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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포커스

산불로 전소된 고운사, 그리고 타버린…

by 한사정덕수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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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로 전소된 고운사, 그리고 타버린 것들과 남겨진 것들

— 고운사와 임재해, 그리고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에 대하여

 

저는 어제 저녁, 읍내에서 일을 보고 난 뒤 소주 한 잔을 하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포근해진 탓인지 음식점에서는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더군요. 찌개가 끓던 전골냄비의 가스불을 꺼둔 상태였는데, 순간 코끝을 찌르는 매캐하고 불편한 냄새가 퍼졌습니다. 가스가 덜 꺼졌나 싶어 몇 번이나 확인했고, 음식점 내부를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쓰던 중, 휴대전화에 안전 안내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속초시 대포동 농공단지 내 공장 화재로 인해 발생한 연기가 양양군으로 유입되고 있어 안내드리오니, 군민 여러분께서는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양양군」”

 

그 문자를 확인한 순간, 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저는 양양에서 속초 농공단지 근처로 이사하기 위해 짐을 그곳에 옮겨두었지만 사정상 입주하지 못한 채,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양양으로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아직도 그 창고에는 작업 공구와 냉장고, 에어컨 같은 소중한 재산이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서 불이 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쉽게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고, 급히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다행히 공장 한 곳만 전소되고 불은 진압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화재가 발생했을 때의 냄새와 열기, 그리고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불안의 기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 직접 산불이 번져가는 장면을 목격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산불이 발생하면 불은 눈앞의 숲에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불길과 수백 미터 떨어진 맞은편 산에서도 서서히 하얀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흰 연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점차 연한 노란빛으로 변하고, 마침내 붉은 기운을 띠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튀어 오릅니다. 김이 피어오르던 산은 불과 몇 분 만에 다시 숲 전체를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강한 바람이 불면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됩니다. 하늘로 치솟은 불덩이가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산을 넘어 이동하며, 심지어는 바람과 상승기류에 실린 불씨가 강을 건너는 장면까지 저는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광경은 ‘불’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였습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며칠 전 들려온 경북 의성의 고운사 전소 소식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고운사는 단지 오래된 사찰이 아니었습니다. 보물 2건, 명승 1건, 천연기념물 1건, 시도지정 문화재 4건까지 총 8건의 국가유산이 소실되거나 훼손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단지 오래된 건축물 몇 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넘어서, 천 년의 정신과 전통, 공동체의 기억과 품격이 함께 사라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참사와 관련해 전문가들과 지역 언론을 통해 다양한 원인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산불에 취약한 소나무 일색의 단일 수종 산림, 송이버섯 채취를 위한 소나무 과보호 정책, 그리고 헬기의 진화 효율 문제 등은 구조적 문제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임도 문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임도를 단순한 산림 훼손의 상징으로만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임도는 반드시 필요한 산림 관리 기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공중에서의 진화만으로는 불을 잡을 수 없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진화 인력을 현장에 투입하고, 산악도로에 특화된 소방 차량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불길을 가까이서 제압해야 하기에, 임도는 그 자체로 매우 현실적인 대응 수단이 됩니다. 저는 특히 임도가 지나가는 골짜기의 적절한 지점에는, 물을 충분히 저장할 수 있는 알맞은 규모의 저장 시설을 함께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반복되는 재난 속에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체계를 갖출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지난 2005년, 양양 산불 당시 낙산사가 전소되던 장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불은 낙산해수욕장 인근, 도로와 바닷가 사이의 아름다운 솔밭까지 번졌지만 불길이 바닥을 훑듯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소나무 한 그루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처음으로, 바람이 불을 옮기기도 하지만 때때로 불을 몰아내고 숲을 지켜주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이 모든 것을 삼키기도 하고, 우연한 경로를 따라 살아남는 것들을 남기기도 한다는 사실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는지를 묻게 만듭니다.

 

그 질문은 산불 현장에서 마주한 또 다른 풍경을 통해 더 분명해졌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 권한대행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정중한 인사가 오갔다고 합니다. 반면, 선거법 공판을 마치고 곧바로 현장을 찾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는 “왜 이제 왔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야당 대표는 재난 상황에서 직접적인 행정 권한이 없습니다. 국회 차원의 지원 요청이나 예산 편성 촉구 등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 정부는 산불의 원인 규명부터 진화 지휘, 이재민 지원까지 직접적인 책임과 집행 권한을 가진 주체입니다. 그럼에도 책임 있는 이에게는 예를 갖추고, 책임 없는 이에게는 분노를 표출하는 풍경은 저에게는 여전히 낯설고도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어느 익명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여긴 그냥 산불만 난 게 아니야. 사람 마음도 타버렸어…”

그렇기에 저는 정치가 그 마음을 어떻게 보듬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재명 대표는 3월 26일, 산불 피해가 극심한 경북 안동을 찾아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신속한 지원을 약속합니다. 회색 패딩을 입고 안동체육관 내 대피소를 돌며 이재민 한 분 한 분께 직접 말을 건냈다고 합니다.

“미안할 건 없어요. 우리 어머니가 평생 세금 내셨잖아요. 체면 없는 거 아니에요. 당당하게 요구해도 돼요. 이 나라의 주인이잖아요. 저희가 잘 챙겨드릴게요.”

집을 잃은 이재민의 호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라가 해야 할 일이 이런 일 아니겠나.” “국가가 세금을 거둬서 할 일은, 재난 상황에서 국민들이 먹고 살 방법을 찾아내는 것.” “조립식 모듈(주택)도 가능하지 않나.”

저는 그 조용한 말들 속에 '책임 없는 자의 사과'가 아니라, 주권자 앞에 선 정치인의 약속이 담겨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누가 먼저 왔느냐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남느냐, 누가 더 큰 소리를 냈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조용히 책임을 다하느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적 감정이 아니라, 국민의 현실과 눈높이가 재난 대응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이 단순하고도 절실한 진리를 저는 이번 산불의 현장에서 다시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산불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불은 화선을 방대하게 넓히며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규모로 번졌고, 그 피해는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망자는 26명을 넘었고, 재산과 자연의 피해는 계산조차 불가능할 정도이며, 이재민은 1만 명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산불이 거대한 열기류를 만들어내는 현상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 규모가 커질수록 열기류의 강도도 더욱 극심해지며, 비화(飛火) 현상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불덩이는 하늘을 타고 날아올라 산을 넘고, 마을을 넘어, 강을 건너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상황이 단지 올해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묻고 있는 역사적 장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동은 단지 산불 피해의 현장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한국 민속학의 뿌리를 다져오신 임재해 교수님께서 살아오신 고장이기도 합니다. 《민속문화론》,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 《민속문화의 생태학적 인식》, 《민속문화를 읽는 열쇠말》, 《마을문화의 인문학적 가치》, 《고조선문명과 신시문화》 등 총 33권의 책을 펴내시며, 교수님은 이 땅의 삶과 사상, 공동체의 기억을 기록하고 풀어내는 데 평생을 바쳐오셨습니다.

저는 산불 소식이 들려올 때, 문득 교수님이 떠올라 “안동에 산불이 번진다는데 걱정입니다”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예, 산불 영향권 안에 들어 있어서, 저도 긴장하고 있습니다”라고 조심스레 답해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불이 순식간에 몇 백 미터를 날아서도 번지니, 사시는 곳 주변에 미리 물을 흠뻑 뿌려주세요”라고 덧붙이며 대비책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교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화마가 바람을 만나 날아다닙니다. 우리 집도 화마가 삼켰습니다. 집은 새로 지으면 되는데, 책과 자료들이 모두 소실되어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침묵했는데, 여기저기서 안부를 궁금해하는 분이 많아 소식을 남깁니다. 집을 지키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저는 그저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아도 많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 가족분들 무사하시면 됩니다”라는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집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그 슬픔은 건축물의 파괴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있던 기억, 시간, 지식, 정성들이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남겨진 마음 하나하나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그 마음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지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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