가기관과 민간시설에 전방위로 배치되어 사실상 행정부가 모든 국가 기능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읽히고 있습니다.
이날 이후 국회 진입 시도와 물리적 충돌까지 이어지며 사태는 심각한 헌정 위기로 번졌습니다.
2. 병력 투입 현황 (투입 시각 순)
계엄 선포 직후, 아래와 같은 기관에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12월 3일 22시 31분 – 중앙선관위 과천청사, 정보사령부 병력 약 10명
12월 3일 23시 25분 – 선거연수원(수원), 수원서부경찰서 기동대 약 100명
12월 3일 23시 28분 – 국회, 서울경찰청 기동대 90명
12월 3일 23시 48분 – 국회, 제1공수특전여단 230명
12월 3일 23시 48분 – 과천경찰서, 경찰 기동대 110명
12월 4일 00시 10분 – 양구군청, 제21보병사단 6명
12월 4일 00시 29분 – 고성군청, 제22보병사단 2명
12월 4일 00시 30분 – 선관위 과천청사, 제3공수특전여단 100명
12월 4일 00시 50분 – 선거연수원, 계엄군(소속 불명) 약 130명
12월 4일 01시경 – 딴지일보 사옥, 국군방첩사령부 병력 10~25명
12월 4일 01시 12분 – 선관위 관악청사, 국군방첩사령부 25명
시각 불명 – 과천청사, 국군방첩사령부 25명
시각 불명 – 서울 상공, 제707특수임무단 및 특수작전항공단, UH-60 수송헬기 12대 및 K151 차량 2대
이러한 배치는 사전에 준비된 작전 계획에 따른 것으로 보이며, 각 병력은 전투에 준하는 중무장 상태였습니다.
3. 국회 본청 진입 시도와 충돌
계엄군은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하였으며, 이들은 SCAR-L, K1A, KS-3 기관총, MRAD 저격총, 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고가의 4안식 야간투시경과 방탄복, 수갑까지 휴대하고 있었으며, 실탄 소지 여부는 논란이 되었으나 이후 실탄은 지휘 차량에만 보관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계엄군은 창문을 부수고 본청 1층 전실까지 진입하였으나, 국회 경비원, 보좌관, 당직자 그리고 현장에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의 저항으로 본회의장 점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당시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를 체포하려는 시도가 CCTV에 포착되었으며, 기물 파손과 부상자 발생도 확인되었습니다.
4. 국회의원들의 저항과 진입
계엄군과 경찰이 국회 진입을 차단하자, 일부 국회의원들께서는 직접 국회 담장을 넘어 진입하게 됩니다.
우원식 국회의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학영 국회부의장, 천하람 개혁신당 원내대표, 중증 시각장애인 서미화 의원 등은 직접 담을 넘었으며, 1942년생 박지원 의원은 경찰 병력을 정면 돌파해 입장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진입이 아니라 헌정질서 수호를 위한 물리적 저항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5. 계엄군 내부의 혼란
사건 이후 계엄군 내부에서는 명령 체계의 불명확성과 작전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가 드러났습니다.
707특수임무단과 제1공수특전여단 일부 병력은 “헬기 탑승 직전에서야 목적지를 통보받았다”, “사전에 아무런 브리핑도 받지 못했다”, “지시 없이 현장에 방치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일부 병력은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고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강제로 행동에 나섰으며, 이후 현장에서 “군 복무를 그만두고 싶다”는 반응까지 보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 국회 투입 병력 총계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국회 진입 병력은 약 280명”이라 주장했지만, 특전사령부 및 수도방위사령부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국회 작전에 배치된 병력은 총 685명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제707특수임무단 197명
제1공수특전여단 277명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 및 제1경비단 211명
이는 단순한 보안 작전이 아니라 실질적인 국회 장악을 시도한 무력 배치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7. 맺음말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 헌법이 위협받았던 그날의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계엄령 선포에서 국회 침탈 시도까지를 정리한 제1차 기록이며, 곧 이어질 제2차 기록에서는 탄핵안 표결, 계엄 해제 시도, 그리고 시민사회의 저항을 중심으로 서술드릴 예정입니다.
이 사태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가장 어두운 시험대 위에 올랐으며, 그 현장을 목격한 우리 모두는 이제 증인이 되었습니다.
'시사포커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석열 내란사건 제3차 기록 (0) | 2025.03.30 |
---|---|
윤석열 내란사건 제2차 기록 (0) | 2025.03.30 |
산불로 전소된 고운사, 그리고 타버린… (1) | 2025.03.27 |
헌법재판소의 판단과 민중의 갈망 (0) | 2025.03.25 |
한덕수, 윤석열에 대한 헌재의 판단은? (1) | 2025.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